소설리스트

7화 (7/9)

#7.

추석 연휴 마지막 날, 태준의 친정인 태성 그룹에서 만찬회가 열렸다. 태준의 친정집에서는 안쪽에서 이미 틀어놓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Thiago’의 ‘Just one more night with you’. 3층짜리 친정집은 내부가 빠진 곳 없이 다 밝혀져 있었다.

“태성그룹 삼남, 이태준 님 부부 오셨습니다.”

태준과 연우가 리무진에서 내리자 태준이 살던 이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친정집이 바뀌어있는 모습이 펼쳐졌다. 태준과 연우의 신혼집만큼의 크기는 아니지만, 적당히 큰 화원에 반딧불이들 마냥 조그마한 꼬마전구들이 노랑 빛을 반짝거리며 은하수의 별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정원을 두르고 있는 담장과 집 입구의 살짝 튀어나온 부분 사이로는 파티용 가랜더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정원의 안쪽, 집 건물에 가까운 쪽에는 하얀색 파티용 테이블과 의자들이 가지런히 보기 좋게 정돈되어있었다. 동그란 테이블들 위로는 유럽 귀족들이 사용했을 법한 화려한 주전자와 찻잔, 찻잔 받침들이 잘 놓여있었다. 테이블들이 비치된 정원의 공터 한쪽에는 검은색 넓은 계단 모양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서 나중에 오케스트라가 와서 연주할 것 같은 공간이었다.

태성그룹에서 이전에도 이런 식의 행사들을 해오긴 했지만 다른 때보다 좀 더 신경 쓴 것 같은 느낌이 폴폴 풍겼다. 태준과 연우도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는 서로를 마주 봤다.

‘대단한 집안이랑 결혼했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시집가서도 매일 울어주면 더 좋아할 거야. 원래 알파들은 그런 걸 즐기니까, 같이 즐겨줄 줄 아는 오메가가 되면 더 좋지.]

[오메가면 오메가답게 해.]

과거에 제 아버지와 제 둘째 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남겼던 상처가 아직 트라우마 되어 남아있는 태준이었다.

태준은 연우에게 팔짱을 하고는 괜히 연우의 팔 안쪽을 꽉 잡아봤다. 그는 저를 꽉 잡고 있는 태준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피해 살짝 측면으로 태준을 데리고 가는 그였다.

“너, 많이 긴장 돼?”

“네. 그냥 오기 싫은데 온 거잖아요. 여보가 나랑 같이 있어 주려고 부산에도 당장에 달려와 줘서… 휴가까지 써가며 계속 옆에 붙어있어 줘서 홀몸 아닌 내가 확실히 편안하게 부산에서 쉬다가 왔잖아요. 여보가 여기 끝까지 와야 한데서 같이 와준 거잖아요.”

어딘가 모르게 풀이 죽은 채로 중얼거리는 태준의 어깨를 잡으며 그는 위로하듯 얘기했다.

“알았어. 앞으로는 여기 오자는 소리 절대 안 하면서 살게. 그런데 여기가 우리 부부로서 공식적으로 처음 데뷔하는 자리잖아. 사교계에 우리 부부라고 알려놓으려면 데뷔는 해야지. 이 자리에서 사업적으로 얘기할 사람들도 엄청 많아. 너는 자리 앉고 나서 우리가 부부라는 거 알릴 때만 딱 얼굴 비추면 돼. 그 뒤로 바로 웨이팅룸에 가 있으면 돼.”

태준은 자신이 왜 친정집에 발을 들여놓기를 꺼려하는 지에 대해 연우는 정말 감도 안 오는 건가 싶어서 살짝 울먹이며 털어놓았다.

“오메가라고 많이 무시했었어요. 나 여보한테 시집오기 전에 나 오메가 교육 시킨답시고 나 많이 무시했었어요. 특히 아빠랑, 둘째 형이….”

‘얘도 가정에서 받은 상처가 되게 크구나.’

태준에게서 상상도 못 한 동질감을 느낀 연우는 태준의 서글퍼진 눈동자를 잠시 뚫어져라 봤다. 너 같은 애도 집에서 받은 상처가 그렇게 크냐는 듯이 봤다.

‘아마 내가 이렇게까지 상처 있을 애라고는 생각 잘 못 했겠지. 내가 밝아 보이니까. 그런 나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연우는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았을 때 가만히 안아줬던 태준을 떠올리며 똑같 가만히 안아 줬다.

‘너도 내 상처를 보듬어줬었으니까.’

한편으로는 또 화가 나는 상황이 생기면 태준의 아픈 상처를 더 건드리게 될까봐 연우 자기 자신에게 겁이 덜컥 나기도 했다.

‘나는 너처럼 그렇게 자제력 있게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해줄 수 있을까, 과연.’

한 10여 분간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서 있던 둘. 나무 그늘 밑이라 태준이 조금 질질 짜긴 했어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딱히 주의해서 보지는 않았다. 연우가 먼저 태준의 손목을 잡아끌며 입구로 향해 들어갔다.

만찬회 장에 들어서자 밖에서 웅웅거리던 음악이 더 크게 들렸다. 1층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여러 유명인사와 정치인, 기업가들이 각자 칵테일이나 와인 잔을 손에 쥐고 돌아다니며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대 최대네. 맞지?”

이전에도 태성그룹의 만찬회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던 연우는 태성그룹이 평상시에 시행하던 만찬회의 사이즈를 알았다.

‘다른 때보다 2배 이상은 되어 보이네.’

태준은 연우의 질문에 끄덕끄덕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을 향해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둘은 그 묘한 아우라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와중에도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이민혁이었다. 민혁은 둘의 눈을 마주치고도 인사 한마디, 미소 한번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되게 싸가지 없네.’

‘형, 왜 저렇게 쎄하지?’

처음 보는 민혁의 쎄한 느낌에 태준은 뒤를 돌아 민혁이 나가는 것까지 지켜봤다.

‘곧 만찬 시간일 텐데….’

둘은 돌아다니며 연우가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함께 나눴다.

‘최서연은 어디 있는 거지? 만약에 반지 오늘 끼고 왔으면 태준이가 보기 전에 얼른 손가락에서 빼내야 하는데.’

태준과 함께 두어 사람과 인사를 나눈 연우는 두리번거리며 서연을 찾았는데, 없었다.

그 시각 민혁, 정원 한편에 있는 공터.

“약속 한 거 들고 왔어?”

“당연하지, 나도 아무리 마약 하는 애라고 해도 이런 약속은 잘 지켜.”

‘왜 갑자기 반말이야. 여전히 신뢰는 안 가지만 어쨌든.’

민혁은 서연이 주는 서류봉투 안을 확인해봤다. 클럽 이름 앞으로 된 수많은 대포 통장들이 스캔되어 있었다.

“어때, 그 정도면 돼요?”

‘반존대는 갑자기 또 왜해. 말투 되게 거슬리네.’

“잘했어요. 이 반지는 내가 계속 잘 들고 있어요.”

정장 안쪽의 포켓에서 금테 두른 검은색 반지를 서연에게 꺼내 보이는 민혁이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반지를 바라봤다.

“나 몇 번 더 이용하고 그거 돌려주는 거 맞지?”

“네. 근데 말 좀 다시 올려줄래요? 듣기 좀 거북해서.”

“너도 그냥 반말 좀 하면 안 돼?”

“흠.”

여전히 싫은 내색을 하자 태도를 저자세로 낮추는 그녀였다.

“알겠어요, 이 일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계속 높일게요. 그러고 나면 정들어서 다시 낮출 것 같긴 하지만.”

“정이 왜 드나요.”

“내가 죄 지은 건 덮어줄 거잖아요. 안 그래요?”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꽤나 당돌한 목소리로 민혁에게 캐물었다.

“그쪽이 지은 죄는 덮어주려고 총력은 다 하겠죠. 같은 배를 탔으니.”

“그러니까, 원래 그런 건 같이 겪고 나면 서로 많이 호감 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인지상정이라는 용어도 알아? 꼴에.’

“참 쉽게 생각하면서 사네요.”

민혁이 썩소를 보이며 말하자 서연은 약간 불쾌해졌지만, 더 당돌하게 들이댔다.

“내가 좀 붙임성이 좋아서 말이에요. 나랑 반말 안 하고는 못 버티게 만들 수 있어요.”

“반말을 내가 그쪽한테 하게 되는지, 안 하게 되는지는 지금 나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채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봤다.

“일이 되게 잘 되고 나면 그땐 그쪽한테 반말해줄게요. 서비스로. 됐어요?”

그녀는 흔쾌히 끄덕였다.

“좋아요.”

‘뭐야, 나한테 관심 있어?’

기분이 야시꾸리해진 민혁은 그녀를 버려두고 쌩하니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준과 연우는 만찬회장의 저 안쪽까지 들어가서 의자에 잠시 앉아 만찬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띠링.

[며느리 데리고 와라. 인사 한번은 해야지.]

연우는 태준을 데리고 2층 게스트룸으로 올라갔다. 몇 번 와봤던 공간인지라 가족이 어디에 있을지는 뻔히 알고 있던 연우였다. 대리석으로 되어있는 큰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는 왼쪽에서 가장 큰 방으로 향했다.

‘드디어 사진으로만 봤던 이 식구들을 실제로 다 보게 되는 건가!’

태준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겨우 붙잡고 연우를 따라갔다.

똑똑.

기나긴 검은 대리석 복도를 따라 맨 끝 방으로 향한 둘은 노크하고 들어갔다.

대형 게스트룸의 전실.

전체적으로 앤틱한 컨셉의 집에 맞게 황금 테두리의 빨간 의자들과 긴 테이블이 회의용같이 놓여져 있고 오른편 구석에는 집무용 갈색 테이블과 진갈색의 푹신한 사무용 의자가 있었다. 벽에는 중세 유럽풍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 고가의 그림 두어 점이 걸려있었다. 태준과 연우가 열고 들어간 문의 맞은편에는 대형 게스트룸의 내실로 들어갈 수 있는 황금빛의 대문이 또 있었다.

‘남자야, 여자야?’

연우 아빠의 모습은 익히 알고 있던 태준이었다, 하지만 액자에서 보았던 연우 엄마로 예감했던 여자는 없고 묘한 사람이 연우 아빠의 곁에 있었다. 태준은 옆에 연우가 서 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연우의 형과 형수, 아빠가 모두 다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도 태준은 연우 아빠의 옆에 서 있는 신기한 사람에게 저도 모르게 눈이 꽂혔다. 연우가 태준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아, 안녕하세요.”

황급하게 꾸벅꾸벅 거리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댔다. 태준이 신기하게 보던 이도 태준에게 마주 보며 인사를 했다. 검은 정장을 멀끔하게 입고 있는 연우의 아빠와 격식 있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사람은 언뜻 보면 남남 커플인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여자는 아닌 것 같네. 취향이 여자일 것 같았는데….’

태준은 인자한 웃음을 띠고 있는 연우의 아빠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너무 인자해보여서 순간적으로 아이를 학대한 적이 없는, 진정 좋은 아빠인 것처럼 보여졌다.

“우리 며느님, 오늘 부부로는 처음 데뷔하는 건데, 많이 떨리죠?”

“네, 많이 떨리네요.”

“어떻게 그동안 불편한 건 없었어요? 신혼집이라고 나름대로 신경 써서 해줬는데.”

“전혀 불편한 거 없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좋았어요.”

“하하, 다행이구만. 친정댁 식구들이랑은 그동안 잘 만났어요?”

“아, 어머니랑은 이따금씩 잘 만났습니다.”

“아버지랑은 잘 안 만나고?”

“네.”

뭔가 원하는 답이 있었지만, 그 답을 태준이 안 해준 느낌이었다. 그저 끄덕이는 연우의 아빠. 곁에 있던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사람은 갑자기 손을 가만히 두지를 못하며 태준을 뚫어져라보기 시작했다. 태준이 그 눈빛을 느끼고 함께 가만히 쳐다보자 눈동자를 어디로 둘지를 몰라했다. 전체적으로 불안해하는 듯한 그 모습에 태준은 많이 이상함을 느꼈다.

‘이 사람 왜 날 이렇게 보지?’

“어머님… 이신가요?”

무섭고 이상한 사람들 많을 것 같은 연우네 집안이라고 느꼈지만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며느린데 뭐 어떻냐는 마음이었다.

“네… 음… 저, 저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 안에 좀 잠시만 누워있을게요.”

가까스로 대답하고는 어서 자리를 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연우의 형인 임시우와 그 와이프인 최서연은 비틀거리는 그 사람을 부축해서 내실로 들어갔다.

‘왜 저러지?’

“그럼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연우는 분위기 상 태준을 데리고 나가야겠다 싶은 마음에 태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응, 몇 분 뒤에 만찬 할 때 보자고.”

문을 닫고 나와서 태준에게 물었다.

“여보, 저분 알아요?”

“몰라요. 나도 저분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저분이 낳아주신 어머님은 아니죠?”

연우는 태준이 액자를 들고 있던 과거를 기억해 냈다.

“아, 그 액자 속에 있던 여자가 내 생모예요. 생모는 형이 결혼하고 나서 아버지랑 이혼하셨었어요. 저분은 계모로 새로 들어온 분이에요.”

“그러면 친어머니는 어디에 있어요, 지금?”

“일본에 가 계세요.”

태준은 그런 일을 왜 이제야 자기가 알게 되었나 싶어 서운했다. 그러면서도 오늘 시댁 식구들과의 만남은 생각보다 크게 힘들지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근데 저 분 남자예요, 여자예요? 너무 오묘해서요.”

“원래 남자였던 걸로 알아요.”

“원래 남자였던 거면… 저렇게 여자 몸처럼 인위적으로 바꾼 거라는 말이에요?”

태준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지자 연우는 깜짝 놀라며 화제를 전환 시켰다.

“우리 이제 장인 장모님 뵈러 가죠?”

‘뭐지, 일부러 숨기는 건가? 내가 몰라야 할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그를 잠시 바라보던 태준은 일단 그가 원하는 대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지금 계속 캐물어봤자 아무 대답도 안 해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만한 사실들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그의 모습을 본 태준은 시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좀 더 커졌다.

“부모님이 아직 오라는 소리는 없으셨지만… 가보죠.”

3층으로 향하는 둘이었다. 3층 오른편이 가장 큰 방인 태성그룹 회장의 방이었다. 집이 둥근 원형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져있어서 아직 방문은 보이지 않았지만, 태준은 안 좋은 마음으로 두근거렸다. 방문이 눈앞에 나타나기 전, 연우는 태준을 잡고 물었다.

“식구들 봐도 되는 거 맞겠죠? 아까 많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길래….”

“아주 잠깐이라면 괜찮아요.”

똑똑.

회장 방의 전실이 펼쳐졌다. 모두 블랙 앤 화이트로 되어있어 차가운 느낌이 강한 방이었다. 전실에는 사람들이 몇몇 찾아왔었는지 테이블과 의자들을 보아하니 사람들의 흔적이 느껴져서 부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민혁은 없고 민준과 부모님만 그 방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부대끼는 마음을 안고 그래도 곁에 연우가 있어 자신 있게 인사드렸다.

“배가 많이 나왔네. 힘들었을 텐데, 임 서방이 잘해주나 봐. 얼굴빛이 좋네.”

태준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듯이 뻔뻔스럽게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조금은 역겨움을 느꼈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주눅 들게 만들려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감도 크게 들었다.

“네, 많이 잘해줘요.”

“당연히 제가 잘해줘야죠, 장인어른. 아이도 잘 크고 있어서 부산에 태교 여행도 다녀오는 길입니다. 매일 행복합니다.”

적극적으로 거들어주는 연우였고, 태준은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려는 그에게 고마웠다.

“허허, 그래? 역시 젠틀하구만.”

‘하, 왜 저렇게 보지?’

더 예뻐진 태준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시선을 민준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연우의 팔을 꼭 잡았다.

‘나가자고?’

“우리 만찬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여기서 더 얘기할 시간도 없어요. 너네 먼저 내려가 있으렴.”

태준의 사인을 받은 연우는 너무 빨리 나가는 것 아닌가 싶어 주춤했으나, 태준의 엄마가 매우 적절하게 끊어줬다.

1층으로 다시 내려온 둘이었다.

1층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던 홀이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고, 1층의 정중앙에 있던 아주 커다란 문들이 열려있어 북적거리는 반대편 1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이 만찬을 하는 현장. 사람들은 이미 만찬장에 가 있었다.

오후 8시.

좀 늦은 저녁이 시작됐다. 그룹 단위로 앉은 사람들이 에피타이저와 스프부터 먹었다.

띵띵!

연주되고 있던 피아노가 멈추고 그 곁에서 만찬회를 주최한 태성그룹 회장이 와인 잔을 몇 번 치며 주목시켰다. 마이크가 있는 황금색의 단상 위로 올라가는 회장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귀빈 여러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올해 저희 태성 그룹은 임원석 장관님의 예당기업과 숭고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오늘 만찬회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임원석 장관님의 차남 임연우, 태성그룹의 삼남 이태준 군께 큰 축하의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우가 태준을 일으켜 세워 함께 사람들이 가장 많은 쪽으로 향해 허리를 숙였다. 만찬회장의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이제 공식적으로 계약이 성사된 거네.’

태준은 결혼 첫날의 계약서를 떠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는 터라 애써 웃음 짓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씁쓸했다. 원하지 않던 결혼이어서였을까. 좀 더 자유로운 미래를 꿈꾸며 커왔지만 어딘가에 콱 매여서 살아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뜨거운 에피타이저가 한 번 더 나오고 태준은 연우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 웨이팅룸으로 갈래요.”

연우는 태준에게 눈짓으로 끄덕거렸다.

“저… 장모님, 혹시 태준이 방 그대로 있습니까?”

“있어. 혹시 몰라서 청소도 해놨어. 깨끗할 거야.”

태준의 부모, 형들과 함께 합석해 있던 둘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속이 안 좋다고 해서 방에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태준을 방으로 데리고 온 연우였다.

연우는 몰래 장치된 카메라가 혹시 있는지 살펴봤다. 카메라를 찾는 어플로 찾아보지만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 비서, 정조대랑 자위기구 좀 몰래 가지고 와. 여기 2층 오른쪽 중간 방이야.”

‘정조대? 자위기구?’

“제일 최근에 바람핀 거 만찬회 때 벌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정조대와 섹스토이가 도착하고 연우는 태준에게 조금 긴 꼬리가 달린 달걀 모양의 진동하는 자위기구를 보여 줬다.

‘헐… 저걸 내 몸에…?’

태준의 하얀색 드레스를 슬슬 걷어 올렸다. 태준은 처음 시도해보는 기구여서 긴장했다. 태준에게 팬티를 입고 오지 말라고 했던 그였다. 태준의 아래가 적나라하게 노출이 되고 그는 태준의 아래에 기구를 삽입했다.

“으음-.”

그는 딜도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어플을 보여주며 미소 지었다. 그가 위쪽 화살표를 누르자 강도가 더 세지며 태준은 격하게 흐느꼈다.

“아흑! 하앙, 아으.”

벌어진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허리를 튕겼다. 그는 아랑곳 않고 정장 안주머니에 두었던 끈 안대로 머리통을 단단히 둘러싸고 눈을 가렸다. 손도 줄로 단단히 묶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입에도 끈을 물려서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조대를 채우고 만족했다.

“나 앞으로 한 시간마다 여기 올 거야.”

그는 문을 잠그고 나갔다. 최대 진동 세기 10인 바이브레이터이지만 너무 세게 맞춰놓고 나가면 태준이 심하게 무서워할까 싶어 진동 2로만 맞춰놓고 갔다. 태준은 갑작스러운 감금플에 불안해하다가 한두 번이 아닌 그의 행태에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완전 극악의 상황까지 가게는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냥 있다 보면 풀어줄 거야.’

약하게 움직이는 진동에 태준은 작게 끙끙거렸다. 부풀어 오르는 남성기가 정조대에 의해 저항받자 좀 더 야릿한 느낌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사정하고 싶어도 페니스를 더 자극하면서도 요도 구멍을 막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사정 못해서 죽은 귀신이 되는 건 아니겠지?’

태준은 너무 흥분해서 죽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있었던 것도 같았다.

‘나 오늘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

한 시간 후.

연우는 계속 식사를 하면서 맞은편에 앉은 민혁을 견제하듯 살폈다. 태준이 어디 있는지를 들은 민혁이기에 틈나면 태준에게로 갈까봐 연우는 약간 불안했다.

‘지금 내가 내 와이프를 어떻게 해놓고 있는지를 알면 너도 이성이 나갈걸?’

연우는 묘한 승리감에 진동 세기를 3으로 올렸다. 좀 더 흥분해서 끈적이는 액들을 더 많이 싸 내면서 바들바들 떨고 있을 태준의 모습을 상상했다. 연우의 페니스도 살짝 발기가 되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이태준이 자위하고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없어.’

연우는 디저트로 나온 작고 윤이 나는 사과 모양의 케이크를 반을 쪼게 한입 넣고 나서 민혁을 째려봤다. 식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갈 쯤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준의 방으로 향했다. 진동 세기는 4로 살짝 올렸다.

“잘 있었어?”

허리를 살살 비틀며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흡족했다. 태준의 정조대를 풀었다.

“히익! 많이도 싸놨네.”

태준을 바라보며 웃었다.

“냄새나서 못 쓰겠다.”

태준의 쿠퍼액과 질액으로 범벅이 된 정조대를 다시 안 쓸 생각으로 구석에 놔뒀다. 약 20분 전쯤부터 어딘가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잘하고 있던 연우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고 태준의 축축한 아래에 밀어 넣었다. 태준은 페니스에 차 있던 정액들을 쏟아 냈다.

“내가 넣었는데 네가 싸네.”

넣었을 뿐인데 사정하는 태준을 보며 살짝 우월감을 느꼈다.

‘쪽팔려.’

그는 태준을 품어 안아줬다.

“한 시간 동안 내 생각 많이 했어?”

“흡, 예.”

대답은 하지만 입을 막고 있는 끈 때문에 선명하게 들리지를 않았다. 그래도 알아듣는 그였다.

“다음에도 바람 필 거예요, 안 필 거예요?”

“아힐어에여.”

웅얼거리는 태준의 말이지만 그래도 역시 알아듣는 그였다. 만족한 듯 환하게 웃으며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아흐, 흑, 흥, 흥.”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면서 울었다. 그는 깔려 있는 태준의 나와 있는 배를 쥐고 더 격렬하게 피스톤 질을 했다. 태준은 아까보다 살짝 더 무서워졌지만 즐기려고 노력했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대고 앉았다. 누워있던 태준을 일으켜 그의 다리 쪽에 앉혔다.

“응?”

그는 태준의 질 구멍에 그의 페니스를 정조준해서 그의 성기 위쪽에 태준이 앉도록 위치시켰다.

“네가 움직여봐.”

태준은 살살 위아래로 움직였다. 가누기 힘든 상체라서 자꾸만 옆으로, 앞으로 넘어지려고 하자 그는 태준의 허리와 등 쪽을 잡아주며 지지를 해줬다.

“옳지, 잘하네.”

태준은 잘한다는 칭찬에 살짝 부끄러워졌다. 성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알아서 잘하네.”

그의 성기를 임산부치고는 나름대로 유연하게 잘 돌리는 태준에 의해 그는 태준의 안에다가 사정을 한다. 힘들어하는 태준이 숨을 쉴 수 있도록 입 묶은 끈을 잠시 풀어줬다.

“후아, 하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걸 또 편안하게만 지켜보기 싫은 그는 태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쪽.

처음 몇 번은 태준이 숨을 마저 잘 내쉴 수 있도록 프렌치 키스에 가깝게 입술만을 그의 입안에 몇 번 빨아들였다. 태준의 가쁜 숨이 잦아들자 딥하게 키스했다. 그의 혀는 태준의 혀를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 농도 짙은 키스가 끝나고 둘은 얼굴을 아주 가까이 마주 보고 대화했다. 그가 태준의 머리를 감싼 채로였다.

“너 누구 거야?”

“연우 님 거예요.”

“근데 왜 다른 사람한테 다리 벌렸어? 응? 다른 사람한테 다리 벌리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이제 알았어요.”

나름대로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태준에게 웃음이 나는 그였다.

“그전에는 몰라서 벌렸어?”

“몰랐어요. 죄송해요.”

“그런 거 모를 정도로 섹스 밝히나 봐? 응? 앞으로 다른 사람 거 넣을 거야?”

“절대 안 넣을 거예요.”

정복감, 소유욕이 어느 정도 채워지고 있는 그는 꽤 기분이 좋아졌다.

“남이 너한테 넣으면 이제 어떻게 말할 거야?”

“하지 말라고 할 거예요.”

“네 주인이 누구라고 말할 건데?”

“주인은 연우 님이라고 말할 거예요.”

많이 기분이 좋아진 그는 다시 태준의 안에다가 발기한 제 물건을 꽂아 넣었다.

“하아.”

꽂아 넣을 때마다 흥분을 시작해온 태준이 익숙하다는 듯이 그는 제 할 말을 계속해서 뱉었다.

“내가 결혼 첫날에 말했지, 내 말 안 들으면 노예 취급할 거라고.”

웃음기 없이 사뭇 진지한 톤으로 무서운 말을 내뱉는 그가 무서워지는 태준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장난으로 하는 말인지에 대해 사태 파악을 하는 중이었다. 대답을 안 하는 태준에게 한 번 더 몰아세우는 그였다.

“한 번만 더 남의 물건 넣고 좋아해 봐, 그땐 뱃속에 있는 애건 밖으로 나온 애건 그 애는 신경도 안 쓰고 너를 성노예 취급해줄 거니까.”

‘무서워.’

갑작스럽게 돌변하는 그의 태도에 태준은 긴장했다.

“성노예 취급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알아? 그 모습 직접 겪으면서 보기 싫으면 아랫도리 잘 간수해. 안 그러면 나한테 육변기로 몸이나 굴리면서 돈 벌고 살아야지 뭐. 그땐 네 방이고 뭐고 없을 줄 알아. 다 몸 굴리면서 먹고 자고 싸면서 살게 만들 거니까.”

충격적인 발언들에 태준은 안대를 한 채로 그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아무것도 안 보일 때에 들려오는 말이라서 더 무서웠다.

“대답 안 해?”

“네.”

“바깥에서 계속 몸 굴리면서 다닐 거야?”

“안 할 거예요.”

태준을 끌어안는 그였다.

“내 말 좀 들어. 안 들으면 집에서도 이렇게 해놓고 한 시간에 한 번씩 소변 누듯이 너한테 싸러 올 거니까. 변기 취급당하기 싫으면 내 말 듣고 살아.”

“네.”

작은 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그는 발정난 오메가 때문에 성가셔 죽겠다는 듯 한숨을 후- 쉬고는 피스톤 질을 또다시 격렬하게 했다.

‘아, 이게 지금 변기 취급하는 걸 맛보기로 보여주는 거구나.’

태준은 그에 의해 많이 흔들리면서도 그의 소름 끼치는 면에 대해 다시 한 번 각성하게 됐다.

‘역시 그 못된 모습은 어디 가질 않는 거였어.’

그는 두 번째 사정을 하고는 다시 태준의 입을 끈으로 막고 아랫도리에 바이브레이터를 넣어준 후, 문을 잠그고 나갔다.

그가 밖을 나가자 만찬회장은 이미 정리가 거의 끝난 상태였고, 많은 참석자들이 정원에서 애프터파티를 하기 위해 나가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이미 공연준비를 다 끝내가는 상황에서 연우도 정원으로 나가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정원에서 하는 파티에는 딱히 모두가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여서 집 안 곳곳에 있는 큰 그림과 함께 놓여있는 작은 의자와 탁자에 혼자 가서 앉은 채로 쉬는 사람들도 있었다. 연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민혁의 동태를 살펴봤다.

초반부에 정원 테이블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며 앉아있던 민혁은 누군가가 부르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서서 집 건물 뒤쪽으로 바쁘게 향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누구지?’

누구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지만 그래도 무척 바빠 보이는 모습에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30분이 지난 후였다.

딸칵!

태준이 있는 방의 문고리가 돌아갔다. 누군가가 태준에게로 다가왔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온댔는데? 벌써 시간이 지난 건가?’

시계를 보고 싶었지만, 눈을 가린 채 손도 묶여있는 태준이 시간을 알 방법은 딱히 없었다. 그저 연우려니 해야만 했다.

‘누군가’는 태준을 침대의 가로로 눕도록 만들고는 두 다리가 침대 가로 내려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잘 보이는 태준의 아래에 발기한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탁, 탁, 탁.

피스톤 질을 하는 양상이 연우의 전형적인 양상과는 좀 달랐다. ‘누군가’는 연우처럼 손을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정말 소변을 보듯 손은 까딱하지 않고 성기를 넣고 빼는 일에만 집중했다.

“흐후에여?”

누구냐고 묻는 태준의 말이 막아놓은 입 때문에 일그러졌다. 여전히 탁탁 소리를 내며 번식 행위에만 집중하는 짐승처럼 태준을 괴롭히는 ‘누군가’였다.

누군가는 태준의 아래에 신음을 조용히 흘리며 박아 넣기 시작했다.

“으흐응, 흐음!”

덩달아 올라가는 태준의 비음이 들렸다.

“하아, 하아.”

평상시 느끼는 듯한 연우의 신음소리가 아니라 숨 차는 듯한 신음소리에 태준은 긴장해서 태준의 손을 꽉 묶고 있는 줄을 꼭 쥐었다.

‘신음소리 들어보니까 확실히 연우 님이 아니야. 그럼 도대체 누가 나한테 이러고 있는 거지?’

태준은 흥분이 되는 것은 둘째 치고 무서운 마음이 크게 자리 잡았다.

드르륵.

다시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였다.

퍽!

‘누군가’가 맞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 새끼야. 너 임산부한테 무슨 짓이야!”

“형, 그게 아니라.”

‘헥! 민준이 형인가?’

익숙한 목소리에 태준은 손이 오그라들어 주먹이 쥐어졌다. 저 둘은 형제, 민혁은 그래도 태준을 인간적으로는 존중을 해줘 왔으니 둘 사이에 피바람이 불겠다 싶어 태준도 꽤나 긴장했다.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퍽!

민혁의 목소리가 민준의 목소리를 압도하며 또 다시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으로 추정되는 소리가 맞고 있었다.

‘민혁이 형이 이렇게 화난 목소리는 처음이야.’

퍽! 우당탕.

민혁을 한번 세게 들이받고는 민혁을 피해 도망갔다. 도망가다가 한번 헛디뎌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서 뛰어갔다.

“음-.”

민혁은 민준을 잡으려다가 태준의 큰 비음 소리를 듣고 문턱에서 멈춰 섰다. 민혁은 태준에게로 당장 달려갔다. 태준의 눈과 입, 손을 묶고 있는 끈들을 모두 풀어주고는 태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태준아, 태준아.”

태준의 몸 곳곳을 살펴보는 민혁이었다.

‘이민준, 저 새끼도 사람 새끼 맞나 진짜.’

동생에게 욱하고 올라오는 화는 뒤로 한 채 태준이 얼마나 무서웠을 지를 생각했다. 민혁은 태준을 침대에 걸터앉게 만들고 태준의 어깨를 꼭 잡으며 태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태준아, 무서웠지? 응?”

아까 인사도 하지 않는 채로 지나가던 모습과는 다른 민혁의 모습이었다. 태준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지며 눈물을 흘렸다.

“흐흐흡.”

그는 태준을 말없이 꼬옥 보듬어 안아줬다. 태준이 얼마나 놀랬으며 당황했고 비참했을까를 생각해보며 같이 눈물 흘려주는 그였다. 한참을 그렇게 그는 태준을 안아주고 있었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태준의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혔다.

“태준아, 너 먼저 집에 들어가서 좀 쉴래? 여기 계속 있을 수 있겠어?”

“네, 집에 들어가서 쉴래요.”

그는 태준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쨍그랑!

갑자기 들려오는 와인잔 깨지는 소리에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려던 그와 태준은 소리를 향해 쳐다봤다.

“이게 왜 기사가 나!”

뉴스를 알려주는 자신의 하인에게 윽박을 지르는 젊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또 무슨 일이지?’

영문을 몰라 민혁을 바라보는 태준에 비해 민혁은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는 서둘러서 태준을 데리고 사람들이 많이 있는 1층 정원 공터를 지나갔다. 그의 재킷을 두른 태준과 그가 함께 서둘러 어딘가로 향해가는 것을 발견한 연우였다.

‘애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낯설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다 같이 합석해서 보기 전과 지금의 눈빛들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도 하고 다들 폰에서 뭔가를 본 듯했다.

‘무슨 일이지?’

그 순간 오는 연우의 집사는 연우에게 소곤거렸다.

“도련님, 지금 예당 기업과 관련된 클럽들이 마약을 밀매매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검찰 수사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집사를 바라봤다. 자신을 향해 보는 사뭇 이상한 시선들이 이제는 이해가 완전히 되는 그였다. 형인 시우와 아버지를 찾아보는데 그들도 그와 비슷한 시선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 저희랑 마약 밀매매하고 있는 클럽들에 검찰 수사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으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형인 시우는 아직 무슨 영문인지는 잘 모르나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서 자리를 떠났다. 원래 있었던 2층 게스트룸으로 올라가는 그들이었다.

‘태준이 어디로 가는 건지 챙겨야 하는데….’

태준의 행방에 대해서도 다급한 그였지만 큰일이 터진 상황이라 아버지가 있는 가족을 먼저 챙겨야 하는 그였다. 그 또한 원래의 2층 게스트룸으로 향해 올라간다.

한편 태준과 민혁은 호텔에 있었다.

“태준아, 주치의 선생님 곧 오신댔어. 여기 누워 있어.”

민혁은 특급호텔로 태준을 이동시켰다. 침대에 드러눕는 태준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곁에 조심스럽게 앉아서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 그렇게 힘들게 누가 만들었어? 민준이가?”

“아뇨, 그렇게 결박해둔 건 남편이었어요.”

“임산부한테 왜 그렇게 한 거야… 하 씨….”

민혁은 태준의 손을 꼭 쥐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화를 냈다.

“내가 형이랑 바람핀 거 벌주려고 그랬다는데… 괜찮아요. 형, 그 사람은 괜찮아.”

“뭐? 나랑 바람핀 것 때문에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 새끼도 제정신이야?”

“괜찮아요. 형, 남편한테는 괜찮아요 나….”

“미안해. 미안해 태준아… 나 때문에 네가….”

다시 안아주고는 눈물지었다.

“미안해….”

태준은 말없이 민혁를 다독이며 사과를 받아 줬다.

“그런데 민준이는 어떻게 너한테 그러고 있던 거야?”

“나도 몰라요… 그 사람은….”

민준에게는 형이라고도 이제는 부르기도 싫었다. 태준의 머리가 스트레스로 찡해졌다.

“태준아, 태준아….”

태준을 그러안고 펑펑 우는 민혁이었다. 태준도 민혁과 함께 울었다.

“그 형은… 못됐어요. 남편이 그래도 그 방문을 잠그고 나갔었는데, 그 형이 스페어키로 문을 따고 들어왔나 봐요.”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그는 태준의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아줬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애틋하게 태준을 바라보는 그였다. 그는 태준의 곁에 누워서 한동안 놀란 태준을 진정시키기 위해 꼭 안아주고 있었다.

똑똑.

의사가 와서 태준의 상태를 확인했다. 태준의 뱃속 아기의 상태는 다행히도 양호했고, 태준은 강간 후 스트레스를 위해 정신과적 치료를 몇 달간 받기로 했다. 의사가 나가고 민혁은 다시 곁에 걸터앉아 태준을 처량하게 바라봤다.

“너 남편이랑 계속 살 수 있겠어?”

“한 번씩 저렇게 무리하게 잠자리를 원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까지는 나름 견딜 만 했어요. 오늘도 그냥 우리 바람 피웠던 게 화나서 그랬던 거니까… 아마 일회성일거라고 생각은 드는데….”

“또 모르는 거잖아. 그런 이상한 플레이를 요구할지. 근데 너는 임산부고.”

“그래서 조금 힘들긴 해요. 앞으로도 그렇게 나오면 좀 곤란할 거는 같아요.”

태준은 머리가 다시 지끈해지는지 머리를 한 손으로 받쳤다. 민혁은 태준을 다시 뉘여 주며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평상시에는? 평상시에는 또라이 짓 안 해?”

“사실 요즘은 오히려 좋았어요. 나 생일도 너무 잘 챙겨줬고, 부산에서도 너무 잘 보내다가 왔어요, 솔직히.”

“그런데 가끔 이렇게 요상한 잠자리를 원할 뿐인 거야?”

“네….”

“하!”

‘겁나 이기적인 새끼네.’

“너 힘들잖아. 네가 지금 애도 있는데 너무 힘들잖아. 그게 널 배려하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태준을 데리고 살아주고 싶은 민혁이었지만 그게 안 되는 현실이 싫었다.

“사실 지금 상태에서는 더 이상은 격한 잠자리를 못 받아줄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일을 당해버려서….”

다른 이도 아닌 함께 자랐던 둘째 형에게 당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으리라. 그는 태준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다시 태준의 곁으로 가 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태준을 따뜻하게 안아줬다. 태준의 머릿결 사이로 그의 코가 들어갔다. 태준의 꽃내음 나는 머리칼의 냄새에 코를 잠시 비볐다.

“그렇게 너무 힘들면 이혼해. 그래도 돼. 응?”

귀에다 대고 한편으로는 달래듯, 한편으로는 유혹하듯 속닥이는 그였다. 태준의 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배를 살살 만졌다.

“그렇게 할까요….”

“응.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모르겠어요. 힘은 드는데….”

태준이 머리가 아파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말을 끝내지 않고 베개 쪽으로 얼굴을 더 묻어 버렸다.

‘결국엔 나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될 거야.’

그는 고개를 묻고 잠이 들려는 태준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바람펴서 저 지랄을 시작했다니 더 이상의 바람은 안 되겠지.’

그는 자신의 운전기사를 불렀다.

“다시 우리 집으로 가죠.”

[기자님, 감사합니다. 계약금은 잘 받으셨지요? 업무완수금 송금해드릴게요.]

태성그룹의 이사로 재직할 당시에 알고 있던 기자를 통해 마약 건을 터트릴 수 있었던 그였다. 태성그룹의 기사들을 주로 담당해왔던 기자들 중에서 금융공기업 담당 기자로 담당 업무가 바뀐 사람을 알아내 일을 처리했다. 차 안에서 2억을 기자에게 보내고 결과물인 뉴스들을 확인하며 다시 만찬회 장으로 향했다.

한편 2층 게스트룸 앞.

연우와 시우, 서연은 방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말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의해 2층 복도에 모여 서 있었다. 서연은 반짝거리는 회색의 털들이 붙어있는 작은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그 재킷마저도 벗기 직전인 듯 아슬아슬하게 있었다. 안으로는 검은 나시 끈과 검은 프릴들이 달린 짧은 블랙 드레스를 입고 까만 끈으로만 된 하이힐을 아찔하게 신고 있었다.

‘내가 꾸민 일인 줄은 모르게 해야지 이 사람들조차도.’

연우와 비슷한 키에 비슷한 피부톤이지만 느끼하게 생긴 연우와는 조금 다르게 시우는 더 곱상했다. 눈은 연우가 조금 더 컸지만 못지않게 크고 진한 쌍꺼풀이 있고, 연우의 매부리코가 아닌 직선 모양의 코, 연우보다 얇은 듯하지만 제법 통통한 입술의 소유자였다. 연우보다 얼굴이 좀 더 작은 시우는 느끼하기보단 귀한 집 도련님 느낌이 잘 나는 인물이었다.

“나는 화장실 좀 갈게. 당신 먼저 딴 데 가봐요.”

서연은 담배를 피려는 듯 라이터를 꺼내고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여자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했다. 시우는 그녀의 팔 한쪽을 잡았다.

“너랑 간만에 같이 온 거 이미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데 뭐 나 혼자 가라고?”

“혼자 가라면 혼자 가. 여태껏 나 없이 잘 살았잖아. 어디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언제는 뭐 내가 필요했나?”

“내가 지금 혼자 가는 게 무서워서 너한테 같이 가자는 거야? 같이 온 거 다들 아니까 그냥 같이 가자고!”

그녀는 자신의 팔을 더 옭아매는 시우의 손을 잽싸게 휙 뿌리쳤다.

“나 똥 급해! 많이 쌀 거 같은데 계속 여기서 죽치고 앉아있을래? 배 아파서 여러 번 왔다 갔다 할 거라고!”

남들에게 얼굴 내보이며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마음에도 없는 인사들을 주고받는 문화가 영 체질에 안 맞는 그녀였기에 시우도 그냥 포기하고 등 돌려 버렸다.

“에휴, 그래 네 멋대로 똥을 싸든가 담배를 줄창 피든가! 여기서도 진짜 격 떨어지게 말 찍찍 내뱉는 거 봐라. 마약에 찌든 년 진짜.”

등 돌리고 가려던 시우는 연우를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너 거기 서 있다가 형수님 좀 모시고 어디 데려다 놔줘라?”

‘형수님은 무슨.’

“예, 형님. 가던 길 가세요.”

“가던 길 가세요?”

같잖다는 듯 웃으며 가버리는 시우. 연우와 시우는 나이 차가 1살밖에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시우를 더 우대하면서 키워 형님에게 깍듯하게 대해야만 해왔던 연우였다.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못 들은 체 화장실로 향하던 서연은 다시 연우에게로 픽 돌아와 물었다.

“나랑 잘래?”

“미쳤어? 지금 너랑 왜 자?”

서연은 더 도발하듯 담배를 입에서 떼고 연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짧은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무릎은 연우의 정장 입은 다리들 사이로 집어넣고 손은 바지춤에 가져댔다.

“네 형이 날 너한테 맡기고 갔잖아. 고양이한테 생선 맡긴 꼴 아니야? 응?”

연우는 서연의 유혹에 혹한 듯 이끌려서 키스를 시작했다. 그녀의 고동색 립스틱이 연우의 입술 안으로 파묻히고 둘은 여자 화장실과 2층의 방들 사이에 존재하는 깊게 파인 어두운 공간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쪽, 쪽.

그녀에게 홀린 듯한 연우는 귀를 빨고 원피스 안에 있던 스타킹을 손으로 내리면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가슴 까, 빨리.”

그녀는 아슬아슬 걸쳐있던 작은 재킷을 다 벗어버리고 나시 끈을 제 손으로 내려 가슴을 드러냈다. 연우는 그녀의 드러난 가슴을 만지며 계속 키스를 해댔다.

‘짜릿해.’

자신에게 심드렁한 값싼 여자들과 어울리는 남편에게 신물이 난 그녀는 남편 몰래 하는 연우와의 섹스가 아직도 아찔했다. 그러나, 갑자기 스타킹을 내리던 손을 그만두고 입술을 떼는 연우였다.

“왜?”

“오늘 내가 줬던 반지 안 끼고 왔더라? 약속대로.”

“응, 약속이었으니까?”

연우는 짓궂게 찡그리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은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에 의해 그녀의 눈에도 조금은 보였다. 연우는 갑자기 그녀의 니플을 장난치듯 톡톡톡 두 손가락으로 집게질을 하듯이 건드렸다. 급 낮은 오메가들에게나 하는 듯한 행동에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제 가슴으로 장난질하는 손을 홱 잡아 던졌다.

“어우, 무슨 짓이야 이게!”

“평생 약속으로 하자. 그거. 내가 준 반지 안 끼겠다는 거. 맘에 든다.”

아직 가슴을 드러낸 채로 연우의 앞에 서 있던 그녀를 놔두고 얄밉게 휙 돌아서서 그곳을 나가는 연우였고, 그녀는 두 번 자존심이 상했다.

“허!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끈을 다시 올리며 가슴을 가리고 회색 깃털 재킷을 다시 어깨에 걸쳤다.

“누군 뭐 맛있었는 줄 아나!”

당차게 일부러 더 또각거리며 씩씩거리고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소리에 웃음이 났다.

‘태준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돼.’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심각하게 분위기가 바뀐 연우는 휴대폰으로 태준에게 전화를 걸며 1층으로 내려갔다.

서연은 화장실로 돌아왔다.

씩씩대며 화장실의 거울 앞에 서서 연우에게 스스로 드러냈던 가슴이 민망해 괜히 더 가슴 쪽으로 옷가지를 정돈했다. 연우에게 키스를 당해 지워진 고동색 립스틱을 다시 고쳐 발랐다.

‘와이프한테 그렇게 절절맨다 그거지 이제는.’

회색 재킷을 괜히 단정하게 고쳐 입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먼저 유혹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무리 주의 전환용 작업이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너네 집안은 어차피 이제….”

‘죽었어.’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화장실 안에 있을까봐 마지막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이태준 방에 가서 물건 한번 찾아볼까?’

입술과 얼굴 몇 군데가 쥐어 터진 채로 밖으로 빨리 뛰쳐나가는 민준의 모습과 민혁에게 부축 받으며 나오는 태준의 모습을 다 정원에서부터 지켜봤다.

‘무슨 일이 있었음이 틀림없잖아?’

고개를 한번 갸웃하며 거울을 보고 씩 웃었다. 연우에게 화가 나서 당돌하게 걷던 발걸음과는 달리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유히 화장실을 나갔다. 같은 층인 태준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태준의 방 안에서 서연이 유심히 찾아본 결과 나온 것은 녹음 기기였다. 방 안에서 녹음이 된 내용도 다 들어본 서연은 슬며시 웃었다.

‘이거 이민준이 설치한 거구만. 이 녹음되고 있는 내용을 듣고 제 동생을 겁탈했네. 연우가 1시간에 1번씩 온다고 했으니까 지는 30분쯤 되어서 들어온 거야.’

“와, 일들이 요상하게 돌아간다. 이 카드는 내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서연은 잘은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일을 건졌다는 쾌감에 녹음기를 손 안에 넣고 꽉 쥐며 태준의 방 밖을 나왔다.

연우는 1층으로 갔다.

태준이 전화를 안 받자 불안한 마음에 1층의 큰 로비 양쪽으로 난 둥근 복도의 거의 끝과 끝까지를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아, 얘는 진짜 이 상황에 전화를 안 받으면 내가 또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잖아.”

태준에 대한 화가 또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중이어서 얼굴이 불그스레해졌다.

“와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갑자기 1층의 어딘가에서 호탕한 웃음소리들이 들렸다.

‘그 분들 웃음소리인 것 같은데 분명히.’

연우는 자신이 악수를 나눴던 어른들에게서 나오는 웃음소리임을 직감했다.

‘근데 우리 집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우리 집 뉴스 안 좋게 난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저렇게 크게 웃는단 말이야?’

너무 이상한 느낌에 그 웃음이 향하는 곳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문이 활짝 열려있고 불이 밝게 비추고 있는 큰 방이었다. 저들이 속닥대는 얘기는 무슨 얘긴지는 모르겠어도 뭔가를 계속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점점 크게 얘기하고 있었다. 연우는 조금 더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말이 연우의 귀에 들릴 정도로 커졌다.

“대선 100일 전에, 임원석과 임시우를 죽이자!”

그들은 그것을 입을 모아 구호를 외치듯 들뜬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연우의 아버지와 형과도 악수를 했을 그들이, 연우와 악수를 했던 그들이 바로 제 아버지와 형을 대선 100일 전에 죽이겠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고 한기를 느낀 그였다.

‘저 사람들이 다 적이었다고?’

그들은 이미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이기라도 한 듯이 환희에 찬 웃음 소리들을 냈다.

“임시우를 정치에 데뷔시키려고 할 때, 바로 그 날 싹 없애버리죠. 차로.”

“와하하하하!” 

‘차…!’

그는 저들의 악마 같은 웃음소리와 표정들을 보며 아버지에게서나 봤던 악마 같은 표정을 오버랩 시켰다.

‘내가 어떻게 할 필요도 없이 이미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구나.’

“작은아들은 손 안 봐도 돼요?”

“그 집 작은아들이 어디 작은아들이에요? 첩 자식이라고 아들 취급도 안 하고 키웠던데.”

‘첩… 첩 자식?’

난생처음 들어보는 자신의 출생에 관한 얘기를 거리감이 많이 느껴지는 이들에게서 일방적인 통보를 받듯 듣게 된 그였다.

“아직 그 아들은 자기가 서자인줄 모르는 것 같던데?”

“당연하죠. 집안 시끄러워진다고 제 어미는 제 아비가 진작에 죽여 버렸는데. 그런 사람이 굳이 알려줘 왔겠어요? 끝까지 몰라야 더 부려먹기 좋을 텐데. 집안도 안 시끄럽고 말이죠.”

‘당했구나.’

철저히 자신이 이용당하며 커온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후두둑 흘렸다.

‘조금이나마 예상을 해본 적은 있었지만….’

아무리 둘째라지만 둘째로서 받는 차별 이상으로 인간 대우도 안 해주는 것 같던 아버지의 모습도 종종 떠올랐다. 당장에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그였지만 저들이 내리는 결론을 듣고자 했다. 적의 서자는 저들이 어찌할 셈인 건 지에 대해서였다.

“아비와 형을 죽이고 나면 그냥 까죠. 너는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니었노라고. 그러고 나서 반응보고 죽이든 말든 해보죠. 어차피 둘째 아들의 힘은 미약할 거예요.”

그는 그쯤에서 빨리 자리를 떠야만 했다. 북받쳐오는 눈물에 의해 위치가 발각되면 큰일이었다. 그는 쫓겨나듯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자신을 이 집까지 태워왔던 차량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님, 잠시 내려주세요.”

기사를 내리게 한 그는 차량 안에서 이를 악물고 대성통곡을 했다. 언뜻언뜻 예상은 하면서 컸다. 그래도 이런 사실을 제3자들에게 갑작스럽게 듣게 되니 비참한 마음이 컸다.

“나만 바보같이….”

통곡을 하다가 지친 연우는 태준이 떠올랐다.

‘태준이가 있으면 나를 그래도 안아줄 텐데. 태준이한테는 다 터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너무 지친 바람에 뒷좌석에 그대로 누운 채 잠이 들어버렸다.

한편, 민혁이 돌아왔을 때는 집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만찬회를 서둘러 끝내고 모든 것들을 치워가는 분위기였다.

‘그래, 이제 쫑 내는 게 맞지.’

민혁은 자신이 해낸 일이 즉각적인 타격을 입혔다는 현실에 매우 만족했다. 담배를 물고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 방 앞에 서 있는 서연을 봤다.

“내 방이 어딘지도 아는 겁니까?”

“여기 메이드 분한테 물어봤어요. 이 집 첫째 아들이 어딜 급히 나갔는데 뭘 놔두고 가서 내가 그걸 가져다줘야 한다고. 첫째 아들이 방이 어디인지 가르쳐주긴 했는데 갑자기 까먹어버렸다고. 첫째 아들 방이 어딘지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뭘 저리 지리멸렬하게 설명을 해. 그냥 알면 안다고 하면 되지.’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블랙드레스에 회색 재킷을 어깨 밑으로 늘어뜨리고 있는 서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건 무슨 대놓고 유혹하는 시츄에이션이지?’

“왜요? 나랑 뭐 얘기하고 싶은 거 있어요?”

“위스키 한 잔만 같이 해요?”

서연은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자신의 회색 재킷에 짓이겨 불을 끄고는 블랙드레스 사이로 드러나는 깊은 가슴골 사이로 담배를 버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민혁의 방.

최대한 깔끔하고 단순한 인테리어가 민혁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흡사했다. 검은색의 침대틀, 회색의 철제 책상과 의자, 회색 철제로 되어있는 작은 몬드리안의 차가운 명화가 걸려있을 뿐이었지 나머지는 다 하얀색의 가구들과 하얀색의 천장, 벽지, 대리석 바닥이었다.

“춥다. 무슨 방이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추워요?”

“내 취향이에요. 술 마시러 왔으면 술만 마시고 할 얘기 빨리하고 가죠.”

민혁은 메이드에게 전화로 위스키를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 서연은 다리를 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였다.

“만찬회장, 어땠어요?”

“뉴스 터지고 나서부터 쑥대밭이었죠 뭐. 당신 중간에 나가던 거 나는 봤어요. 그 뒤로 쑥대밭이었어요.”

“아까 나 봤어요?”

“그거 연우도 보던데요.”

‘골치 아프게 됐네.’

그는 옆쪽의 허공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본다.

“후, 그래요?”

“걔가 와이프 많이 좋아해요.”

자신을 밀쳐내던 연우를 다시 떠올리는 그녀였다. 쓰라리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똑똑.

메이드가 위스키를 가져다줬다. 그는 얼린 유리잔에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랐다. 한잔은 그녀에게 먼저 주고, 다른 한잔을 만들어 자신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자 이제, 뭐가 궁금한 거예요?”

“오늘 보니까 그쪽 가족들을 포함해서 다들 그쪽이 한국에 아예 와 있는 걸 모르는 눈치던데, 그런 거 맞아요?”

“네, 맞아요.”

“혹시 그쪽 집에 대해서도 복수를 꿈꾸나?”

오른쪽 입꼬리만을 올리며 슬며시 웃는 그였다.

“그래서요? 그런 걸 왜 당신한테 알려줘야 하죠?”

“복수를 꿈꾸면 꿈꾼다고 말을 해줘요. 그래야 내가 그 복수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풉!”

실소를 터뜨렸다. 그런 표정의 민혁은 또 처음 보는 그녀였다.

‘잘생겼다….’

비웃어도 섹시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그가 자신을 비웃고 말고는 잠시 동안이라도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다.

“어떻게 도움을 줄 건데요?”

“복수하려는 마음이 있는 거 맞아요? 태성그룹에도?”

“맞다면?”

‘말장난 그만하고 빨리 진도를 빼란 말야.’

자꾸 간 보려는 그녀의 모습에 한순간 싫증이 나버린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째려보는 듯이 쳐다봤다. 그 모습마저도 잘생겨 보이지만 꽤 겁먹은 그녀는 얼른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녹음기기를 꺼냈다.

“이거… 도움이 될까요?”

녹음기기를 틀어줬다.

[한 시간마다 한 번씩 들어올 거야.]

[흐으응, 흐읍.]

[흐우에여?]

[퍽. 퍽.]

[너 이 새끼 임산부한테 뭐하는 짓이야?]

[형, 그게 아니라….]

상황이 모두 담겨있는 녹음기였다.

‘내가 가명으로 임연우랑 손을 잡아야하는 건가?’

이 증거물을 어떻게 이용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 중이던 그는 녹음 내용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걸 나한테 주는 이유는? 임연우 집안만 망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 당신은?”

“맞아요. 당신이 다시 태성그룹까지 손에 넣고 말고는 나랑 상관이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우리 오빠가 감금 생활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 오빠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진이나 영상만 좀 전해주세요.”

말이 끝으로 갈수록 희미해지며 눈물이 그렁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속으로 그 안타까운 심정을 공감했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던 눈을 거두고 이미 눈을 책상으로 향한 채 두 손을 차분히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는 그였다.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팔을 붙잡고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어지간하면 남의 슬픔에 같이 눈물을 흘려줘 본 기억이 없던 그의 눈시울도 금방 붉어져 왔다.

‘하, 인간 같지도 않은 대선 주자 하나 때문에 살려야 할 사람들이 많네.’

그녀가 자신의 방을 나가자마자 그는 쪽지 한 장과 펜 하나를 꺼내들고 짧은 글을 썼다.

[한서 호텔 35층 스위트 룸]

그는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쪽지를 주며 말했다.

“이거 임연우 쪽 운전기사한테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임연우한테 전달해달라고 하세요.”

그는 운전기사를 뒤따라가서 자신의 말을 잘 수행해주는지를 감시했다. 연우의 운전기사가 뒷좌석에 뻗어있는 연우를 깨우고 쪽지를 전해주는 장면까지 제 눈으로 다 보고 나서야 미션에 대한 완료감을 느꼈다.

‘가겠지. 태준이에게로.’

다음 날.

[누가 준 쪽지인가요?]

[이 집 큰아드님의 기사 분이 전해주셨습니다.]

신혼집으로 돌아와 술을 거하게 마시고 제대로 뻗었던 연우는 어제 쪽지를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누워있는 채로 눈을 살며시 뜨고 머리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태준이랑 바람을 핀 건 아닌가 보지?’

“후….”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걸터앉으려다가 머리가 어질거려 다시 드러누웠다. 혼자 아플 뿐 너무나도 조용한 이 신혼집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부터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거였구나. 내 편이라고 할 사람이 태준이 밖에 없는 건가.’

“이태준….”

살벌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세상이 원래 살벌한 것인 줄은 알았지만, 연우가 마주한 현실은 그보다도 더 냉혹한 것이었다. 생모를 생부가 죽인 것도 감당이 안 되는 사실이지만 그 모든 걸 남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가 힘든 사실이었다.

띠링.

[오늘 중으로 회사에 와봐.]

“후우.”

아버지의 메시지를 읽은 연우는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예당기업.

‘나의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와 마주한다.’

아버지에 대한 악한 감정이 저 가슴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그것을 드러내기에 좋은 타이밍까지는 숙성시켜두기로 했다.

똑똑.

예당기업 부사장실.

신혼집에서의 갈색 테마가 주를 이루던 연우의 방과 서재와는 달리, 딥블루가 테마인 듯한 예당기업의 부사장실이었다. 세련된 푸른 빛 철제 책상과 의자에, 남색의 폭신해 보이는 소파와 투명하지만 푸른 기가 도는 탁자가 있었다. 노란 기도 없이 하얗디하얀 조명들은 ‘연우’ 젊은 부사장의 신선함이 물씬 풍기게 했다.

예당기업의 부사장실에 먼저 들어와 있는 연우의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연우는 그 전날에 비하면 훨씬 핼쑥해진 몰골이었으나 연우의 아버지는 그런 것에 딱히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음, 마약 건은 아마 흐지부지될 거야. 내가 검찰이랑 법원 쪽에 손 써놨어. 지금이야 뭐 여론이 시끌시끌하다지만 검찰이랑 법원의 손발을 묶어놨으니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개돼지들은 무슨 처벌을 제대로 받는지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결국엔 다 잊어버릴 거야. 신경 쓰지 마.”

“네, 알겠습니다.”

“너는 이 예당기업만 잘 키워 가면 돼.”

“네,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강남 재개발하는 거, 태성 건설 쪽에 시공 허가 안 할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예? 태성 건설에 시공 허가를 주려고 애초에 저희 부부 결혼을 시키신 거 아니셨나요?”

“그런 소문이 잘 퍼져준 덕에 태성 건설 주가가 오르고 있지. 우리도 지분 많고 말이야. 그런데 우린 그냥 돈만 먹고 빠질 거야.”

아버지의 어이없는 무책임함에 저도 모르게 아버지를 노려봤다. 아버지는 그런 눈빛에도 연연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면 거기 시공은 누가 맡는 건가요?”

“아직은 몰라. 시공을 누가 맡을 지는. 우리는 그냥 태성건설 주식만 먹고 튀면 되는 거야.”

“그러면 저랑 태준이는요?”

“너네는 너네끼리 알아서 잘 지내봐. 태성 쪽은 어차피 사업하는 것도 많으니까 내가 대통령만 되고 나면 여차저차 구슬려가면서 잘 지낼 방법은 넘쳐나니까.”

‘태성 그룹이 바보가 아닌데… 아버지 뇌가 이상해졌나?’

태성 그룹이 강남 건과 같은 거대 사업을 그런 식으로 물리고도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이 됐다. 너무나 당연한 사고 과정인데도 그것을 인지 못 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가 그의 눈에도 정말 정신 이상자같이 보였다.

‘저렇게 뭐든 자기 뜻대로 어떻게든 다 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걸까.’

안 좋은 느낌이 꽤나 많이 들었지만, 우선은 대답하고 넘어가 보기로 했다.

“네.”

그의 아버지는 예당그룹 부사장실을 나갔고, 그는 혼자서 의자에 앉아 고민을 골똘히 했다. 어제 만찬회 장에서의 적들을 가만히 생각해봤다. 손가락 두어 개를 책상 위에 톡톡 치면서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심상찮았다.

‘그들도 태성건설 주식을 사들이고 있을 텐데. 그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그러는 걸까 모르고 그러는 걸까.’

따르릉.

“부사장님, 키메라 한국지사장 이선호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키메라 한국지사장?”

“네, 지금 들어가게 해드려도 될까요?”

경황이 너무 없던 연우는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잠시 두 눈을 여러 번 끔뻑이더니 계속 전화를 이어 갔다.

“만난다는 일정은 없었는데, 무슨 일로 오셨답니까?”

“인사도 드릴 겸 계약 건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일단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뚜벅뚜벅.

우리가 아는 이선호는 이민혁이겠지만, 그는 민혁이 고용한 재미교포 2세로 민혁의 ‘이선호’ 역할을 대신해 줄 인물이었다. 이왕이면 연기 실력이 좋은 배우로. 민혁이 ‘이선호’가 되기 전부터 면접까지 다 보고 고용해놓은 배우였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연우 님.”

“저도 반갑습니다. 선호 님. 안 그래도 키메라가 한국에 지사를 설립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이미 와 계시는 줄 알았으면 제가 먼저 가서 인사드리는 건데요.”

“아닙니다. 남의 땅에서 새롭게 사업을 일구는 건데, 요즘 핫한 이 예당 기업에 제가 먼저 인사드리러 오는 게 맞죠.”

처음 만나는 둘은 서로 악수를 나눴다. 선호에게 먼저 자리를 앉으라고 권하는 연우. 선호가 소파에 앉고 나서야 뒤따라 앉았다.

“아, 혹시 영어가 더 편하시지는 않는지요?”

“아닙니다. 애초에 한국과 한국어가 가장 익숙한 임원진이라서 여기에 지사장으로 왔는데요. 괜찮습니다. 한국어로 해도요.”

“아하, 그러십니까? 그러면 계속 한국어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예. 본론에 들어가죠.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예당 기업과 손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저희와요? 저희가 요즘에서야 인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키메라와 손을 잡고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요? 물론 이렇게 먼저 와주셔서 제안을 해주신 것은 너무 감사합니다만, 미처 예상해두던 협업은 아니어서 말입니다.”

“저희 키메라가 AI 첨단산업으로 요즘 아주 많이 각광 받고 있지만, 저희의 또 다른 주력 사업들 중에는 유전자 조작 식물과 인공 식품들을 만드는 사업도 있습니다. 연구 단계도 임상 시험 단계도 다 끝났고, 이제 곧 내놓을 작품들이 있습니다.”

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선호를 바라봤다. 고개를 좀 더 내밀고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해서 들었다.

“예당 기업에서 한국 전통 포도주를 만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포도주를 더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이유가, 그것들을 숙성시켜야 하는 시간 때문이잖아요. 저희는 이미 숙성 상태에 가까운 포도들을 개발해냈습니다. 그 포도들의 종류도 다양하게 만들어서 각국의 본래 품종에 알맞도록 맞춤 개량도 이미 다 해냈습니다.”

“원래 우리가 쓰던 포도의 품종들로 제공해주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당연합니다. 그리고 제가 예당 기업의 우유 떡을 먹어봤을 때 달달한 맛이 일품이던데, 혹시 그 우유도 특별하게 공수해오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유 떡 자체에 좀 다른 조미료를 넣는 것인가요?”

‘특별하게 공수하는 건 맞지.’

잠시 몸 파는 오메가들에게서도 짜내오던 그 우유 통들을 일꾼들이 차량에 실어오던 장면을 떠올렸다.

“네.”

“그러려면 젖소부터 특별한 방법으로 키우고 계신 겁니까?”

‘이 사람한테 그런 장면을 안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네.”

“아, 그러면 앞으로 그런 필요성도 전혀 없으실 겁니다. 아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오메가의 유즙이 식욕을 자극한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에 밝혀진 바 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오메가 유즙의 성분을 저희가 많이 연구해 본 결과, 그것에만 존재하는 ‘락티온’이라는 성분을 발견했습니다.”

“‘락티온’이라는 이름은 그쪽 연구팀에서 붙인 것이겠군요.”

“네, 맞습니다. 아직 이것을 학회에 정식 보고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다만 이것을 우유에 첨가하여 최대한 오메가의 유즙과 비슷하게는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예당기업의 우유 떡에도 넣는다면 지금과 다름없는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젖소를 특별하게 키우는 수고는 덜고 말입니다.”

‘그런 게 있다면 우리는 온갖 음식에 다 넣을 텐데.’

“그렇다면 다음에 한번 시음해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마셔보고 나서 결정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다음에 한 번 더 방문하도록 하죠. 아, 그리고 어제 태성그룹에서 만찬회를 했었다고 알고 있는데….”

“아, 키메라에 저희가 초대장을 보내드려야 했었는데, 한국에 상륙한다는 것을 기사로만 알고 있었지 이렇게 이미 와 계신 줄을 몰라서 미처 보내드리지를 못했습니다. 알고 있었다면 저희가 초대하고도 남을 기업이 키메라입니다. 본의 아니게 무례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왔다고 먼저 모든 곳에 알린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지요. 고의였다고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선호는 갑자기 정장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녹음기였다!

“저… 혹시 와이프 분은 괜찮으신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무슨 말이십니까?”

선호는 너무 갑작스럽게 말해 실례가 되었냐는 듯 살짝 낯을 붉히고 손사래를 치며 연우를 진정시켰다.

“제가 그곳에 간 것은 아니지만, 제 지인 분이 그 만찬회 장에서 이걸 주우셨다고 해서요. 제가 오늘 예당 기업에 간다고 하니까 부사장님의 와이프 분께서 뭔가 안 좋은 일을 겪으신 것 같아서….”

녹음기를 틀었다.

[너 이 새끼, 임산부한테 뭐하는 짓이야!]

[퍽-퍽-]

[형, 그게 아니라….]

‘이민혁, 이민준이다!’

상상치도 못한 태준의 강간 소식에 또 다른 쇼크를 먹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가져와 보기는 했습니다만….”

연우는 당장에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저는 모르고 있던 사실이네요. 저희 와이프가, 괜찮기는 한데…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오늘 아침까지 저희 와이프 상태를 잘 확인 못 하고 왔네요.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사장님.”

“그리고 어제 터진 이슈로 경황이 없으실 텐데,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조속히 해결될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악의적인 증거를 만들어내서 뭔가 오해가 많이 생기도록 한 것 같습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이런 난리에도 불구하고 저희와 손잡아 주겠다고 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호와 연우는 계약을 체결했고, 선호는 대표실을 나갔다. 혼자 부사장실에 남겨진 연우는 연이은 사건들로 골머리가 아픈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맸다.

‘뭔가 다 잘못되어가고 있어.’

터질 듯한 머리를 쥐어 싸고 고통스러워했다.

“적 밖에 없는 인생이네.”

회사에서의 자잘한 업무들이 끝나고, 큰일 당한 태준에게로 향했다.

띵똥.

한서호텔 35층.

“누구세요?”

“나야, 태준아. 남편!”

연우의 목소리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태준은 서서히 문을 열어줬다.

와락!

샤워가운을 입고 있는 태준을 보자마자 연우는 태준을 꼭 껴안았다.

“태준아, 괜찮아? 보고 싶었어.”

태준은 연우에 비해서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같이 안아주기는커녕 살포시 밀어내는 태준의 반응에 놀란 연우는 태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쳐다봤다.

“왜? 나 안 보고 싶었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험한 일 당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라? 알고 있네?’

“조금은 그래요. 물론 더 큰 잘못은 다른 사람이 했지만.”

태준의 앞에 무릎 꿇었다.

“내가 벌이랍시고 너무 심하게 널 대했어. 내가 용서할게. 내가 용서할게 태준아.”

태준은 놀란 마음에 그의 손을 잡아서 끌어올렸다.

“나도 바람 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어요. 화났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요. 그래도 내가 이런 일을 당하진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갑자기 눈물지으며 울먹이는 태준에게 놀라는 그였다. 황급하게 일어서서 태준의 눈물을 닦아줬다.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그 사람한테 내가 복수해줄게.”

“흐흡…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요?”

“응, 알아. 이민준.”

태준은 본격적으로 울면서 하소연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래도 어릴 때부터 괜찮게 잘 지내온 형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무슨 죄를 졌었나 봐요. 아주 이유가 없지는 않겠죠? 그런데 그 어떤 이유를 다 갖다 붙여도 동생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맞아, 그 사람이 악인인 거야. 내가 복수 해줄 거야, 태준아.”

“하… 아무리 배다른 형제라고 하더라도….”

‘배다른 형제….’

‘이복형제’라는 단어가 이제는 더 이상 남들의 상황만을 얘기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던 그는 또다시 자신만의 고통을 꿀꺽 삼켰다. 현재는 태준을 다독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도 미안해. 애초에 너는 그 만찬회에 안 오려고 했는데, 내가 끝까지 굳이 같이 가자고 해서 갔던 거였잖아. 그냥 네 직감대로 아예 안 갔더라면 이런 사단이 안 났을까 싶어서 너무 마음이 안 좋아. 미안해.”

태준은 그래도 봐주겠다는 듯 그를 이끌고 침대로 향했다. 그가 또다시 무릎을 꿇으려고 할까 싶어서였다. 침대 가에 나란히 걸터앉은 둘.

“아기는 괜찮아? 아기도 엄청 놀랐을 텐데. 사실 아기가 잘못되어서 네가 더 상심해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 많이 됐거든.”

아직 볼록한 태준의 배를 살포시 만져봤다.

“다행히도 아기는 괜찮대요.”

“정말 다행이다. 아기라도 괜찮아서….”

“아기도 안 놀란 건 아니에요. 확실히 얘도 많이 놀랬었어요. 다른 때보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걸 느끼긴 했어요. 하마터면 잃을 뻔 했나 봐요.”

아기에게도 미안한 마음에 차마 말을 잇지를 못하는 그였다. 태준은 서서히 줄어가던 눈물도 싹 닦고는 조곤조곤 설명했다.

“나도 앞으로 민혁이 형은 만나지도 않을 테니까, 앞으로 그런 무서운 식의 잠자리는 기대하지 말아 주세요. 정말 힘들어요. 애가 있어서 몸이 무겁기 때문에 내 몸이 내 몸 같지도 않아요. 그런 상태에서 눈 가리고 손도 못 움직이게 하고 말도 못 하게 하면 나는 혼자 있으면 혼자 자거나 혼자 배변활동도 못하는 수준의 장애인이 되어버리는 느낌이에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아기한테도 너무 미안해.”

“아기한테도 미안해 하는 게 맞아요. 그 진동기 때문에 내가 그 침대에서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애가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강간까지 당했으니 그 위험은 더 컸던 거고.”

“안 할게. 최소한 임신 동안이라도 내가 어떤 화나는 일들이 닥치더라도 너한테 그런 짓은 절대 안 할게. 너한테 더 죄짓고 살기 싫어.”

“믿어볼게요. 그리고 복수하는 건 마음대로 하세요.”

태준은 그가 태준의 몸을 지켜주진 못했어도 그만한 사랑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둘째 형이 원래부터 얄미웠던 것도 물론 있었지만, 그가 그에 알맞은 복수를 대신 해주기를 내심 원하고는 있었다.

“꼭 복수할게.”

할 말이 다 끝난 듯 그에게서 등 돌리고 토라져 침대에 누워버리는 태준이었다. 그것을 보는 그는 태준의 옆에 잠자코 가만히 누워 있었다.

‘너랑은 이렇게 항상 잘 풀어지는데, 이렇게라도 내 편인 듯이 잘 붙어 있어줘서 고마워.’

등 돌리고 있는 태준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어제부터 그렇게 생각나던 태준이었기에 또 태준을 안으면서 자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지금 머릿속에 존재하는 그 많은 일들을 잠시라도 잊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지만… 태준에게 마음을 안정하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 같아 차마 제 욕구만을 풀기에는 미안했다.

‘내가 지금 당장 너를 안으면 쓰레기 같이 느껴질까?’

어쩐지 태준은 당장 옆에 있지만 유독 태준의 품이 가장 그리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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