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9화
“…….”
은서는 서랍 안으로 손을 뻗지도 못한 채 가만히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짙은 감청색으로 된 정사각형 상자 안의 내용물이 무엇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귀걸이? 아니면 반지인가?’
은서는 망설이며 손톱 끝으로 상자 위를 톡톡 두들겼다.
‘열어보면 안 되겠지?’
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마음대로 열어볼 순 없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여성의 것이 확실해 보이는 상자가 제 것일 확률은 정확히 반반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크려나?
정혁이 이렇게 제 서랍 속에 넣어 놓고 보관할 정도라면, 어차피 상자의 주인은 저 아니면 영주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지? 봐? 말아?’
영주의 것이라면 제가 미리 확인한다 해도 정혁이 화를 내진 않을 터였다.
‘살짝 보기만 하자.’
결국 호기심이 양심을 이기고 말았다.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던 은서는 조심스레 상자로 손을 뻗었다.
“와.”
은서는 고급스러운 벨벳 쿠션 사이에 콕 박힌 반지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투명한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가드 링 두 개 사이로 정교하게 세공된 커다란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어 있었다.
보석은 잘 모르지만, 가격도 어마어마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지를 차마 빼보지는 못하고 뚜껑을 덮어 다시 넣어 놓을 때였다.
“?”
상자 한 면이 울퉁불퉁하길래 살짝 뒤집어 확인해 본 은서의 눈이 금방 촉촉해졌다.
상자 바닥에는 제 이름 차은서가 영어 필기체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
코끝이 매웠다.
정혁의 속내를 몰라 답답해하던 제가 한심해졌다.
왜 몰랐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정혁인데.
그러니까, 그의 행동은 전부 절 위한 거였다.
마음을 정해놓고도 밀어붙이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 또한.
‘대체 언제부터…….’
어떤 마음으로, 무슨 생각으로 준비해두었던 걸까.
상자를 내려놓고 서랍을 닫고서야 꾹꾹 누르고 있던 눈물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하정혁이 제일 잘하는 게 절 기다려주는 것과 품어주는 거라는 걸 잊은 건 저였다.
“바보 같아.”
그에게 비등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핑계로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정혁에게는 그런 걸 내세울 필요도 없었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인데.
제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또 한 번 깨닫게 된 은서는 사람이 너무 행복해도 펑펑 울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 낸 은서는 비장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정혁에게 제 진심을 전할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몇 마디 말보다 행동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었다.
*“눈이 왜 이래?”
퇴근하고 돌아온 정혁이 손가락으로 은서의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특유의 서늘한 표정에서 찌푸려진 한쪽 눈썹만이 그의 불편한 심기를 증명했다.
부기를 뺀다고 노력했는데도 역시나 정혁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슬픈 영화 봤어요.”
은서는 뻑뻑한 눈을 힘겹게 깜빡이며 하얀 거짓말을 했다.
당신이 내게 숨기고 있던 걸 보고 울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무슨 영화를 봤길래.”
못마땅하게 읊조리면서도 그는 안도한 듯 은서의 부은 눈가에 살짝 입을 맞춰주었다.
“저녁 차려놨는데, 바로 먹을래요? 씻고 먹을래요?”
“…….”
“왜요?”
대답 없이 가만히 쳐다보는 정혁에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거 하라고 너 이 집에 둔 거 아니야.”
“하, 어쩌다 한 번 하는 거 가지고 오버 좀 하지 말아요.”
은서가 못말린다는 듯 정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자꾸 손에 물 한 방울이라도 묻히면 큰일 나는 것처럼 굴어요, 사람 민망하게.”
은서가 정혁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움켜쥐며 종알거렸다.
함께 산 지도 1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는 여전히 집안일은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다.
도가 지나칠 정도로 금지하니 가끔은 제가 이 집의 손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냥 아주머니가 만들어 놓으신 거 차렸을 뿐이에요. 부끄러우니까 그만 해요.”
은서의 붉어진 귓가를 본 정혁이 픽 웃고는 은서의 어깨를 감아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데.”
“그냥, 오늘은 그림도 안 그리고 해서…….”
“예행 연습 삼아 해 본 건가.”
“…….”
어깨가 움찔하는 거 보니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정혁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현주와 도훈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난 후로 생각이 많아진 게 고스란히 보이던 터였다.
제 감정에 솔직해진 그녀는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기 그지없었다.
이쯤 되면 정혁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어른들의 압박 때문에 신경 쓰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정혁은 기억도 까마득해질 만큼 오래전에 준비해두었던 반지를 떠올렸다.
준비해두고도 결국 은서를 우선시해 묻어두었던 제 욕심.
어쩌면 그걸 꺼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입술을 미끄러뜨려 귓가로 가져간 정혁은 붉어진 귓가를 아스라이 핥아 올렸다.
다급히 재킷을 움켜쥐는 손길에 허리를 힘껏 감으니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친다.
“아…….”
밀려나다 등에 벽이 닿자 은서의 입술 사이로 옅은 탄식이 터졌다.
맞닿아 오는 단단한 몸에 부드러운 여체가 짓눌리다시피 했다.
“기껏 준비해줬는데 미안하지만…….”
옴짝달싹 못하게 갇힌 은서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지금 먹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
“허락은?”
대답 대신 목에 팔을 두르자 커다란 손이 곧장 머리칼 사이로 감기듯 엉켜 들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압박한 그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끄러지듯 밀고 들어왔다.
조급하지 않게, 음미하듯 샅샅이 핥고 지나가는 움직임에 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솟았다.
“아!”
여린 살결을 즈려무는 힘에 예리한 통각이 몸 아래를 관통했다.
힘이 풀린 은서를 안아 든 정혁이 장식장 위에 앉히고는 제 어깨를 짚게 했다.
“벌려.”
“으응.”
“얼른.”
부끄러움에 비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젓자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가느다란 다리가 커다란 손에 휘감겨 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아, 읏…….”
부드러운 머리칼이 다리를 쓸며 들어오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긴장한 몸에 곧 강렬한 쾌락이 쏟아졌다.
침대 협탁 안쪽에 숨겨둔, 그에게 건넬 선물은 아무래도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잠에서 깬 정혁이 품에 안겨 잠든 은서를 확인하고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런.’
결국 저녁은 먹지 못했다.
내내 괴롭힘을 당하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린 그녀였다. 옆을 지키다 어느 틈에 같이 잠이 들고 말았다.
“…….”
마른세수를 한 정혁은 은서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려다 말고 손을 멈췄다.
정혁은 은서에게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제 손을 보는 정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낯선 반지가 정확히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하.”
엄지 손끝으로 반지를 문질러 본 정혁이 헛숨을 터트리곤 은서를 내려다봤다.
제 팔을 붙잡고 자는 은서의 손에도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분명 잠들기 전에만 해도 없던 거였다.
“차은서.”
고개를 내린 정혁이 은서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드러난 하얀 볼에 입을 맞췄다.
이런 깜찍한 짓을 벌여놓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그러니까, 이게 네 진심인가.
“으음.”
정혁은 웅얼대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을 망설임없이 삼켰다.
정혁은 지금 느낀 이 감정을 평생 잊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그건 왜 아직도 끼고 있어?”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오늘의 주인공은 은서의 반지에 더 관심을 보였다.
“커플링 하자마자 청혼받을 줄은 몰랐지. 아쉬워서 그냥 끼고 다니는 중이야.”
은서가 양손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왼손에는 정혁에게 받은 청혼 반지가, 오른손에는 제가 준비했던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
“하여간, 유난이야 유난. 둘 다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서는.”
눈을 가늘게 뜬 현주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현주가 사실 순정파라는 것보다는 덜 놀랍지 않을까?”
“어머, 재수 없어. 차은서 되게 심심한 캐릭터인 줄 알았더니, 전부 내숭이었잖아?”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는 현주에 은서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보고 그렇게 빨리하냐면서 놀라더니, 뭐? 3주 후? 흥.”
“미안, 반성하고 있어. 역시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건데 말이야.”
“신혼여행 다녀와서 후기 제대로 들을 거야.”
혀를 쏙 빼무는 은서를 보며 현주가 눈에 힘을 줬다.
“그래, 결혼 축하해 현주야. 너 지금 되게 행복해 보여.”
“당연하지. 이따 부케 잘 받아라, 예비 신부?”
현주가 손에 든 부케를 가리키며 신신당부했다.
*“무슨 생각해?”
차가 잠시 멈춘 사이 은서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낀 정혁이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그냥, 즐거운 결혼식이었다 싶어서요. 예쁘기도 했고.”
은서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부케를 만지작거리다 미소 지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 아쉬운데, 우리 좀 걸을까요?”
“그래.”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 차를 세우니 서울 도심의 고궁 근처였다.
적당히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정혁과 나란히 걷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생각해 보니 그와 이렇게 걸어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앞으로는 자주 나와야겠어요.”
은서가 옆으로 죽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완연한 봄이었다.
“자기야, 여기 커플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데 아냐?”
“아, 그랬나?”
옆을 지나가는 커플이 나누는 대화에 은서가 동그란 눈으로 정혁을 올려다봤다.
“방금 들었어요? 헤어진다는데요?”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는데.”
정혁이 은서의 약지에 있는 반지를 느른하게 문질렀다.
“도망가기엔 너무 늦었지, 차은서.”
“어차피 도망갈 생각도 없다니까…….”
걸음을 멈춘 은서가 몸을 돌려 정혁의 앞을 막아섰다.
“끼워놓으니까 더 예쁘죠?”
정혁의 눈앞에 제 손을 펼쳐 보인 은서가 뿌듯하게 웃었다.
“하, 울렸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한숨을 흘린 정혁이 은서의 볼을 톡 두드렸다.
물론 청혼하던 순간,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히 웃으며 제게 안기던 모습을 가슴에 새겨놓긴 했다.
“미안해요, 반지를 봐 버려……!”
속삭이던 입술을 가볍게 훔치자 주변 시선을 의식한 은서가 정혁의 가슴팍을 톡 내려쳤다.
“다들 쳐다보잖아요…….”
“몰래 본 벌이야.”
“……심술.”
아무래도 프러포즈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게 은근히 불만인 모양이었다.
정혁을 뾰로통하게 보던 은서가 갑자기 정혁에게 폭 안겼다.
“그냥 하정혁 씨가 이렇게 안아만 줘도.”
“…….”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거든요?”
쿡 웃음을 흘린 정혁이 은서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빗어 내렸다.
차은서는 확실히 제 기분을 좋게 만드는 법을 잘 아는 게 분명했다.
“차은서.”
“응.”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줄게.”
“응.”
은서가 빙긋 웃으며 정혁의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약속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제게 했던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까.
분명, 그와 함께 할 미래는 행복으로 차고 넘치겠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시간으로 가득 찰 미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몽글거리는.
“봐요, 안아주기만 해도 울 거라고 했잖아요.”
톡 떨어지는 눈물에 은서가 부스스 웃었다.
“그 눈물은 기쁘게 받도록 하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저를 보게 한 정혁이 가만히 입을 맞췄다.
나의 새로운 세상.
그녀를 품에 안고 울리는 것도, 웃는 걸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이제는 오롯이 제게 주어진 몫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