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81화 (81/82)

에필로그 8화

“뭐? 결혼?”

하마터면 입안에 든 커피를 뿜을 뻔했다.

“그래, 결혼.”

쐐기를 박는 현주의 말에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은서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은서는 지금 제가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야, 축하 안 해 줄 거야?”

현주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비죽이자 은서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축하해줘야 한단 사실도 잊고 있었다.

“축하해, 당연히 축하하지.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라서 그랬어.”

“그렇지?”

술자리의 일이 고작 한 달 전이었다. 그랬는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결혼이라니.

“그간 나 마음고생 시키며 질질 끈 시간이 얼마인데. 그냥 바로 날 잡기로 했지, 서로 봐 온 시간이 짧은 것도 아니고.”

“부모님은?”

“이현우 그 인간…… 아니, 우리 소중한 사촌 오라버니께서 그동안 우리 부모님께 밑밥을 많이 깔아놨더라고?”

“정말? 허락하신 거야?”

“어, 바로 한 방에.”

현주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축하해, 정말 잘 됐다.”

은서의 눈동자가 덩달아 반짝였다. 행복한 미소를 짓는 현주가 제 눈에도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다.

“차은서.”

“응?”

“너도 좀 보고 배워.”

“뭘?”

“갖고 싶으면 이렇게라도 갖는 거야. 안 그래?”

질투 작전 모르니? 다 계산된 행동이었다고.

봐, 그 뻣뻣하던 강도훈인데 바로 눈 뒤집히잖아.

무용담처럼 흘러나오는 현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은서는 말없이 아이스 커피만 호로록 들이켰다.

*

[결혼.]

“!”

그림을 그리다가 무의식 중에 캔버스에 단어를 써버린 은서는 화들짝 놀라 붓을 떨어트렸다.

급히 아무 붓이나 들어 글자 위에 색을 덧입히고 나니 괜히 심장이 벌렁거렸다.

‘결혼, 결혼이라.’

일부러 저만치 멀리 미뤄두었던 고민인데, 현주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나니 그 두 글자가 머릿속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아무래도 이제는 진지하게 고민을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중훈이 맞선을 강요할 때만 해도 결혼이란 또 한 명의 감시자가 들러붙는 절차라고만 여겼는데. 지금은 그 단어에서 그려지는 그림이 많이 달랐다.

그래서 더 막막했다.

제가 봐 온 부부의 관계란 중훈과 수영의 사이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알고 보니 허상에 불과했고.

정혁과 제가 결혼을 해 부부가 된다는 게 선뜻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같이 살고 있긴 하니까.’

윤수와 영주가 제게 대놓고 언급한 적은 없긴 하지만,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건 수일에게도 들어 알고 있었다.

수일 또한 여러모로 걱정을 내비쳤으니까.

정혁이야 보나 마나 저를 위해 어른들의 말도 깔끔히 무시하고 있을 테고, 그러니 제가 더 태도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에 빠져 멍하니 캔버스를 보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혁이 퇴근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캔버스 위에 글자가 확실히 없어졌는지 한 번 더 확인한 은서는 서둘러 앞치마를 벗었다.

“왔어요?”

“또 그림 그렸어?”

“응.”

자연스레 앞으로 다가온 그에게 발돋움해 입을 맞췄다.

늘상 하는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면 정혁은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제 얼굴에 묻은 물감을 엄지로 슥 문질러 보곤 했다.

이다음에 벌어지는 일들도 항상 똑같았다.

함께 샤워하고 밥을 먹고,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대화로 나눈다. 정혁의 일이 덜 끝났을 때는 서재에서 일하는 정혁의 곁에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함께 침대에 누워 잠이 드는 일상.

결혼해도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침대에 누워서도 멍한 은서를 본 정혁이 결국 은서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 두들기며 물었다.

“있잖아요.”

몸을 굴려 엎드린 은서가 베개를 끌어안으며 정혁을 올려다봤다.

헤드에 기대어 앉은 그가 말하라는 듯 동그란 눈동자를 직시했다.

“만약 우리가 결혼하면, 지금과 뭐가 달라질 것 같아요?”

“왜, 이현주가 결혼한다고 하니까 신경 쓰여?”

“아이, 그냥 대답해주면 안 돼요?”

“…….”

대답 없이 침실의 불을 끈 정혁이 그대로 은서의 몸을 눕혀 그 위를 덮치듯이 점령했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네 법적인 보호자가 된다는 것 외에는.”

“…….”

부드러운 입술이 닿으며 뜨거운 숨이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키스하는 것도.”

커다란 손이 잠옷 안을 파고들었다.

“잠깐만…….”

안 되는데, 지금은 대화를 해야 하는데.

“안는 것도.”

“아……!”

“지금과 똑같겠지.”

쉽게 몸의 반응을 이끌어 낸 정혁때문에 곧 머릿속이 점멸됐다.

*

“졸업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후배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지는 은서의 앞에 수일이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며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졸업이구나.”

“그러게요.”

환하게 웃는 수일을 마주 보며 은서도 활짝 웃었다.

“정혁 군은?”

“회사 일해야 하니까 오지 말라고는 했는데…….”

“곧 오겠구나.”

“그렇겠죠?”

어차피 제 말을 들을 그가 아니었다.

그는 차은서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하루가 될 오늘 같은 날, 저를 혼자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기 오는구나.”

마침 멀리서부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걸어오는 정혁이 보였다.

늘 느끼는 거지만 그를 위해서 만들어졌나 싶을 정도로 수트가 그린 듯 잘 어울렸다.

“저런. 학교 여학생들이 다 몰려들겠구나.”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호들갑 떠는 학생들을 본 수일이 껄껄 웃었다.

잘나도 너무 잘난 제 연인을 보며 은서는 좋아해야 하는지 잠시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

“은서야, 졸업 축하한다.”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구나.”

“감사합니다. 와주실 줄 몰랐어요.”

정혁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윤수와 영주에 은서가 송구스러워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와 봐야지, 우리 은서 졸업인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대답에 은서는 꽃다발을 들어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가뜩이나 졸업식 자체에 마음이 울렁이는데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이 더해지니 어쩐지 눈물이 울컥 나오려 했다.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행복을 만끽하는 이 기분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나도 우리 은서랑 사진 한 장 남겨보자.”

“어머, 그럴까요?”

“네가 좀 찍어 봐라.”

윤수가 정혁에게 퉁명스레 지시를 내릴 때였다.

“아이고, 황 회장.”

“아, 김 교수?”

지나가던 누군가 윤수를 보며 아는 체 해왔다.

“저이 대학 동창이야.”

반갑게 악수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영주가 대신 설명을 덧붙였다.

“자네가 여기는 웬일인가?”

“졸업식 때문에 왔지.”

“졸업식?”

김 교수가 의아해하며 윤수 뒤의 일행을 살폈다.

“아이고, 윤 교수님도 있었군요.”

“안녕하십니까.”

수일과도 인사를 나눈 그가 정혁과 은서를 차례로 본 뒤 다시 윤수를 바라봤다.

대관절 누구의 졸업식이기에 기업 총수인 그가 여기까지 행차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대답을 하려 은서를 돌아본 윤수가 정혁을 보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예비 며느리라고 튀어나오려던 말이 정혁을 보자 쏙 들어가 버린 탓이었다.

그 상황을 지켜본 은서는 정혁과 결혼을 하면 가장 달라지는 게 뭔지 깨닫고 말았다.

정혁은 달라지는 게 없을 거라 단언했지만 그가 간과한 게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저를 가족처럼 생각한다 한들, 제가 그들을 가족처럼 여긴다 한들.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은 그저 인연이 얽힌 ‘남’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혁과 제가 결혼을 하면 ‘진짜’ 가족이 되는 거였다.

그저 말뿐이 아닌 진짜 가족.

“이래저래 중요한 날이라 와 봤네. 그럼 다음 모임 때 또 보세.”

“그러세.”

동창의 호기심을 적당히 정리하고 돌려보낸 윤수가 은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은서야, 우리 맛있는 밥 먹으러 갈까?”

“학교 근처는 오늘 다 차 있을 겁니다. 조금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괜찮은 데가 있으니 제가 안내하지요.”

“그럼 가실까요, 교수님.”

수일의 안내에 윤수가 함께 앞장서자 영주가 은서의 곁에 서며 은서의 손을 꾹 잡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은서야.”

“……감사합니다.”

결국 코끝이 찡해지면서 꽉 막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주가 정혁을 한번 보고는 마치 그에게 뒷일을 맡기겠다는 듯 남편의 곁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일행을 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울 건가.”

“아뇨. 근데 좀 눈물이 나올 것 같기는 해요.”

솔직하게 대답하니 픽 웃음을 흘린 정혁이 망설임 없이 은서를 품에 당겨 안았다. 덕분에 안고 있던 꽃다발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은서는 개의치 않고 가벼워진 손으로 정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지만, 은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정혁의 온기를 만끽했다.

그의 품이기에 느낄 수 있는 안온함이었다.

“고마워요.”

“뭐가?”

머리 위에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에 은서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냥, 전부 다요.”

정혁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입을 맞추자 주변에서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안고 있던 손을 푼 은서가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른들 기다리시겠다, 우리도 얼른 가요.”

이 순간, 은서는 제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걸 느꼈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어렵게 손에 넣은 이 행복을, 사랑을 눈치만 보다가 놓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

“자,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해볼까.”

정혁의 서재에 들어와 책상에 앉은 은서는 노트북 전원을 누른 뒤 빈 종이를 꺼냈다.

“취업은, 해결됐고.”

다행히 이곳저곳에서 협업 요청이 들어오고 있는 탓에 당분간은 바쁠 예정이었다.

“음…… 결혼 자금이 필요하겠지?”

중요한 부분을 종이에 하나씩 적어가던 은서가 펜 끝을 종이 위에 톡톡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정혁뿐만이 아니라 윤수나 영주까지도, 분명히 제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 떳떳해지고 싶었다.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으니, 부족할지언정 조금이라도 제힘으로 준비해서 정혁과 마주 보고 싶었으니까.

“흠.”

지금껏 건드리지 않고 보관해 온 자금이 있기는 했다. 수영이 어릴 때부터 중훈 몰래 만들어 준 비상금.

“……그걸 쓸까?”

고민에 빠진 은서가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은서는 펜 끝으로 입술을 누르며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책상 첫 번째 서랍이 살짝 열려 있길래 손을 뻗어 닫으려던 때였다.

“?”

무언가 발견한 은서는 망설이다 서랍을 열었다.

“……음?”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자그마한 상자를 발견한 은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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