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80화 (80/82)

에필로그 7화

뱉어놓고도 은서는 정혁의 눈을 슬쩍 봤을 뿐 곧장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생각해 보면 그와 결혼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러니 안 그래도 속내를 잘 표현하지 않는 정혁의 생각이 어떨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그가 결혼 계획이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겠고. 혹시 결혼하자는 말이 저를 책임지라는 말처럼 들리면 어쩌지.

“…….”

정혁은 어쩔 줄 몰라하는 은서를 내려다보며 착잡해졌다. 이래서 그녀를 윤수의 집에 보내는 게 싫었다.

가뜩이나 자신의 상황 때문에 눈치를 보는 차은서가 윤수나 영주가 하는 말에 쉽게 휘둘리고 마니까. 볼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니 차은서가 압박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영 안 도와주시는군.’

설명한다 한들, 윤수 부부가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은서를 지켜보고 있는 건지 이해할 리 만무했다.

“차은서.”

머리 위로 정혁의 한숨이 폭 떨어진 탓에 은서의 몸이 움찔 떨렸다.

“넌 너무 생각이 많아. 어른들이 그냥 하는 말이니 마음에 담아 둘 필요 없어.”

“아니, 나는…….”

“네가 지금 내 곁에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정혁이 몸을 한층 더 기울인 탓에 조수석에 있는 은서를 전부 덮을 것처럼 다가왔다.

정혁은 은서의 턱을 쥐어 저를 마주 보게 했다.

“나한테만 더 집중해 보는 게 어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아니, 그러니까 나는 쓸데없는 생각이 아닌…….

“읏.”

따지려던 은서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정혁이 입을 막듯 키스를 해왔기 때문에.

*

“은서 씨, 오랜만이네요.”

“네.”

도훈이 비서실 앞에 나타난 은서를 보며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정혁이 만나러 왔어요?”

“아뇨.”

“?”

“오늘 저랑 밥 먹기로 했어요.”

도훈의 뒤에 나타난 순영이 웃으며 답을 대신했다.

“둘이서만? 나도 끼워주면 안 돼?”

“그건 곤란합니다, 실장님. 은서 씨와 오붓하게 먹고 싶거든요.”

“흥. 이렇게 소외시킨다 이거지? 그나저나, 은서 씨. 정혁이 안에 있는데?”

“아, 괜찮아요.”

은서가 싱긋 웃으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럼 저희 먼저 나갑니다. 은서야, 가자.”

“어, 그래, 맛있게 먹어요.”

얼결에 두 사람을 배웅한 도훈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은서 씨 왔는데?”

“알아.”

아무리 작은 소리여도 정혁이 은서의 목소리를 놓쳤을 리 없었다.

“근데 왜 너도 안 보고 가? 여기까지 와 놓고.”

도훈의 말에 정혁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양 비서님이랑 점심 먹을 거예요.”

“양 비서가 애 보느라 고생이 많네. 업무 시간으로 쳐줘야 하나.”

“뭐라고요?”

애 취급하지 않기로 했던 약속을 어긴 탓에 아침부터 뾰로통해져서 나가버린 그녀였다.

놀리는 족족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니 자꾸만 툭툭 건드리게 됐다. 이 나이 먹어 이런 장난을 치는 제가 조금 우습긴 했지만.

모르겠다. 차은서 곁에 있다 보면 저도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끔 헷갈리곤 했으니까.

정혁은 문자 한 통 오지 않은 휴대폰을 힐긋 바라봤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네.”

이번엔 또 뭐가 불만이실까.

정혁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요즘의 차은서는 마음속에 쌓아두는 대신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는 때가 더 많았다.

그리고 정혁은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은서가 내보이는 다채로운 감정은, 그녀가 제 곁에서도 편안하다는 증거였으므로.

*

“결혼을 어떻게 했냐고?”

밥을 먹다 말고 멈춘 순영이 눈을 끔뻑였다.

“네, 결혼이요. 내 주변에 유부녀라고는 언니밖에 없거든요.”

“어떻게 하기는, 그냥 연애하다 때 되니까 한 거지.”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예요?”

“왜. 대표님하고 결혼하니?”

“아뇨, 그건 아닌데…….”

“아직 결혼 생각도 없으면서 대표님이 밀어붙인다고 홀라당 넘어가면 안 된다?”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그 반대라서 고민인걸요.

은서는 일단 진지하게 순영의 조언을 경청했다.

“결혼은 남자가 밀어붙이는 순간 일사천리야. 나도 이 남자랑 결혼은 하려나 싶었는데, 남자가 마음먹으니까 순식간에 진행되는 거 있지?”

“…….”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까 손잡고 식장에 서 있더라니까?”

“그럼, 여자가 밀어붙이면요?”

은서가 희망을 품으며 되물었다.

“글쎄, 그런 경우도 있긴 한데. 남자란 동물이 좀 자기가 확신이 생겨야 하는 것 같더라.”

“……그렇구나.”

“얘, 너무 부담 갖지 마. 대표님도 따지고 보면 어린 나이니까 그렇게 결혼 급하지 않을 텐데 뭐.”

“부담을 갖는 건 아니지만…….”

은서는 말끝을 흐렸다.

윤수의 집에 다녀온 이후, 정혁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그가 교묘하게 대화를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저를 배려해서 그러는 거라 여겼는데, 어쩌면 오히려 그가 아직 결혼 생각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서운해지는 기분은 은서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

“너 진짜 정혁 오빠네 회사에 원서 넣었어?”

현주가 원형 테이블의 대각선 방향에 앉은 지석을 보며 물었다.

“어, 서류도 통과했는데? 투자 회사에서 제일 큰 규모라 안 넣을 수가 없어.”

“정혁 오빠는 알아?”

“아직 모르시지 않을까.”

“넌 속도 좋다.”

지석과 은서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도 전부 알게 된 현주가 혀를 내둘렀다.

“언제적 이야기인데. 안 그래?”

지석이 씩 웃으며 은서에게 동의를 구하자 은서는 짐짓 미소만 지어 보였다.

지석이 정혁에게 가졌던 적개심은 이미 존경심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외동인 지석에게 어른 남자인 정혁이 주는 위압감이 꽤 긍정적으로 먹힌 모양이었다.

“정혁 오빠도 대단해. 너희 둘이 만나도록 둔다는 게.”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 모두 그 이유를 알았다.

민정의 배신으로 상처받았을 은서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지석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혁은 은서의 곁에 지석을 남겨 두었을 터였다.

“김민정 걔, 정말 너한테도 연락 안 했어?”

“어.”

지석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뻔뻔하지 않고서야.”

현주가 고개를 주억거렸고 은서는 조용히 잔을 비웠다.

제가 살던 집을 내줬으니 그곳에서 계속 지낼 거라 생각했는데 민정은 경미를 데리고 사라졌다. 아마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지도 몰랐다.

집 명의는 어차피 중훈의 것으로 되어 있으니 팔기도 어려웠을 테고. 경미가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았다고 해서 중훈의 재산을 멋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경미가 다른 남자를 찾지 않는 한 민정은 제 엄마를 스스로 부양해야 할 처지였다.

“민정이도 선택해야겠지. 나처럼 다 벗어나서 본인 인생을 살든가, 아니면 평생 엄마 그늘에서 휘둘리며 살든가.”

“넌 걔 괘씸하지도 않아?”

덤덤한 은서의 말투에 현주가 눈을 찌푸렸다.

“배신감도 크긴 했지만, 친구로 착각했던 그 시간 속에 분명히 그 애 덕분에 고마웠던 시간도 있었으니까.”

“흥. 잘났다, 그래.”

“그나저나, 이제 진짜 졸업이다.”

현주가 이해할 수 없다며 인상을 찌푸리자 지석이 웃으며 곧장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러게. 정말 졸업이다.”

지석이야 제 나이에 맞게 하는 졸업이라지만 은서에겐 졸업까지 오는 길이 험하고 다사다난했으니 감회가 더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은서 넌 졸업하면 바로 결혼할 거지?”

“그러네. 그 오빠는 네 졸업만 기다리고 있겠네.”

“음? 아닌데?”

은서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

“결혼 안 해?”

은서보다도 지석과 현주가 더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런 이야기 안 나눠 봤는데.”

“의외다? 너 졸업과 동시에 바로 낚아채 갈 줄 알았는데.”

“나도.”

“음…….”

모두가 결혼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오로지 당사자 두 사람만 제외하고.

“왜? 넌 싫어?”

왜 다들 제가 거부하는 거라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은서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하는데?”

하정혁의 속내를 모르겠어.

난감해진 은서가 취조하듯 묻는 현주와 궁금해하는 지석을 번갈아 보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정혁이었다.

“네.”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은서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아직 애들이랑 있어요.”

은서가 답을 하자마자 현주가 은서의 팔을 쿡 찔렀다.

‘도훈 오빠는? 같이 있대?’

“회사에요?”

-아니, 지금 막 나왔어.

“실장님이랑?”

-응.

현주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니 현주가 여기로 부르라며 손짓 발짓을 해왔다.

“……여기로 올래요?”

-혼자 오라는 건 아닐 테고.

“맞아요. 안 될까요?”

-누구 명령인데.

또 담백한 말투로 놀리는 정혁에 은서는 샐쭉해지면서도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결혼은 어찌 될지 모른다 해도, 지금은 이런 시간 하나하나가 즐겁고 소중하기만 했다.

“은서 씨 부탁이라지만, 이렇게 나를 꼭 데려가야 해?”

차에서 내려 바로 올라가는 길, 도훈이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던 정혁이 천천히 손을 빼내며 도훈을 돌아봤다.

“난 분명히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걸로 기억하는데.”

은서와 통화를 마친 뒤 도훈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따라나선 건 그였고.

“…….”

크흠, 헛기침한 도훈이 시선을 회피했다. 멋쩍어진 그가 문을 열어 은서 일행을 찾을 때였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대며 웃는 현주가 먼저 보였다.

“아.”

정혁을 먼저 앞세우고 뒤따라 걷던 도훈은 테이블에 다가갈수록 미간이 좁아졌다. 유독 지석과 가까이에 붙어 있는 현주가 묘하게 거슬렸다.

그리고 현주가 지석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도훈의 손도 같이 뻗어나갔다.

“!”

현주의 손목을 무심코 잡아버린 도훈도, 손목이 잡혀버린 현주도.

그 모습을 동시에 지켜보는 은서와 지석도, 전부가 바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우린 그만 가지.”

픽 조소한 정혁만이 은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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