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79화 (79/82)

에필로그 6화

“기말고사는 잘 봤니?”

“네. 작년에 들었던 과목들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밥은 잘 챙겨 먹는 거냐.”

“그럼요. 아시잖아요, 굶으면 저 정혁 씨한테 혼나요.”

은서가 짐짓 무섭다는 표정을 하자 윤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덮쳐들려는 정혁을 겨우 회사에 보내 놓고 윤수의 본가로 놀러 온 참이었다.

“은서야, 갈 때 이거 가져가.”

수일의 아내인 영주가 보자기에 싸인 네모난 물건을 들고나왔다.

“이게 뭐예요?”

“너 먹이려고 지어왔어. 몸도 따뜻하게 해주고 여자한테 좋대. 겨울 대비할 겸.”

“와, 감사합니다.”

환히 웃는 은서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윤수가 맞은 편의 수일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교수님, 지난번에 저와 한 약속 잊지 않으셨지요?”

“물론입니다.”

“기대되는군요. 또 겨울 낚시가 참맛 아니겠습니까.”

은서를 사이에 두다 보니 자연스레 안면을 튼 수일과 윤수는 요즘 둘도 없는 절친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혁이 없어도 은서는 종종 윤수와 영주를 만나러 왔고, 가끔은 오늘처럼 수일도 함께였다.

“참, 오늘 저녁 먹고 갈 거지?”

“그래도 돼요?”

“그럼. 은서 먹이려고 맛있는 거 많이 해뒀는데.”

“그럼 정혁 씨도 오라고 할까요?”

“걔는 왜 불러. 오면 눈을 이렇게 가로로 길게 해가지고 뚱하니 앉아있기만 할 텐데.”

윤수가 정혁 특유의 서늘한 표정을 흉내 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보, 그러지 말아요. 은서야, 연락해 볼래?”

영주가 은서의 눈치를 힐긋 살피면서 윤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네, 일 끝나면 여기로 오라고 할게요.”

은서가 웃음을 꾹 삼키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애는 왜 자꾸 불러들이십니까.”

“저 봐. 내가 뭐랬어? 쟤 부르지 말자고 했잖아.”

다 함께 앉은 식사 자리에서 윤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정혁이 네가 좀 양보하렴. 은서가 자꾸 보고 싶은 걸 어쩌겠니.”

영주가 호호 웃으며 말하자 정혁이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내가 좋아서 오는 건데요.”

은서가 그러지 말라는 듯 정혁의 팔을 슬쩍 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에 정혁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정은 많아서. 윤수나 영주의 청에 거절 못 하고 조르르 달려왔을 차은서가 훤히 그려졌다.

“진짜예요.”

“알았으니까 먹기나 해.”

은서가 더이상 아무 말 말라는 듯 눈에 힘을 주자 정혁이 눈의 힘을 풀었다.

“저 놈 저거, 은서한테 꼼짝 못하는 거 보니까 우스워 죽겠네.”

윤수가 그런 정혁을 보며 놀리듯 빈정댔다.

“성질머리 부리다가 제 남편 앞에서만 순한 양처럼 굴던 제 엄마랑 꼭 빼닮았어. 안 그래, 여보?”

윤수의 말에 영주는 대놓고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웃음을 참지도 못했다.

“여보, 너무 그러지 말아요.”

“어쨌든 은서야, 네 덕분에 저놈 얼굴도 이렇게 다 본다. 안 그랬으면 1년이 가도 한 번 볼까 말까 한 녀석이었는데.”

“…….”

은서의 비난 섞인 시선이 닿자 정혁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이렇게 북적이는 식사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요즘 은서 때문에 즐거워 죽겠다니까요?”

“정말요?”

은서가 반색하자 영주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말이고 말고. 나는 우리 은서 며느리 삼고 싶어.”

“…….”

영주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말에 뭐라 반응하지 못한 은서의 입가가 순간 움찔했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은서는 이내 그린 듯 예쁜 미소를 지었지만, 정혁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어머, 내가 너무 주책이었나?”

영주가 정혁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가렸다.

“어쨌든 둘이 결혼할 거니까 그게 그거지 뭐, 안 그러니 은서야? 정혁이한테 시집올 거지?”

윤수까지 가세하며 은서를 몰아붙이자 정혁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직 졸업도 안 했습니다.”

“졸업하면…….”

“삼촌.”

“…….”

미성년자 때 이후로 정혁의 입에서 나온 적 없는 호칭이었다. 서릿발 같은 정혁의 냉기에 윤수가 콧방귀를 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은서만이 어쩔 줄 모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

“너 대체 어쩔 생각이냐.”

수일을 보내고 가족끼리 남은 자리. 정혁을 서재로 끌고 간 윤수가 다짜고짜 제 조카를 다그쳤다.

“무슨 말씀이세요.”

“은서 말하는 거다. 난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지금처럼 계속 같이 살 거면 결혼을 하든가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기는!”

소리치려던 윤수가 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혹 밖에 있을 은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당장 날 잡을 거 아니면 은서 내보내.”

“내보낼 생각 없습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싫다! 고집부릴 걸 부려.”

“…….”

“그래, 나이 먹은 노친네라 젊은 너희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한 발 물러선 윤수가 말투를 누그러트렸다.

“아무리 은서를 혼자 살게 하는 게 걱정스러워도, 사내 녀석인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결혼도 전인데 동거라니. 너는 그렇다 쳐도 여자인 은서에게는 흠이 될 수도 있어. 전에는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 쳐도 이제는 그럼 안 되는 거다.”

정혁이 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기울였다.

“차은서가 나가겠다고 하지 않는 한, 계속 곁에 둘 생각입니다.”

“!”

“결혼도 안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어려요. 하고 싶은 것들 충분히 다 해보고 누리게 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괜히 제 욕심에 그 애가 후회할 일 만들지 않을 겁니다.”

“…….”

“그렇다고 놓아 줄 생각도 없으니, 지금처럼 곁에 두는 게 제 욕심 채우면서 양보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

“어떤 형태든, 저희의 몫이니 내버려 두세요. 말씀 다 끝나셨으면 일어나겠습니다.”

정혁이 정중하게 말을 끝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휴, 저 고집불통.”

윤수가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저렇게 오래 걸려?”

서재 쪽을 힐끔 본 영주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가뜩이나 얼굴 보기도 힘든 애가 모처럼 왔는데 다 같이 대화하면 좀 좋아. 안 그러니?”

“그러게요.”

은서가 싱긋 웃으며 답하니 덩달아 미소지은 영주가 무릎 위에 팔을 얹으며 몸을 숙였다.

“은서야, 졸업 선물 갖고 싶은 건 없니?”

“선물이요?”

“그래, 곧 졸업이니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생각나는 게 없어요. 갖고 싶은 것도 딱히 없고요.”

“어머, 젊은 아가씨가 그러면 어떡해?”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게 많아서 그런가 봐요.”

사랑하는 남자가 곁에 있고, 좋아하는 그림도 마음껏 그릴 수 있다. 여기서 더 바라는 게 생기면 안 될 것 같았다. 딱히 생길 것 같지도 않고.

다만 한 가지 더 욕심이 나는 게 있다면…….

“그런데 은서야.”

“네?”

“정말 정혁이랑 결혼 생각 없니?”

“아…….”

은서가 곤란한 듯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니, 나는 정말 부담주려는 게 아니라…….”

또다시 서재 쪽을 살핀 영주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제가…….”

고민하듯 입술만 어름거리던 은서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이 집의 가족이 되어도 괜찮을까요?”

“으응?”

무슨 소리냐는 듯 영주의 눈이 커졌다.

“그냥 연애하는 것과 결혼은 또 다른 문제니까요…….”

흐리는 말끝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영주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은서야, 너 우리 정혁이 부모님 안 계시다고 마음 속으로 흉보니?”

“네? 그럴 리가요!”

화들짝 놀란 은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거 봐. 넌 그렇게 반응하면서 왜 그런 말을 하니? 나 서운하려 그래. 은서 눈엔 나랑 우리 그이가 어떻게 보이는 걸까?”

“그게 아니라…….”

“우린 자식이 없지.”

영주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혁이는 부모님을 잃었고, 은서도 부모님을 차례로 잃었지.”

“…….”

“그러니까 우리가 가족이 되면 더욱 좋지 않겠니? 가족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 테니까.”

“아…….”

은서가 그렇게는 생각도 못했다는 듯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난 이미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고 생각해. 정혁이랑은 상관없이 말이야.”

그렇구나.

그래서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애달프고 소중했나 보다.

“내가 두 사람이 그냥 결혼을 빨리했으면 좋겠다 싶은 건…….”

영주가 망설이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손주를 보고 싶어서 그래. 결혼도 전에 손주부터 낳아달라고 할 순 없잖니.”

“!”

은서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우리 나이엔 아무래도 손주 보는 낙으로 살거든. 내 친구들도 그렇고. 나도 자랑하고 싶어 죽겠어서 그렇지 뭐.”

화르륵 달아오른 열기가 얼굴에서 목과 귀로 점점 번지기 시작할 때 정혁과 윤수가 거실로 나왔다.

“……왜 이래?”

“그냥요.”

은서의 얼굴을 굳이 들어 확인하는 그의 행동에 은서는 괜히 영주의 눈치를 보며 정혁의 손을 떼어냈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흡족하게 보는 영주의 미소에 은서는 부끄러움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내 꿈이 이뤄지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렇지 은서야?”

“응?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여자들의 비밀.”

영주의 농담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은서를 보며 정혁이 미간을 좁혔다.

*

“차은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주차를 마친 정혁이 시동을 끄기 전, 은서를 돌아봤다.

“네?”

“할 말 있잖아, 나한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옆에서 힐긋거리며 제 눈치를 살피는 차은서를 모를 리 없었다.

역시나 속내를 빤히 꿰뚫는 정혁에 은서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그, 있잖아요.”

결혼, 하고 싶어요?

그 한 마디를 꺼내는 게 왜 이리 어려운 지 모르겠다. 말을 꺼내 놓고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은서는 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렸다.

시동을 끈 정혁이 몸을 틀어 팔짱을 낀 채 눈을 마주쳐왔다. 입을 열기 전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하정혁씨는요…….”

“…….”

늘어지는 말에도 정혁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결혼……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나랑……?”

드디어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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