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5화
“뭐? 그 오빠 미친 거 아냐? 소개티이이잉?”
“…….”
“자신감이야 뭐야? 어느 쪽이든 재수 없어!”
은서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현주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도 안 되더라.”
정혁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을 떠올린 현주가 알만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워낙 위태위태할 때 하정혁 씨를 만났으니까 그 사람이 날 어린 애 보듯 하는 것도 이해는 돼.”
“…….”
“그래도 내가 하정혁 씨한테 바라는 건 내 보호자 역할이 아니거든. 나는, 그 사람이랑 동등한 관계가 되고 싶어.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도 좋고 화나면 화났다고 표현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 오빠랑 이야기는 해봤어?”
“말 꺼내면 늘 그랬듯이 무조건 내게 맞추겠지. 그런 거 말고, 난 그 사람 진심을 보고 싶어.”
“그래서 자극해보려고 정혁 오빠 연락처를 뿌리고 다녔다? 천하의 하정혁 전화번호를? 너도 참 대단하다.”
“…….”
“이럴 때 보면 너도 되게 저돌적이라니까?”
민망해진 은서가 붉은 입술을 슬쩍 깨물며 시선을 사선으로 떨어트렸다.
“그럼 그간 정혁 오빠한테 연락 엄청 갔겠네? 오빠는 뭐래?”
“아무 말도 안 해.”
은서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훈이 말로는 아예 푹 빠져 산다던데?”
현우가 우스워 죽겠다는 듯 툭 던진 말을 떠올린 현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우리 집 인간한테 들은 이야기랑 좀 뭔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연애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긴 하네. 이런 고민도 하고.”
“그런가.”
“결국 정혁 오빠한테 네 존재가 더 커졌으면 하는 거 아냐?”
“……그럴지도.”
정혁은 제게 곁에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늘 받기만 하고 정혁에게 주는 게 없다는 것이 마음 한편에 걸렸다.
“야, 자신감을 가져. 따지고 보면 나이 어리고 얼굴 예쁘고 미래 창창한 네가 만나주는 걸 하정혁 그 인간이 감사해야지.”
현주의 비꼬는 말에 은서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기죽지 마. 내가 도훈 오빠가 그러는 것 때문에 속상해하는 거 보면 모르니? 그리고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
“정혁 오빠 여기로 오고 있어.”
“……뭐?”
“나한테 묻던데? 어디서 만나고 있냐고.”
“…….”
“가서 얼굴에 뭐라도 좀 바르고 와. 너 지금 얼굴 빨개. 너 술 먹였다고 그 인간한테 욕먹기는 싫거든?”
어차피 집에서 맨날 보여주는 민낯이긴 한데.
그 말을 현주에게 하기는 좀 그래서 은서는 잠자코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왜 오는 거지?’
세면대에서 손을 닦고 차가워진 손바닥을 양 볼에 대 열기를 빼던 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은 어디서 뭘 하든 누구를 만나든 관심조차 없던 그였다.
‘혹시 실장님하고 같이 오려고 그러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정혁이 남의 연애사에 도움을 줄 만큼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럴 때 보면 또 꽤 차갑단 말이야.’
그의 다정함이 제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니 또 괜히 마음이 몽글거렸다.
“중증이야.”
너무 좋은데, 정말 사랑하는데.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만큼, 그가 너무 좋았다.
얼굴을 두어 번 꾹꾹 누른 은서가 화장실을 빠져나와 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저기요.”
“?”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은서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괜찮으면 합석 안 할래요? 우리도 일행 둘인데.”
“아뇨, 사양할게요.”
“그러지 말고 일행분한테도 한번 물어보고 결정해요.”
질척거리기 시작하는 남자에 은서의 표정이 차갑게 굳을 때였다.
“실례.”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은서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
몸을 감싸오는 익숙한 목소리와 향기에 화들짝 놀란 은서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정혁이었다.
“아쉽게도 내 일행이라서.”
정혁이 자연스레 은서의 앞으로 팔을 둘러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등이 닿았다. 언제 안겨도 설레는 아늑하고 포근한 품이었다.
볼이 붉게 상기된 은서가 저를 꼭 끌어안은 정혁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언제 왔어요?”
“지금.”
올려다보며 물으니 도장 찍듯 입술을 꾹 눌렀다 떼어내며 태연히 대답한다.
누가 봐도 연인의 노골적인 애정 행위를 끝낸 그의 시선이 눈앞의 남자에게 가 닿았다.
“…….”
정혁의 눈빛과 표정을 본 은서는 흠칫 몸을 굳혔다.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보여준 적 없는, 지독하게 차가운 얼굴이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당장이라도 해칠 것처럼.
“달리 할 말이라도?”
“아, 아뇨.”
정혁이 사늘하게 뱉은 말에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떴다.
“이거, 상당히 낯익은 그림인데.”
현주를 따라갔다가 재회했던 때의 일을 언급하는 정혁에 은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는 이렇게 안지 않았는데요. 물론 지금처럼 입을 맞추지도 않았고.”
“그랬지.”
고개를 내려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에 코를 비비던 정혁이 손끝으로 은서의 턱을 들어 올려 다시금 입을 맞췄다.
“그때 이후로 1년인가.”
“짧은 시간이었는데 많은 일이 있었네요.”
“그래. 이제 마음 편히 연애 좀 즐길까 했더니.”
“…….”
작게 혀를 차는 정혁에 은서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응시했다.
“자꾸 이상한 것들이 꼬여서 불쾌하네.”
정혁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는 걸 본 은서가 살포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
“거짓말.”
신경도 안 쓰면서.
“차은서.”
“…….”
“내가 잘못했어.”
“!”
귓가에 나붓이 속삭이는 말에 은서는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커다란 눈이 급격히 깜빡이는 걸 본 정혁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은서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
마치 꿀이 흐르는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뭐, 뭘 잘못했는데요?”
정혁이 곧장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은서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번에야말로 끝을 보겠다는 듯 비장하게 따져 묻는 투에 정혁은 웃음을 꾹 삼켰다.
“……차은서.”
짐짓 목소리를 낮추자 긴장한 듯 은서의 몸이 움칠거렸다.
“네 눈길이 머무르는 남자가 있다면 난 그 녀석을 어떻게든 없애고 싶어질지도 몰라.”
“…….”
“나 지금 많이 참고 있는 거니까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어?”
“왜 참는데요?”
“몰라서 물어? 너한테 없어 보이기 싫어서 그래.”
없어 보인다니. 어떻게 봐도 정혁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말에 은서가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농담 같아?”
“아뇨, 농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몸을 빙글 돌린 은서가 정혁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난 오히려 그게 더 좋은데. 지금처럼 그냥 다 표현해주면 안 돼요?”
“…….”
“안 그러면 나 불안 하단 말이에요.”
“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알면, 넌 도망가고 싶어질걸.”
“그걸 하정혁 씨가 어떻게 알아요. 혼자 결론 내리지 말아요.”
“흐응.”
이거 봐, 겁도 없이.
“어린 애 취급하지 말아줘요. 나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하정혁 씨가 내 보호자 말고, 연인이었으면 좋겠어요.”
진지하게 따지는 은서의 머리 위에 턱을 괸 정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빠진 줄도 모르고 차은서는 자꾸만 더 깊숙이 발을 들였다.
“하정혁 씨가 계속 보호자 노릇 하겠다고 하면, 이제는 키스는 물론이고 다른 것도 못 하겠다.”
“협박이 단순한데.”
은서가 불만스럽게 정혁의 허리춤을 꾹 잡아당겼다.
“그래서 무섭다고.”
허리 아래를 조금 더 밀착시킨 그가 은서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어린 애 취급했으면, 애당초 이런 건 하지도 않았을 거라니까?”
등허리에서 골반까지 노골적인 욕망이 묻어나는 손길로 느른하게 쓸어내리자 여린 몸이 흠칫 떨렸다.
“쓸데없는 오해 하지 마. 네가 소중해서 그래. 너무 소중해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조심하는 것뿐이야.”
“…….”
“그럼 우리 화해하는 건가.”
“…….”
은서의 침묵에 정혁이 그녀의 턱을 쥐고 눈을 마주쳤다.
“아직 부족해? 내 번호 계속 뿌리고 다닐 거야?”
입술을 감쳐문 은서를 보던 정혁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네가 계속 그러겠다면 연락해오는 녀석들을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찾아가서 뭐 하려고요?”
“글쎄, 다시는 내 것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만들어 줄까 싶은데.”
정혁의 까만 눈동자에 담긴 짙은 소유욕이 선명하게 보였다.
일단 이 정도면 만족해도 되지 않을까.
“……화해해요, 우리. 처음부터 싸운 것도 아니긴 했지만.”
며칠 내내 속 끓이며 고생한 게 꽤 힘들었는지 안아주는 정혁의 품이 유독 따스하게 느껴졌다.
*
-그래서, 요즘은 좀 만족스럽니?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
은서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 이 빚은 나중에 제대로 갚아라?
“응, 그럴게. 고마워.”
수화기 너머 툴툴거리는 현주에게 약속한 뒤 통화를 마친 은서가 서재 쪽을 힐끔 바라봤다.
주말인데도 아침부터 일이 많다며 서재에 틀어박힌 정혁은 점심때가 다 되어가는데도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들어가 볼까 고민하던 찰나,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끝났어요?”
“회사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약간 지친 기색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며 나온 정혁이 소파에 앉아 있는 은서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말?”
안쓰럽게 쳐다보는데 그가 곧장 은서의 무릎을 베고 커다란 몸을 뉘었다.
“가기 싫어.”
특유의 서늘한 표정을 한 정혁이 툭 어리광을 내뱉었다. 은서는 싱긋 웃으며 정혁의 얼굴을 감쌌다.
“같이 갈래?”
“일하는데 방해될 텐데 어떻게 그래요.”
“하.”
정혁의 미간이 떨어지기 싫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불만스레 일그러졌다.
은서 나름의 반항이 있었던 직후부터 정혁은 종종 이렇게 새로운 모습을 보이곤 했다.
여전히 그의 속내를 전부 열어놓는 건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충분한 발전이라 생각이 들었다.
“얼른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키스해주면.”
은서의 턱 아래를 가볍게 문지르던 정혁의 손가락이 이내 도톰한 입술로 다가갔다.
“하정혁 씨 출근인데 왜 내가 그런 서비스를 해야 하는 거죠.”
은서가 괜히 한 번 튕겨 보며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정혁의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차은서, 그거 알아?”
“?”
“나도 이번에 안 사실인데 말이야. 너 화내거나 심술부릴 때면…….”
은서의 입술에서 내려 온 커다란 손이 곧 제 얼굴을 감싸고 있던 은서의 가녀린 손을 잡아 허리 아래로 이끌었다.
“여기에 힘이 들어가더라고.”
“!”
얼굴이 발개진 은서를 보며 정혁이 느른하게 속삭였다.
“혼자 두고 가려니 마음이 좋지 않은데,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절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
“그러고 싶으면 계속 앙앙거려 보든가.”
또 하나 달라진 건……
아무래도 제가 그의 이상한 스위치를 켜 버린 것 같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