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77화 (77/82)

에필로그 4화

“……뭐?”

정혁이 뭘 잘못 들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씨.”

숨을 씩씩 몰아대던 은서가 뒤늦게 존칭을 붙였다. 그것도 아주 작은 목소리로.

“허.”

기가 막힌다는 듯 헛숨을 뱉는 정혁을 보다가 은서는 침대 위에 널브러진 정혁의 셔츠를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정혁의 눈동자가 진득하게 제 움직임을 좇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은서는 꿋꿋하게 외면했다.

‘화났어, 나 지금 진짜로 화났어.’

티를 낼까 말까. 고민하며 셔츠의 단추를 채운은서는 마음을 정한 뒤 정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다른 남자 만나도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냉정하게 굴려 했지만 숨길 수 없는 서운함이 잔뜩 묻어났다. 정혁이 저렇게 말하는 이유를 짐작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하정혁은 모든 게 차은서 우선이니까. 함부로 대하는 듯 굴지만, 결국엔 모든 걸 제게 맞추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양보할 게 있고 하지 않을 게 있지.

“그냥 믿는 거야.”

은서의 미간을 꾹 누른 정혁이 픽 웃음을 흘렸다.

“네가 나 아닌 다른 남자로 만족하긴 어려울 테니까.”

“……자신감이에요?”

“나만큼 널 사랑할 사람도 없을 거라는 확신이지.”

“…….”

기분이 좋은 것도 같고 나쁜 것도 같고. 복잡미묘한 감정만이 가득해졌다.

더 화를 낼까 말까 고민하던 은서는 결국 입술을 말아 물고 말았다.

찝찝함만 남아버린 그 날 이후, 은서는 정혁에게 반항 아닌 반항을 시작했다.

*

“와, 하정혁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은서는 거실에서부터 걸어오는 정혁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조르르 달려가 힘껏 품에 안기니 정혁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려났다 제자리를 찾았다.

“술 냄새.”

“몇 잔 안 마셨는데. 안 마시다 마셔서 그런가?”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온 게 훤히 보였지만 정혁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날 집에서 하정혁 씨 오는 거 마중하다가 내가 마중받으니까 기분이 색다르네요.”

“좋아?”

“응.”

“그럼 매일 늦게 오든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정혁이 쿡 웃으며 대꾸하자 고개를 들어 올린 은서의 얼굴이 조금 복잡해졌다.

“나 이제 집에 가야겠다. 남친 난리 났어, 왜 안 들어가냐고.”

“그렇게 늦지도 않았는데?”

“쟤 때문에 그러지 뭐. 어쨌든 쟤도 남자라고 은근히 신경 쓴다니까?”

과에 몇 되지 않는 남학생을 가리키며 서둘러 자리를 뜨던 후배가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정혁은…….

“내가 늦게 오니까 좋아요?”

“…….”

좋다길래 농담처럼 건넨 말인데 돌아오는 말이 썩 유쾌하지 않다.

정혁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생각하며 착 가라앉은 은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진짜 그런가.”

“네가 안전하게 다니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좋다기보다는 그냥 내버려 두는 쪽에 더 가깝긴 했다.

10년 가까이 통제 속에 살던 은서가 처음으로 맛보는 자유니까 애초부터 간섭할 생각 같은 것도 없었고.

“흐음.”

술기운에 풀린 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이 남자는 항상 제 앞에서 어른인 걸까.

생각해 보면 연인이 된 이후엔 줄곧 그랬다.

정혁은 제가 무엇을 하든 그저 지켜보는 사람처럼 묵묵히 곁에 있기만 할 뿐이었다.

“나 술 마셨어요.”

“그래, 알아.”

“누구하고 마셨는지 안 물어봐요?”

“누구하고 마셨는데.”

우리 공주님의 심기가 불편하시군. 은서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한 정혁이 픽 웃으며 물었다.

“과 후배들이요.”

“그래.”

“그리고 남자도 있었어요. 아, 정확히 말하면 ‘남자들’이다.”

“…….”

늘 그렇듯이 여유롭던 입꼬리가 순간이지만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오가며 건네는 인사가 전부인 과 후배들이었다.

하도 목석처럼 평온한 남자니까, 조금 흔들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행히 그는 반응을 보였고.

“그래서 재밌었어?”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언제나처럼 여유로웠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는 잠자리에서조차도 제 속내를 훤히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

정혁이 조금 더 제 감정을 드러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어린 애 같은 발상인 걸까?

“……하정혁 씨는 질투도 안 나요?”

정혁에게서 몸을 떨어트린 은서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정혁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질투할 만한 일, 했어?”

물어오는 그의 눈동자는 평온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

그건 당연히 아니지만. 은서는 입술만 어름거렸다.

정말 믿기 때문에 저러는 걸까.

“……안 했어요.”

커다란 손으로 볼을 감싸 쥔 정혁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럼 그만 심술부리고 씻어.”

“…….”

은서는 제 손을 잡고 앞서 걷는 정혁을 따라 발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은서는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정혁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문질렀다.

평소에는 좋아해 마지않던 다정한 스킨십이었지만 오늘따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어린 애 취급하는 것 같아서…….

‘나, 너무 복에 겨운 건가.’

마음이 복잡해진 은서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남자를 솔직하게 만들 수 있는 걸까.

*

“저기요.”

“?”

도서관을 빠져나오던 은서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까 열람실에서부터 봤는데 제 스타일이셔서요. 괜찮으시다면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죄송…….”

곧장 거절하려던 은서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못되게, 이기적으로 살라는 말이야.”

맞선남과 만난다는 거짓말하고 정혁을 찾아갔던 때, 그가 웃으며 제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정혁의 반응을 끌어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호, 주실래요?”

“…….”

남자가 조심스레 내민 휴대폰을 보던 은서가 마음을 굳히고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연락 드릴게요.”

“…….”

익숙한 번호를 휴대폰 화면에 찍어준 은서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걷다 말고 힐끔 돌아보니 신이 난 남자가 웃으며 친구들에게 향하는 게 보였다.

‘본의 아니게 이용하게 돼 미안해요.’

제가 지금 뭐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라서요.

은서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마음속으로 깊이 사죄했다.

그나마 이게 정혁이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큰 방법이었다.

*

[아까 도서관에서 번호 받아 갔던 사람인데, 기억하세요?]

“…….”

모르는 번호로 들어 온 문자를 의아하게 보던 정혁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누가 잘못 보냈나 여기고 말았던 연락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카페에서 전화번호 물었던 사람인데요.]

[아까 술집에서 전화번호 받은 사람입니다.]

심지어 각기 다른 번호로 오는 사심 가득한 연락이 며칠 내내 이어졌다. 답을 하지 않으니 개중에는 전화를 해오는 녀석도 있었다.

-어어어?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정혁의 목소리를 듣고는 기겁하며 끊기 일쑤였고.

“아하.”

배후를 어렵지 않게 눈치챈 정혁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제 전화번호를 누구인지도 모르는 한낱 하찮은 남자들에게 뿌릴 수 있는 사람의 정체.

요즘 심기가 불편한 것 같더라니. 은서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면 노력이고 뭐고 당장에 때려치우고 싶어지는데.”

가장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은서의 마음을 움켜쥔 게 조금 양심에 걸려서, 대인배처럼 굴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었다.

제가 미칠 듯한 인내심으로 욕심을 꾹꾹 참고 있다는 건 차은서는 절대 모를 거였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저 때문에 은서가 조바심을 내는 걸 보니 어른 노릇하는 것도 그만둘까 싶었다.

“차은서, 널 어쩐다.”

정혁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라난 마음이 은서를 집어삼킬까 두렵기도 했다.

은서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건 그녀가 저로부터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둔 것이기도 했다.

그랬는데 순진한 차은서는 유일한 탈출구인 줄도 모르고 제 손으로 구멍을 막으려 하고 있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대표실 문을 열고 나타난 도훈이 정혁의 비릿한 미소를 보며 움찔 몸을 떨었다.

느른하게 몸을 늘어트린 채 한 손으로 휴대폰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정혁은 꽤 위험한 기운을 풍겼다.

“그냥.”

휴대폰을 돌리던 손의 움직임을 멈춘 정혁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자유롭게 풀어주는데도 못 누리는 게 귀엽다 싶어서.”

“……결재나 해 줘.”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도훈이 눈썹을 찌푸렸다.

웃음기를 머금은 정혁이 사내 인프라에 접속하려 할 때, 책상 위의 휴대폰이 잘게 몸을 떨었다.

[오늘도 늦을 것 같아요. 술 약속이 있거든요.]

“우리 공주님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네.”

문자에서 틱틱대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정혁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건, 차은서니까 할 수 있는 귀여운 도발이었다.

*

“넌 친구가 나밖에 없니? 왜 자꾸 불러내는 거야. 바쁘신 몸인데.”

은서의 앞에 앉은 현주가 핸드백을 내려놓으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몰랐어? 나 친구 너밖에 없어. 전에는 민정이 하나였는데 이젠 걔도 없고.”

“……얘는 또 사람 무안해지게. 안 그러더니 너 애가 변했다?”

금세 꼬리를 내리는 현주에 은서가 웃음을 흘렸다.

“네 남친하고 좀 놀아. 네 남친이 집에 안 가서 도훈 오빠도 맨날 야근인 거 알아?”

“미안. 나 지금 반항기라서 그러니까 좀 이해해 줘.”

“후. 반항기? 장난해? 사랑 놀음도 가지가지네. 나는 도훈 오빠랑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현주가 짜증 섞인 손길로 술잔을 집어 들자 은서는 잠자코 잔을 채워주었다.

“우리 집 설득하는 게 제일 큰 문제일 줄 알았더니, 그 오빠 입에서 솔직한 마음 듣는 게 더 어려울 줄은 몰랐어.”

“…….”

“갈 길이 구만리인데 큰일이다. 저래서야 우리 집 대문 문턱이나 넘겠니?”

“그러게. 그치만 실장님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현주의 하소연에 은서가 차분하게 동조했다.

자신조차도 중훈을 제 손으로 끌어내린 다음에 곧장 정혁의 손을 잡지 못했으니까.

내가 상대에게 부족한 걸 알기에 선뜻 용기 내지 못하는 상황을 알았다.

“알아, 조심스러워한다는 거. 그러니까 기다리는 거잖아. 그러는 넌? 넌 대체 뭐가 문젠데?”

현주가 은서에게 화살 끝을 돌렸다.

“정혁 오빠는 너 예뻐서 물고 빨고 난리인데, 뭐가 불만이야?”

“그게…….”

은서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고민이야. 하정혁 씨가 너무 오냐오냐하기만 해서.”

“이게 지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누구 약 올리냐고 따지듯 현주의 눈이 희번덕이는 걸 본 은서가 난처한 미소를 짓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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