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76화 (76/82)

에필로그 3화

“응.”

바쁘게 서류를 보던 정혁은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일하고 있어요?

“응.”

-나 지금 수업 끝났는데 후배들이랑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려고요.

“그래.”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혁이 피식 웃으며 수긍했다.

복학한 은서는 최근 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괜찮다 했는데도 그녀는 제 귀가가 늦어질 때마다 꼭 연락을 해왔다.

“은서 씨 늦는대?”

“어.”

통화를 끝내니 도훈이 힐긋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흐음. 요즘따라 귀가가 자주 늦네?”

“아직 학생이잖아. 놀아야지.”

“마음도 넓으셔라. 일 더 하다 갈 거지?”

“그래, 비서실은 가라고 해.”

코웃음 치며 비꼬는 도훈에 정혁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 일 끝났으면 알아서들 가는 거지 뭐. 저녁 알아서 시킨다?”

도훈이 신경 끄라며 중얼거리고는 빠르게 휴대폰을 놀렸다.

“야, 그런데 너…… 그렇게 여유 부리면 안 불안하냐?”

“?”

“그러다 은서 씨가 너 같은 남자 재미없다고 어린 녀석한테 가버리면 어쩌려고?”

“…….”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쭉쭉 밀던 도훈이 마치 저주에 가까운 재수 없는 말을 덤덤하게 했다.

“아니, 나는 그러라고 비는 게 아니라 긴장 좀 하라는 거지.”

정혁이 침묵하자 눈만 돌려 정혁을 본 도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 아직 은서 씨는 어리고 또 그러니까…….”

“그런 게 불안해서 이현주랑 지지부진한가.”

“…….”

정곡을 찔렀는지 스리슬쩍 입을 다무는 도훈을 보며 정혁이 혀를 찼다. 왜 이쪽을 통해 제 불안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하는 건지.

현주의 적극적인 공세에도 미적거리는 꼴이 일하는 스타일과는 영 딴판이었다. 제 친구를 한심하게 보던 정혁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보내줄 거야.”

“음?”

“차은서가 가겠다고 하면 보내줄 거라고.”

“…….”

“네 말마따나 아직 어리니까. 잠깐의 방황쯤은 참고 기다려 줄 수 있어.”

종착지가 제 곁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말이다.

어디에도 보내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저 제 곁에서 평생 저 하나만 바라보며 살게 하고 싶었다.

이 지나친 욕심이 또 다른 차중훈의 형태가 되어 은서를 압박하게 될까 참는 것일 뿐.

“미쳤냐?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보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차은서의 행복이니까.”

망설임 없이 대답이 흘러나왔다.

은서의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절 사랑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한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게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은서가 더이상 저로 인해 행복하지 않다면 보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혁은 저 자신이 분명히 그러리라는 걸 알았다.

혼자 남은 자신이 지옥 같은 고통에 절어 들지라도.

“……글쎄, 난 네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이해받을 생각 같은 건 없어.”

“은서 씨는 네가 이런 생각하는 거 알면 썩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다른 남자한테 눈 못 돌리도록 마음을 묶어 두려고 노력하잖아.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니. 정혁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말에 도훈의 입이 벌어졌다가 곧 다물렸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그쯤 하지?”

“……초밥 시켰다.”

차갑게 일갈하는 정혁을 물끄러미 보던 도훈이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쉬듯 저녁 메뉴를 보고했다.

그러면서도 도훈은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저 콧대 높은 하정혁이 저러다 된통 당하고 눈물 뽑는 날이 올 거라고.

도훈의 눈에는 서류를 움켜쥔 정혁의 손등 위로 불쾌함에 한껏 솟아오른 핏줄이 보일 리 없었다.

‘다른 남자라.’

정혁이 차갑게 조소했다.

차은서가 다른 남자의 곁에서 웃고, 제게만 보여주는 흐트러진 모습을 다른 남자에게 보인다?

상상만으로도 상대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 얼마든지 차은서에게 전부 맞춰 줄 수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차은서를 제 곁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

수업이 끝나고 책과 필기구를 정리할 때였다.

“언니, 오늘 같이 저녁 먹고 갈래요?”

“오늘은 안…….”

“?”

“그래, 먹자.”

후배의 제안을 거절하려던 은서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직 정혁 때문에 생겨난 복잡미묘한 마음이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정말?”

“왜?”

물어와 놓고는 못 믿겠다는 얼굴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묻는 후배에 은서가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나 너무 실감이 안 나서 그래.”

“야, 너도?”

옆에 있던 후배 하나가 합세하며 친구의 팔뚝을 철썩 내리쳤다.

“언니가 이 시간까지 학교에 있다는 게 안 믿겨요.”

“맞아, 나 저번에 밤에 작업실 갔다가 언니 있는 거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너희만 그런 거 아니야. 당사자인 나도 안 믿기는데 뭐.”

“집에서 갑자기 왜 풀어주는 거예요? 이 언니, 알고 보니 지난번에 기말고사 안 치르고 단식 투쟁이라도 한 거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

아이들의 너스레에 은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민정 언니는 요즘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된대요?”

“맞아. 은서 언니 돌아오니까 민정 언니가 또 연락 두절이네.”

“요즘 바쁜 것 같더라. 어쨌든 졸업했으니까.”

마치 흔적을 지우듯 도망쳐 버린 민정의 이야기를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은서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하자 아이들은 민정이 취업 준비를 하는 것으로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좋겠다. 이번에 윤 교수님이랑 한 전시회도 대성공이었잖아요. 앞길이 탄탄대로네.”

은서와 수일의 관계는 미대에서 큰 화젯거리가 됐다. 다들 신기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쉽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응, 우리 뭐 먹을까요?”

은서가 적당히 말을 돌리자 아이들의 관심사가 금방 바뀌었다.

“난 안 가 본데면 다 좋아. 졸업전에 학교 앞 맛집은 다 가볼 거야.”

“다 데려가 줄게요, 언니! 가자!”

나름대로 진지한 은서의 목표에 아이들이 더 의지를 불태우며 은서를 끌고 나갔다.

“…….”

평소처럼 정혁에게 전화해 행선지와 예상 귀가 시각을 알리려던 은서는 고민 끝에 휴대폰을 가방 속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정혁에게 제 불편한 심기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래, 이건 확실히 문제가 있는 거야.’

은서는 며칠 전 정혁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으며 또다시 황당해졌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저녁을 먹고 함께 잠자리에 들기 전 대화를 나눌 때였다.

“바빠 보이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정혁이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은서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돌돌 말았다 풀기를 반복하며 읊조렸다.

“작년 기말고사 때 못 본 과목들, 전부 재수강하고 있거든요.”

“고생이군.”

“으음, 차라리 잘 된 것 같아요.”

고개를 돌린 은서가 제 위에 있는 정혁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제대로 학교생활을 즐겨 볼 수 있게 됐잖아요. 이번에야말로 진짜 마지막 학기니까.”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대학 생활을 누려보지 못했으니, 남은 한 학기라도 제대로 즐겨 볼 생각이었다.

“요즘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요. 아직 못해본 게 많아요.”

“뭘 해보고 싶은데?”

“과 친구들이랑 여행도 가보고 싶고, 아, 동기들은 다 졸업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후배들이지만, 여튼.”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은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걸 본 정혁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생기 넘치는 차은서를 보고 있자면 저절로 마음이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마음 편히 애들이랑 과제도 하고, 졸작 준비도 하고요. 어쨌든 졸업전에 미대 라푼젤 별명은 없앨 생각이에요.”

“라푼젤?”

“갇혀서 나오질 못한다고 애들이 그렇게 불렀어요.”

“…….”

“그냥 대놓고 웃지 그래요?”

정혁이 픽 웃는 걸 보며 은서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동안은 통금 때문에 자유롭게 다니는 건 꿈도 못 꿨으니까……. 아, 맞다.”

은서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살짝 눈을 찡그렸다.

“혹시, 통금 시간 정할 거에요?”

요즘 늦은 귀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보니 갑자기 그의 눈치가 보였다.

조심스레 묻는 말에 황당해진 정혁이 헛숨을 뱉었다.

“차은서.”

“…….”

“네가 애야?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툭 내뱉자 은서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깃들었다.

은서는 베고 있던 그의 허벅지를 꼭 끌어안으며 좋은 티를 숨기지 못했다. 그런 사소한 부분에도 기뻐하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정말 아무것도 못해봤어요. 신입생 오티부터 시작해서 엠티도 못 가봤고, 동아리 같은 것도 못 했고.”

하나하나 짚으며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아쉬움과 설렘이 골고루 뒤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학교 축제 밤에 하는 건 구경도 못 했고…… 아. 소개팅, 미팅 이런 것도 안 해봤네요.”

“…….”

순간 어색한 침묵이 들어찼다.

“아니, 뭐. 해보고 싶다는 건 아니고요.”

소개팅이나 미팅은 안 해봤어도 맞선은 해봤잖아요. 중얼거리는 끝말이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하고 싶으면 해 보든가.”

“……네?”

은서가 뭘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 보라고, 소개팅이든 미팅이든.”

“…….”

은서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진심이에요?”

“그래, 진심이야.”

“…….”

은서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서히 노기가 들어차는가 싶더니.

“야, 하정혁!”

……폭탄이 터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