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75화 (75/82)

에필로그 2화

술렁이는 인파를 보는 은서의 시선이 고요해졌다.

“……나갈까?”

“네.”

보호하듯 은서의 어깨를 감싸 안은 정혁이 그녀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괜찮아?”

건물 뒤편의 작은 정원으로 향한 정혁은 은서를 벤치에 앉힌 뒤 그녀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네, 그냥 교수님께 죄송해서 그래요.”

“네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 당신이 원하신 일이야.”

착잡해 하는 은서를 보며 정혁이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

처음부터 수일이 건넨 제안이었다. 수영과 은서에게서 중훈의 흔적을 지워버릴 목적으로.

“앞으로의 네 작품 활동을 위해서도 그렇고, 널 내 딸이라고 공표할까 한다.”

“교수님?”

“생각해봤지만 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는구나. 그 사람의 성격상, 언론에 널 내 딸이라고 터트리고 나면 정계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네 일을 묻어 둘 거다.”

아직 중훈의 법정 싸움은 진행 중이었고 형을 선고받는다 해도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올 것이다.

수일은 중훈이 다시 은서의 미래에 끼어들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다.

“언론에서 수영이와 네게 관심을 두고 파고든다고 해도 진실이 알려지면 비난받는 것은 나와 수영이가 아니라 그자가 될 테니까.”

권력을 이용해 사랑하는 연인을 갈라놓은 악역이 되는 걸 중훈이 스스로 자처하진 않을 거였다.

“저 때문에 교수님이 희생하시는 것 같아서요.”

수일은 졸지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첫사랑의 딸을 제 딸로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그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 놓고도 혹 수일의 커리어에 해를 끼치진 않을까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교수님의 딸일까 봐 무서웠던 때가 있었는데…….”

은서는 전시회장 건물에 걸려 있는 커다란 현수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수영과 수일의 이름 뒤에 나란히 적힌 제 이름은 차은서가 아니라, 그저 ‘은서’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교수님의 딸로 알려지게 됐네요.”

진짜 딸도 아닌데. 은서는 뒷말을 씁쓸히 삼켰다.

“누가 네 아버지가 되든, 넌 그냥 너야. 차은서든, 윤은서든 네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나 하나 행복해지자고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

“그만큼 네가 소중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오늘 좀 다정하네요.”

“언젠 안 그랬나.”

쿡쿡 웃은 은서가 두 팔을 벌려 정혁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배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정혁의 커다란 손이 곧장 머리 위로 내려와 부드럽게 쓸어주는 걸 느끼며 은서는 눈을 감았다.

“교수님은 우리 엄마를 정말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그래서 불편해?”

“아뇨. 다행이다 싶어요. 우리 엄마가 그래도 누군가에게 많이 사랑받았구나 싶어서.”

“…….”

“사랑이라는 거, 참 신기하다 싶기도 하고.”

은서가 잠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는 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이라 했다.

하지만, 수일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영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심지어 연인이었던 것도 아닌데.

“사람마다 사랑하는 형태가 다 다른 거겠지.”

“그럼 하정혁 씨는 어떤데요?”

“글쎄.”

“…….”

은서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턱을 그의 배 위에 얹은 채 동그란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걸 보다가 정혁이 입술을 길게 늘였다.

“네가 직접 확인해 봐. 내 곁에서.”

밀려오는 행복함에 은서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나, 지금보다 더 많이 행복하게, 웃으며 살 거예요.”

“그래.”

“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 올려진 행복이니까. 난 행복해질 책임이 있어요.”

“책임이 아니야.”

정혁이 은서의 팔을 풀어낸 뒤 한쪽 무릎을 꿇어 은서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럴 자격과 권리가 있는 거야.”

“……응.”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만족스럽다는 듯 정혁이 웃으며 입을 맞췄다.

*

“차은서, 일어나.”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정혁이 은서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으음, 집이에요?”

“그래.”

눈을 끔뻑이다가 잠에서 깨어난 은서가 한껏 기지개를 켰다.

“아아, 끝났다!”

한 달간 진행된 전시회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고생했어, 당분간 좀 쉬어.”

은서의 벨트를 풀어주고 차에서 내리게 한 정혁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정혁의 따스한 손길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바로 씻고 나와, 저녁 준비해둘게.”

“아아. 힘들어서 손 하나 까딱 못 하겠어요. 집에까지 안아주면 안 될까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은서는 쓰러지듯 그대로 현관문에 몸을 기댔다.

“자꾸 어리광이 늘어.”

“그래서 싫어요?”

대답 대신 픽 웃은 정혁이 허리를 끌어안은 탓에 몸이 밀착됐다. 기다렸다는 듯 넥타이를 아래로 끌어당기자 그의 고개가 순순히 아래로 내려왔다.

“키스하고 싶은데. 해도 돼요?”

“그런 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지.”

마주 닿은 시선에 웃음기가 섞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간 입술이 겹쳐졌다.

은서는 그의 넥타이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정혁의 목을 감았다.

비스듬히 꺾인 얼굴에 닿은 입술이 더욱 깊숙이 얽히자 부드럽게 시작한 움직임이 점점 조급해졌다.

“후으.”

무의식에 흘린 여린 숨에 입안을 헤집던 정혁의 혀가 딱딱해졌다.

정혁의 손이 성급하게 문을 열어젖히자 뒤엉킨 몸이 안으로 밀리듯 들어갔다.

캄캄한 집안에 타액이 섞이며 찔꺽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로를 탐하는데 열중한 두 사람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아얏.”

은서의 발뒤꿈치에 무언가 걸리며 우르르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

다급히 입술을 떼어 내고 은서를 제품에 넣은 정혁이 주위를 훑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캔버스들이 들어왔다.

작게 한숨을 쉰 정혁이 손을 뻗어 스위치를 누르자 한층 더 엉망이 된 환경이 한눈에 보였다.

“음…… 그림이 너무 많다. 그렇죠?”

은서가 슬그머니 정혁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정혁이 작업실로 쓰라 했던 넓은 거실은 어느새 발 디딜 틈도 없이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로 가득 차 있었다.

“작업실 하나 얻어줄까?”

그간은 집에서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는 게 좋기도 했고, 또 은서가 굳이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내버려 뒀지만 이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때였다.

“아뇨, 괜찮아요. 그림은 다른 곳에 보관할게요. 어떤 건 그냥 처분해야 하기도 하고…….”

급히 고개를 내저은 은서가 거실을 힐끔 둘러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주겠다는 걸 거절하지 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왜 예뻐해 준대도 싫대.”

“……그게 하정혁 씨가 예뻐하는 방식이에요?”

“그중의 하나겠지.”

“이미 하정혁 씨한테 많이 받았는걸요.”

“글쎄, 지금 같아서는 가진 걸 다 쥐여줘도 성에 안 찰 것 같거든.”

특유의 서늘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 애정을 표현하는 정혁에 은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날 너무 좋아하나 봐.”

“알면 순순히 받아.”

이미 바로 위층의 집을 작업실 용도로 구매해 놓았지만 은서가 동의할 때까지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투명한 눈동자에 떠오르는 미안함을 보기는 싫었으니까.

“난 줄 게 없어서 속상해요.”

투정 부리듯, 작게 중얼거리는 은서의 턱을 쥐고 들어 올린 정혁이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왜 없어?”

“…….”

“네 마음을 줘야지. 내게.”

“그건 이미…….”

“그리고…….”

정혁의 시선이 은서의 오뚝한 콧날로, 붉은 입술을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네 몸도.”

“…….”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서 사랑해야지, 날.”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요.”

못 말린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린 은서가 두 손을 쭉 뻗었다. 안아달라는 행동에 미소를 머금은 정혁이 제품에 가두듯 꽉 안아주었다.

지금처럼 솔직하게 애정을 갈구해 오면 되는데. 그저 행복한 얼굴로 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차은서만 몰랐다.

“있잖아요, 하정혁 씨.”

은서가 귓가에 대고 은근히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우리 하던 거 마저 해야지 않아요?”

“잊었을 리가.”

담백하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은서를 안아 올린 정혁이 소파 위에 쓰러뜨리듯 눕혔다.

그간 전시회 준비로 바쁜 은서를 배려하느라 강제로 인내의 시간을 보낸 참이었다.

“각오해야 할 텐데.”

“어, 음…… 그 정도예요?”

“글쎄, 어떨까.”

입꼬리 끝만 올려 픽 웃는 정혁을 보는 은서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안아달라고 먼저 매달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즘의 차은서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순진무구한 얼굴을 할 때가 많았다.

그게 사람을 더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해보면 알겠지.”

다급히 섞이는 혀와는 다르게 블라우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길은 느긋했다.

납작한 배를 감싼 커다란 열기가 위아래로 옮겨가며 몸에 밀착되어 있던 천 조각들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흣…….”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익숙한 손길에 길들여진 몸이 빠르게 반응했다.

“치, 침대에서…….”

은서는 은밀한 곳을 찾아 들어가려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빌듯이 웅얼거렸다.

어차피 금방 들킬 걸 알지만, 그에게 흥분의 흔적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건 부끄러웠다.

꼭 음탕한 사람이 된 것처럼 그에게 반응하는 몸이 조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후, 차은서.”

“…….”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슬쩍 시선을 내리깔자 정혁이 고개를 내려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앗.”

“급해. 그러니까 네가 양보해.”

귓불 끝을 잘근 깨문 그가 속삭이는 말에 몸이 움찔 떨렸다.

뱉은 내용과는 달리 그의 말투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아…….”

곧장 귀밑 여린 살을 한껏 빨아들인 그의 손가락 끝이 확인하듯 매끄러운 천 위를 문질렀다.

“나만 급한 줄 알았더니.”

잘게 흩어지는 웃음소리에 하얀 목덜미까지 새빨개졌다.

“침대로 데려가 줄게.”

“…….”

얇은 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그가 입술을 살짝 겹쳐오며 속삭였다.

미끄러운 피부를 타고 내려오는 움직임에 은서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모으려다 단단한 허벅지에 막혀 버렸다.

“일단 급한 것부터 해결하고 난 다음에.”

“……흣.”

턱을 쥐어 사랑스러운 입술을 벌리게 한 그가 동시에 저를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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