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화
“양 비서. 아까 말했던 서류 다 됐지?”
“네, 실장님.”
“가지고 들어와 줘.”
“네.”
바쁘게 지시를 내린 뒤 대표실로 사라지는 도훈을 보던 순영은 서둘러 서류를 그러모아 스테이플러로 찍었다.
꽤 오랫동안 재택근무를 하던 대표가 회사로 돌아오자 제일 바빠진 건 역시 비서실이었다.
“아, 맞다.”
서류만 챙겨 대표실로 향하던 순영은 급히 탕비실로 방향을 꺾었다.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단 것을 찾는 도훈을 떠올린 탓이었다.
늘 구비해두는 간식까지 챙긴 순영이 그제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표실로 향했다.
“아, 고마워요. 양 비서.”
가죽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정혁과 도훈 사이에 서류와 다과를 내려놓자 도훈이 반색했다.
“그리고 대표님, 은서 양 전시회 화환은 미리 주문해두었습니다.”
“?”
“내가 그러라고 했어. 회사 이름 붙여서 보내려고.”
마치 그걸 네가 왜? 라고 묻는 듯한 정혁에 순영이 입을 열려고 하자 도훈이 부가 설명을 붙였다.
“……수고했어요.”
벌써 간식을 입에 하나 문 도훈을 본 정혁이 그러냐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순영을 치하했다.
“그럼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말씀 주십시오.”
순영이 허리를 살짝 숙이고 물러나려 할 때였다.
“양 비서님.”
도훈과 다과를 번갈아 보던 정혁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네.”
“이거, 양 비서님이 구매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너무 비싼 간식을 사둔다고 혼나려나?
물론 제 상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혹시 다과가 마음에 안 들었나?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공손하게 서 있던 순영이 살짝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매장이 어딥니까?”
“……네?”
순간 고개를 들어 올린 순영이 눈을 깜빡였다.
“잘 먹던데.”
주어가 생략된 말이지만 정혁이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순영과 도훈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문해두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회사 것 주문할 때 같이 하면 됩니다. 은서 양 취향에 맞춰 준비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미리 말씀만 주시면 됩니다.”
“……그럼 부탁하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순영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대표실을 나섰다.
“네 사고는 다 은서 씨 중심으로 돌아가냐?”
등 뒤로 도훈의 타박이 들려 온 탓에 순영은 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은서가 좋아할 만한 게, 음…….”
주문을 넣으려던 순영은 한동안 비서실에 상주하고 있던 은서를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는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 놀랐고, 그다음엔 그녀가 입은 옷 때문에 놀랐다.
‘이 아가씨였구나.’
제가 사다 놓은 옷이니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다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보고 있으면 알 수밖에 없었다.
차갑기만 한 제 상사의 눈이 한시도 은서에게서 떨어지질 않았으니까.
너무 소중해서 애지중지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서둘러야겠네. 퇴근 전에 받으려면.”
순영이 급히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쨌든 은서에게 제일 고마운 것이 있었으니, 아무리 바빠도 제 상사는 이제 오후 여섯 시 땡치면 사무실을 나선다는 점이었다.
*
“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해사한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정혁을 반겼다.
“이건 뭐예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오던 은서가 그의 손에 들린 걸 보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네 간식.”
“간식?”
은서의 손을 잡아 들어 올린 정혁이 그 위에 박스를 툭 내려놓고는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 회사에서 먹던 거다!”
한 톤 높아진 은서의 목소리에서 즐거움이 묻어났다.
확연히 나타나는 반응에 넥타이를 풀며 침실로 향하던 정혁의 입꼬리 끝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순영 언니가 줬구나? 나 갖다주라고?”
순영?
뒤를 졸졸 쫓아온 은서가 눈망울을 반짝이며 묻자 막 재킷을 벗던 정혁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 양 비서 이름이 그랬던 것도 같다.
언제부터 양 비서가 언니가 됐는지. 정혁은 은서의 친화력에 새삼 감탄하고 말았다.
하긴, 그게 본래 차은서일 터였다. 처음 본 남자를 위해 노래도 불러주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언니한테 잘 먹겠다고 연락해야겠다.”
제가 준비했을 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태도였다. 정혁은 굳이 은서의 생각을 바로잡지 않았다.
사실관계만 따지면 양 비서가 구매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차은서가 즐거워하면 된 거였다.
“아, 근데…… 양이 너무 많다. 이거 다 먹으면 살찔 것 같은데.”
은서는 박스 안에 가득 채워져 있는 마카롱과 다쿠아즈를 보며 침음했다.
“차은서, 넌 더 쪄야 해.”
셔츠 단추를 풀다 만 정혁이 어느새 뒤로 다가와 은서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한 줌도 안 되는 가느다란 손목을 보는 정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시회를 앞두고 그림에 매진하는 그녀는 애써 찌워놨던 살이 빠진 채였다.
은서의 얼굴과 몸 곳곳에 묻어 있는 물감을 보며 정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끼니도 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뭐, 아무 의욕도 없이 텅 빈 눈을 하던 때보다 낫기는 하지만.
“그림은?”
“아! 나, 완성했어요.”
그제야 잊고 있었다는 듯 은서가 입술 끝을 길게 늘였다. 수일과 함께 준비하고 있는 수영의 전시회에 내보일 작품을 막 끝낸 참이었다.
“이리 와요, 보여줄게요.”
간식 상자를 협탁 위에 내려놓은 은서가 정혁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얌전히 이끌려 간 정혁은 눈 앞에 펼쳐진 커다란 캔버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어때요?”
은서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정혁의 반응을 살폈다. 전시회에 내보내기 전, 제일 처음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은서의 상기된 볼과 반짝이는 눈을 힐긋 본 정혁이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를 닮은 따뜻하고 싱그러운 색채가 캔버스 위에 녹아 있었다.
“……차은서 그림이다 싶네.”
“감상이 뭐 그래요?”
맥이 풀린 은서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원망스레 올려다보자 정혁이 그녀의 코를 장난스레 쥐었다.
“칭찬이야.”
샐쭉하던 은서가 정혁의 허리춤을 감으며 몸을 기대왔다.
“이제 씻고 저녁 먹을 거죠?”
“그래야지.”
“잘 됐다, 나도 씻어야 하는데.”
“…….”
“씻는 김에 나도 씻겨주면 안 돼요?”
“차은서. 네가 애야?”
정혁이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며 픽 코웃음 치자 은서의 눈꼬리가 아래로 향했다.
“전에는 잘만 씻겨줬으면서…….”
은서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감고 있던 손을 풀려 하자 정혁이 그 손을 다시 낚아챘다.
은서가 왜 그러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쉽게 물러서지 말라니까.”
“……하여간 못됐어.”
그럴 거면 처음부터 튕기지 말든가.
토라진 듯 핀잔하자 잘게 웃은 정혁이 도톰한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씻겨줄게. 한 군데도 빠짐없이, 깨끗하게.”
은서는 괜히 정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는 하정혁이란 사람을 조금은, 아니 그보다는 더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농담 같은 그의 말끝에 담긴 눅진한 열기를 알아채고 말았다.
*
“와 줘서 고맙군요.”
“축하드립니다, 교수님.”
사람으로 북적이는 전시회장 가운데, 정혁을 발견한 수일이 반가워하며 손을 내밀었다.
꽉 손을 쥐며 친밀감과 고마움을 드러내는 수일에 정혁이 잠자코 미소 지었다.
“내가 안내도 좀 해주고 그래야 하는데.”
“바쁘실 텐데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첫날이라 내가 정신이 없네. 대신 나보다 더 좋은 안내인을 붙여 주지.”
너스레를 떤 수일이 두리번거리다 은서를 발견하곤 이리 오라 손짓했다.
“왔어요?”
정혁을 본 은서가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안내 잘 해드려.”
“네, 교수님.”
손을 휘휘 내저으며 사라지는 수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은서는 자연스레 정혁의 손에 깍지를 꼈다.
“밥은?”
“……못 먹었어요. 먹을 틈도 없었고.”
보자마자 끼니를 챙겼는지부터 확인하는 정혁에 은서가 어름대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혁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꿈틀거렸지만, 그도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전시회장을 가로지르던 두 사람은 어느새 전시회의 하이라이트 작품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수영의 그림을 가운데에 두고 은서와 수일이 각각 연작으로 그린 그림을 나란히 전시해 둔 공간이었다.
“…….”
정혁은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는 은서의 얼굴을 보다가 말없이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 따스함을 알아챈 은서가 싱긋 웃으며 눈을 마주쳐왔다.
“엄마 그림이 이렇게 다시 세상에 나오게 돼서 좋아요.”
“그래.”
“교수님 후광효과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더 많은 사람이 엄마 그림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거야.”
다정한 대답에 정혁을 보는 은서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그를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날이 오기는 했을까 싶었다. 제 연인이지만 은인이자 구원자였다.
그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은서는 정혁의 손을 가만히 들어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눈으로, 입술로, 또 다른 몸짓으로. 말을 대신하여 모든 것으로 표현하는 수밖에.
“…….”
그의 손등에 옅게 남은 립스틱 자국을 보며 키득거리자 정혁이 못말린다는 듯 손가락 끝으로 뽀얀 볼을 톡 두들기며 실소했다.
“그만 나갈까요?”
모든 전시를 둘러본 두 사람이 다시 메인홀로 나왔을 때였다. 여러 대의 카메라와 강한 조명이 수일을 향한 게 보였다.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수일이 오랜만에 연 전시회다 보니 언론의 관심도 상당히 남달랐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모여있는 인파 뒤로 적당히 지나갈 때였다.
“오늘 전시에 함께하신 홍수영 작가님하고는 어떤 인연이십니까?”
“…….”
한 기자가 던진 평범한 질문에 갑자기 수일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의 침묵과 어두운 표정에 기자들의 눈에 하나둘 의아함이 들어찼다.
“작가님?”
“홍수영 작가는…….”
수일의 시선이 멀찌감치 서 있는 은서에게 닿았다가 카메라로 향했다.
“제가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
“그녀는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 사람과의 기억을 되새기고 싶어 이 전시를 하게 됐습니다.”
“그럼 그간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독신이셨던 이유가…….”
“네, 한 번도 그녀를 마음에서 떠나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늦게나마 그녀와 제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그렇다면 오늘 전시에 함께 한…….”
“맞습니다, 함께 전시를 준비한 ‘은서’양은 그녀와 제 사이의 딸입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