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73화 (완결) (73/82)

73.

“은서 씨랑 둘이 먹지 나는 왜 끼……!”

정혁을 따라 들어오던 도훈이 은서 외에 다른 얼굴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이, 이 배신자 새끼.”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도훈이 정혁의 팔을 붙잡고는 이를 악문 채 읊조렸다.

“우리 공주님 지시라서.”

“그래도 미리 말은 해줬어야지!”

정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도훈이 괘씸하다는 눈빛으로 정혁을 노려보았다.

제 눈물겨운 설득에 은서와 잘 된 건 줄도 모르고!

“오빠!”

도훈을 발견한 현주가 활짝 웃으며 도도도 달려왔다.

“적당히 튕겨. 저러다 애 나가떨어지고 후회하지 말고.”

“…….”

입을 꾹 다문 도훈에게 슬쩍 충고한 정혁이 마주 오는 현주를 지나 은서에게 향했다.

“오빠, 보고 싶었어.”

도훈은 스스럼없이 팔짱을 껴오는 현주를 힐끔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가 몰라서 그러나.

좋고 끌리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배경을 감당할 자신이 아직 없을 뿐이었다.

이마를 짚은 도훈은 문득 저를 보고 있던 은서와 눈이 마주쳤다.

은서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도훈이 슥 눈을 피했다.

그녀에게 큰소리쳤던 지난날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

“…….”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정혁은 텅 비어있는 통로를 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항상 해맑게 웃으며 ‘왔어요?’라고 묻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녀가 지금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슬리퍼로 갈아 신고 소리죽여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정신없이 캔버스에 붓을 휘두르고 있는 은서의 뒷모습이 보였다.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상황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정혁은 입을 다문 채 벽에 기대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편히 작업할 수 있도록 아예 거실 공간을 작업실로 만들어 준 참이었다.

창가에 이젤을 두고 앉아 머리를 질끈 묶고 앞치마를 두른 채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뿌듯함과 만족감이 동시에 들고는 했다.

그러고 있기를 한참, 정혁은 조용히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 깜짝이야!”

샤워를 하려 욕실로 향하던 은서는 드레스룸에 반나체로 서 있는 남자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젖은 머리를 말리던 정혁이 팔을 잡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몰랐다.

“뭘 그리 놀라. 못 볼 거 본 사람처럼.”

“언제 왔어요?”

정혁이 들어오는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어느새 깜깜해진 풍경에 정신을 차리고 그가 오기 전에 미리 씻으려던 참이었다.

“조금 전에.”

“그런데 왜 아는 체도 안 했어요.”

은서가 서운한 듯 볼을 부풀렸다.

내가 맞아주고 싶었는데.

그의 집에서 사는 건 전과 같았지만, 달라진 점이 많았다.

우선 연인이 됐다는 게 그랬고, 정혁이 제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게 그랬다.

저 때문에 밀린 일이 많았는지 최근 정혁은 매일이 야근의 연속이었다.

힘들게 일하고 돌아올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그가 보고 싶어 하는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것뿐이었다.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

“헤헤.”

쑥스러웠는지 장난스레 웃는 얼굴 한쪽에 물감이 묻어 있었다.

개구쟁이 같은 모습에 정혁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얼굴은 오래전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그토록 다시 보고 싶었던…….

“저녁은?”

“챙겨 먹었어요. 하정혁 씨도 먹고 온 거죠?”

늦을 테니 먼저 챙겨 먹으라는 연락을 이미 받은 후였지만, 그래도 궁금하니 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정혁이 은서의 턱을 붙들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기특하네.”

“또 애 취급.”

갸름하게 뜬 눈이 뾰로통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러자 한 걸음 성큼 다가온 정혁이 느른하게 제 몸을 붙였다.

그의 힘에 저절로 밀린 등이 벽에 닿았다.

커다란 손이 거침없이 골반을 붙잡아 끌어당기며 아래를 맞췄다.

“!”

놀란 것도 잠시 무람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끄덩하고 뜨거운 것이 파고들었다.

고개를 비틀어 조금 더 깊이 저를 쑤셔 넣은 남자가 위아래로 느리게 문지르며 저를 각인시켰다.

갈급하게 찔꺽이는 혀와는 달리 흉흉한 아래는 나른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다.

그 간극이 한껏 예민해진 감각을 자극하며 괴롭혀댔다.

“으응…….”

견딜 수 없어 조르듯 신음하자 마음껏 안을 헤집던 것이 쑥 빠져나갔다.

정혁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혀로 닦아내듯 누르고 문질렀다.

“애 취급하면 이런 건 못 하지.”

“…….”

“안 그래?”

잡고 있던 골반에서 미끄러진 손이 엉덩이를 욕실 쪽으로 떠밀었다.

“씻고 와.”

건조하다 싶을 만큼 담백한 말투였다.

·

“후, 하정혁.”

은서는 조금 전의 상황을 곱씹으며 투덜거렸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에 비눗물이 씻겨 내려가며 여기저기 묻은 물감의 얼룩을 지웠지만 달아오른 열기는 아직 몸 전체에 남아 있었다.

“으으.”

샤워 부스를 짚고 고개를 떨어뜨린 은서가 깊이 침음했다.

입 안을 헤집던 느낌이 아직도 선명했다.

“처음 하는 키스도 아닌데 왜 이러니, 나.”

볼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한참을 발을 동동 구른 후에야 겨우 욕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드라이기로 젖은 머리를 말리는 은서는 멍하니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며 손을 움직였다.

생각해 보면 연인이 된 이후에도 그는 함부로 저를 만지지 않았다.

가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맞춰오는 것 외에는 특별히 욕정을 드러내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오늘 정혁이 보여준 갈망은 찰나의 순간이었는데도 꽤 잔상이 짙었다.

“으, 추워.”

물기가 마른 몸을 파르르 떤 은서가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서랍장을 열었다.

샤워가운을 벗고 습관처럼 속옷을 집으려던 은서의 손이 멈칫했다.

“…….”

망설이던 손이 결심한 듯 다른 서랍장을 열었다.

정혁의 옷이 있는 곳이었다.

·

“들어와.”

서재에서 잠시 업무를 보던 정혁은 낮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무심코 응했다.

“노크할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타박하던 정혁이 곧장 입을 다물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펜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탓에 책상 위로 데구르르 굴러떨어져 버렸다.

“……차은서.”

정혁은 제게로 사뿐사뿐 걸어오는 여자를 보며 낮게 침음했다.

“잠옷이 없었어?”

“아뇨, 많은데. 누가 잔뜩, 사이즈별로 사다 놓은 덕분에.”

“그런데 왜…….”

그녀가 입고 나타난 것은 제 셔츠였다.

단추도 어설프게 몇 개만 잠근 탓에 하얀 속살이 아찔하게 보일 듯 말듯 가려져 있었다.

“새삼스럽게요, 내가 하정혁 씨 셔츠 한두 번 빌려 입은 것도 아닌데.”

정혁과 책상 사이로 하얗고 긴 다리를 밀어 넣어 들어 온 은서가 책상에 걸터앉아 정혁을 내려다봤다.

“하정혁 씨.”

은서가 발끝으로 정혁의 발목을 톡 쳤다.

새하얀 다리가 벌어진 탓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셔츠자락 밑으로 은밀한 곳이 드러날 것처럼 위태로웠다.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유혹이었다.

“지금은 넘어올 건가요?”

언젠가 그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내가 유혹하면요.”

그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책상 위에 누워 달뜬 숨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은서는 곧 웅크리고 앉은 여인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기시감에 덜컥 겁이 났다.

혹시 또 울고 있는 걸까.

“엄마.”

여인에게 달려간 은서는 곧장 그녀를 끌어안았다.

“엄마…….”

그리웠던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모래성처럼 품에 안은 여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 엄마!”

당황하며 손을 뻗어 좇으려 하자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

뿌리치려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환히 웃는 수영이 저를 보고 있었다.

“은서야.”

“엄……마.”

은서는 몸을 돌려 수영을 끌어안았다.

어느새 저보다 작아진 엄마가 제품에 쏙 안겼다.

“사랑하는 내 딸.”

다정한 손길이 등을 토닥인 탓에 눈물이 흘렀다.

“엄마,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내 딸 보고 싶었어.”

“엄마, 미안해.”

“엄마도 미안해. 널 혼자 둬서 미안해.”

몸을 바로 한 수영이 젖은 얼굴을 작은 손으로 닦아주며 웃었다.

“그래도, 네가 행복해 보여서 엄마 안심이 됐어.”

“엄마.”

“항상 행복해야 해, 우리 딸. 약속한 거야?”

“엄마…… 가지 마.”

다시 흐려지려는 그녀에 은서가 다급히 중얼거렸다.

“사랑해, 내 딸, 은서야.”

웃는 얼굴이 조금씩 흐려졌다.

“엄마!”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 은서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이자 고였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다급히 두리번거리자 수영이 없는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꿈…….’

오랜만에 꿈을 꾼 것 같았다.

은서는 눈물을 닦아내다 제 옆에 텅 빈 자리를 발견했다.

분명 어제 같이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귀를 기울여봤지만, 욕실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 갔지?’

침대에서 발을 내린 은서는 문을 열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차근차근 그의 흔적을 찾아간 곳은 제 그림이 있는 방이었다.

가만히 앉아 그림을 보고 있는 그의 뒤로 다가가 목을 끌어안자 고개를 돌린 그가 은서의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악몽 꿨어?”

그는 은서를 혼자 둔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걱정을 내비쳤다.

“아뇨, 악몽은 아니었고…… 오히려 행복한 꿈이었어요.”

“이리 와.”

비싯 웃음을 흘리자 그가 안도한 듯 팔을 벌려 제품을 열어주었다.

은서는 거리낌 없이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정혁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보시다시피, 그림 감상.”

“……무슨 생각 했는데요?”

“…….”

“말해주기 싫음 어쩔 수 없고.”

“어머니가 널 만나게 해주신 걸까, 그런 생각.”

“하정혁 씨, 그런 감상적인 생각도 할 줄 아는구나.”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혁이 핀잔하며 은서의 코끝을 쥐었다 놓았다.

푸스스 웃은 은서가 그의 허리를 감았다.

“사실, 나도 그 생각했어요.”

“…….”

“엄마가 하정혁 씨를 만나게 해줬구나 하는 생각.”

고개를 든 은서의 시선이 그림의 제목으로 향했다.

정혁도 덩달아 은서의 시선을 따라 제 것을 옮겼다.

[혼자 남은 이를 위하여]

“…….”

“혼자 남을 나를 위해서요.”

다시 정혁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은서는 그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수영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혼자 남은 하정혁 씨랑 내가 만나서…… 둘이 됐잖아요.”

그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이렇게 잘 만나다 보면 또 혹시 알아요? 둘이 셋이 되고, 넷이 될지."

일렁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장난치듯 속삭였다.

“만나다 보면?”

되묻는 목소리에 못마땅한 기색이 묻어났다.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네.”

품에 안고 있던 은서를 그대로 소파에 쓰러뜨린 정혁이 결박하듯 그 위에 올라탔다.

제 아래 갇혀 말간 눈으로 올려다 보는 은서는 언제 보아도 심장을 찔러오는 절경이었다.

이렇게 남의 심장을 움켜쥐어놓고서 어딜 내빼려고.

“도망 못 가, 이제.”

“누가 도망가기는 한대요?”

그의 옷자락을 잡아 끌어당기자 그가 순순히 이끌려오며 몸을 내렸다.

닿아오는 입술은 늘 그랬듯 뜨겁고, 부드러웠다.

“그래, 내 곁에 있어.”

섞이는 숨결에 만족스러움이 묻어났다.

“나의 공주님.”

장난치듯 중얼거린 그가 곧 깊게 입술을 맞물려 왔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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