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무서웠어요…….”
속삭이는 은서를 손쉽게 안아 올린 정혁이 그녀를 제 무릎 위에 앉히고 얼굴을 들여다봤다.
마주 닿은 가슴에서 기분 좋은 박동이 서로의 몸을 타고 번지며 울려댔다.
“내가 가진 상처가, 당신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까 봐. 그래서, 우리가 행복할 수 없을까 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가 당신의 미래를 욕심내도 되는지 자신이 없어서.
눈물을 쏟아내며 중얼거리는 은서는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잔인하네, 차은서.”
그 눈물이 전부 제 것이라 생각하자 심장이 뻐근해졌다.
정혁은 눈물을 삼키듯 뽀얀 볼 위로 입술을 스치며 낮게 읊조렸다.
“사람을 이렇게 유혹해놓고, 모른 체하려 했다니.”
“……흑.”
끝없이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맞닿은 두 사람의 가슴을 적셨다.
“그러는 하정혁 씨도 나 보내려고 했잖아요.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요.”
“내 마음, 진작 눈치채고 있었잖아. 네가 눈감고 외면했을 뿐이지.”
미간을 찡그린 정혁이 항의하듯 입술을 비틀었다.
“어떻게 해도 숨겨지지 않아 질질 흘려댔는데.”
제 탓으로 돌리는 정혁이 얄미워진 은서가 입을 비죽이며 그의 팔을 꼬집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
간지럽지도 않을 미약한 힘에 웃고 만 정혁이 가녀린 몸을 으스러트릴 것처럼 힘주어 안았다.
벗어날 수 없는 강한 힘에 움찔한 은서는 제 어깨에 고개를 묻는 정혁의 머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어쩌지?”
그가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자꾸 웃음이 나. 너는 우는데.”
그의 솔직한 마음을 듣는데 온몸이 몽골몽골해지는 기분이었다.
구름 위를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행복해.”
은서는 그의 머리와 어깨를 동시에 끌어안았다.
“행복해서 돌아버릴 것 같아.”
“……뭐예요, 그게.”
결국 은서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울다가 웃다가, 다시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이제 그만 울면 안 될까?”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이마를 지그시 맞대어 왔다.
“슬슬 키스하고 싶은데.”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흐르던 눈물이 멈췄다.
·
“처음부터 놓아 줄 생각 같은 건 없었어.”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속삭여도 서로의 목소리가 귓가에 바로 울리는 것처럼 들리고, 뱉는 달콤한 숨결이 상대의 것과 섞일 만큼.
“거짓말.”
은서가 눈에 힘을 주자 그의 입술이 눈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뭐 하러.”
“그럼, 왜 내가 나간다고 했을 때 아무 말 안 했어요?”
“네가 싫다고 했으니까.”
“다른 땐 싫다고 해도 들은 체도 안 했으면서.”
“섹스할 때를 말하는 거라면 억울한데.”
“!”
“입은 싫다고 하면서 몸은 더 해달라 매달리잖아.”
이미 붉게 물들어 더 붉어질 수도 없을 것 같은 얼굴에 화륵 열이 올랐다.
“그런 이야기를 꼭, 지금 해야겠어요?”
“내가 네 말에 얼마나 복종하는지 알아달라는 거지.”
“아, 네.”
“어딜.”
토라진 척 휙 몸을 돌리려 하자 손을 뻗어 막은 그가 다시금 저를 보게 했다.
“윤 교수님이 유학 이야기를 꺼냈다며.”
허리 위를 지분거리던 손길이 멈추는가 싶더니 정혁이 그만 놀리겠다는 듯 주제를 바꿨다.
“……들었어요?”
“그래.”
빙글 몸을 돌려 팔을 세우고 턱을 괸 은서가 가만히 정혁을 내려다봤다.
“어차피 차 의원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언론은 네 주위를 맴돌 거야.”
정혁이 밑으로 흘러내린 은서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돌돌 감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굳이 심각한 것처럼 무게를 잡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내 집에 있으면 크게 상관이 없다 생각했어. 지금까지와 다를 것도 없고.”
“……그런데 내가 갑자기 나간다고 했구나.”
“그래. 그러니 차라리 유학을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지.”
“만약 내가 진짜로 가면 어쩌려고 그랬는데요.”
“말했잖아.”
“…….”
“연락하라고, 기다리겠다고.”
물론 기다리는 나는 피가 마르는 기분이라 못 견디고 찾아갔겠지만.
그가 푸스스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차은서.”
“…….”
손가락의 장난을 멈춘 그가 눈을 마주쳐왔다.
“이것만 알아 둬.”
저를 담은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한없이 진중하고, 무거웠다.
“내 사랑이 네 행복에 우선하지 않아.”
은서가 벌어졌던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자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그가 입술을 가볍게 쓸어 힘을 풀게 했다.
“넌 네 행복만 생각해.”
“그럼 하정혁 씨의 행복은?”
“글쎄.”
정혁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섰다.
“한 번씩 안아주면 충분할 것 같기도 한데.”
노골적인 유혹이 담겨 있는 말에 은서가 어름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순진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정혁이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웃는 게 보고 싶어.”
“…….”
“우는 것도 예쁘지만…… 그래도 난 네가 웃는 걸 보고 싶어.”
그의 손끝이 부드럽게 은서의 볼을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렇게 웃어.”
정혁의 눈가가 살짝 휘었다.
“그거면 난 충분해.”
“……웃을게요.”
은서가 정혁의 품을 파고들었다.
“다른 데 안 가고, 하정혁 씨 옆에서요.”
그의 곁이 바로 제가 있을 곳이었다.
*
“아쉽지 않겠니?”
은서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수일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집 근처로 찾아가겠다는 말에 학교로 직접 만나러 온 은서였다.
“괜찮아요. 저는 그림만 그릴 수 있으면 돼요. 평생 그림은 손도 못 댈 줄 알았는걸요.”
수일은 잔잔하게 웃는 은서를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망설임도, 아쉬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그동안 못 그린 거 실컷 그리고 싶어요.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니 한국에 있어야 하기도 하고요.”
은서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천천히 음미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곳에서 이렇게 수일과 마주 앉아 편안하게 차를 즐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괜찮니?”
수일이 함축적인 질문을 던졌다.
물어놓고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을까. 중훈의 몰락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였다.
“네,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은서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하며 미소 짓는 은서는 제가 봐 왔던 중에 가장 단단해 보였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는 부분은 열심히 도우마.”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내 개인적인 부탁을 해야겠구나.”
“부탁이요?”
“그래, 네게 비는 시간이 많을 것 같아서 말이다. 어차피 이번 학기도 휴학 상태고, 다음 학기에 복학해도 한 과목 수업만 들으면 될 테니까.”
“…….”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가 싶어 은서가 찻잔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수영이의 작품들,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거 알고 있지?”
“네.”
“그 작품들로 올겨울에 전시회를 열어볼까 한단다.”
“!”
커다란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이채가 도는 걸 본 수일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
그간 중훈이 어떻게 압력을 가해올지 몰라 할 수 없었던 프로젝트였다.
“지금이 적기이다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좋아요, 교수님. 정말로요.”
“그 전시회에 네 그림을 함께 걸었으면 좋겠어.”
“…….”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다.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 준비도 하려면. 어때, 해보겠니?”
“……네. 무조건해야죠.”
만개한 진달래처럼 붉게 물든 볼이 싱그러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
수일과 헤어진 은서는 건물 앞에서 기다리던 세단의 뒷좌석을 열었다.
정혁이 저의 안전한 외출을 위해 준비한 거였다.
본인조차도 스스로 운전해 출퇴근하면서 제게는 이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처사를 내린 그를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거부감을 내비치자 정 싫다면 가까이서 지켜볼 경호원을 붙이겠다고 했다.
아직은 언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이니 그의 주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사람을 붙이겠다고 협박하던 중훈을 떠올린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사랑과 걱정이 담겨 있는 건 이런 거였구나. 그가 제게 주는 안전장치를 위한 통제는 오히려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결국 정혁의 걱정하는 마음에 못 이겨 그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바로 출발할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시간을 확인한 은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앉아 있기에는 뒷좌석이 너무 넓게 느껴졌다.
얼른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불안해서가 아니라,
무너진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가 보고 싶었다.
*
“그러니까.”
“…….”
“두 사람이 사귄다고?”
사귄다는 단어가 쑥스럽게 느껴져 은서는 괜히 작게 헛기침했다.
“그럴 줄 알았어.”
현주가 도도하게 코웃음 쳤다.
“하여간 둘 다 여우들, 아닌 척하더니 뒤에서 할 거 다 하고 있었잖아?”
“이렇게 된 건 얼마 안 됐어.”
“그래그래, 어쨌든…….”
말을 멈춘 현주가 은서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최근 특검에 포함되면서 잠도 못 잘 정도로 바쁘게 보내는 현우였다. 그가 투입된 사건인 차 의원이 은서의 아버지라 했다.
게다가 뻔질나게 유흥업소를 드나들던 민준은 제 아버지가 차 의원 게이트에 연관되어 검찰 소환을 당한 이후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충 은서에게 벌어진 상황이 그려졌다. 무엇보다 제일 충격적인 건 역시 민정이었지만.
‘나 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저를 볼 때마다 묘하게 적대감을 드러내 안 그래도 찝찝하다 싶었다.
“고생 많았겠다.”
상념을 끝낸 짧은 한마디로 위로를 대신하기로 했다.
제가 은서에게 어떤 말을 건넨다 한들 오버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차은서는 그간 봐왔던 어느 때보다 편안한 표정이었으니까.
“응, 이젠 괜찮아. 고마워.”
“나한테 왜 고마워?”
“너 때문에 하정혁 씨를 다시 만났으니까.”
“둘이 만나려는 인연이었나 봐.”
두 사람의 과거 인연을 듣고 난 뒤라 그런지 현주도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끌고 가고 싶더라니.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 하루가 아니었던가.
“뭐 따지고 보면 내가 주선자 역할을 한 셈이네. 맨입으로 넘길 순 없겠어.”
현주가 장난스레 눈꼬리를 휘며 상체를 숙였다.
“그럼. 그래서 이 은혜를 제대로 갚아볼까 하고.”
은서가 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어떻게 갚으려고?”
“마침 도착했네.”
“!”
은서의 고갯짓에 뒤로 고개를 돌린 현주가 다시 은서를 보며 씩 웃었다.
“최고야, 마음에 들어!”
“그렇지?”
은서가 뿌듯하게 웃으며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