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71화 (71/82)

71.

[차은서, 혼자 남은 이를 위하여]

그림 바로 옆에, 공모전 시상식 때 보았던 작품 네임택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아들이 하나뿐이시래요…… 이 그림도 이사장님이 구매하실 거라고 하셨다니깐요? 아들에게 선물할 거라고요.”

“무뚝뚝한 아들이라, 힘들어도 속으로 쌓아두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신다더라고요? ……엄마들은 다 그런가 봐요……그쵸?

오래전, 잊고 있던 기억 속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댐이 터진 것처럼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더불어, 어린 마음에 새겨졌던 남자의 눈물도.

처음으로 남자의 눈물이 아름다울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하게 했던 키가 큰 짧은 머리의 남자도.

‘설마…….’

심장이 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설마…….’

금세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던 은서가 그대로 방을 뛰쳐나왔다.

당장 확인하고 싶어졌다.

정혁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이었냐고. 정말 당신이 맞느냐고.

“아……!”

당장 현관문을 열려던 은서가 뒤늦게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주춤거렸다.

이대로 나갔다가 그와 엇갈리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시 몸을 돌려 후다닥 달려갔다.

“휴, 휴대폰…….”

거실과 침실을 오가며 찾는 손길과 몸짓이 다급했다.

자꾸만 마음이 피를 토하듯 꿀럭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잊었을까. 잊고 있었을까.’

제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현주의 손에 이끌려 그를 만난 날, 저를 뚫어져라 보던 그의 기묘한 눈빛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기억 못 하는 건가, 역시.”

그의 말을 무심코 흘려버린 제 자신이 이해가 안 됐다.

“난 네게 갚을 빚이 있어.”

왜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답은 여기저기에 있었는데.

“!”

겨우 휴대폰을 찾아낸 은서가 휘청이며 달려가 현관문을 열려던 때, 손이 닿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뭐야, 격하게 반기는…… 차은서?”

제 몸에 부딪칠 뻔한 은서를 잡아챈 정혁이 퍽 웃음을 터트리다 말고 은서의 턱을 잡아들었다.

뭔가 그녀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

“표정이 왜 이래.”

울 것 같은 얼굴에 정혁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말 안 했어요?”

떨리는 입술 사이로 속삭이듯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그날 처음 만난 거 아니었잖아요. 훨씬, 더 오래전이었잖아요.”

정혁의 붉은 입술이 하릴없이 벌어졌다.

“…….”

은서는 거만하게 느껴질 만큼 늘 평온하던 남자의 얼굴에 선명한 당혹감이 떠오르는 걸 지켜봤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정혁은 안으로 발을 들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 앞에 선 은서를 내려보았다.

어여쁜 하얀 뺨 위에 눈물이 아롱졌다.

요즘의 차은서는…… 울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못 알아 본 건 너였잖아.”

정혁이 웃음을 머금으며 대꾸했다.

“!”

눈물방울이 달린 눈동자가 한층 더 커졌다.

은서가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정혁이 저를 탓해 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라서 눈물마저 멈춘 것 같았다.

“그래서, 날 탓하는 거예요?”

“맞아.”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서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온 정혁이 은서의 눈물을 닦아냈다.

“널 탓하는 거야.”

“…….”

“날 잊다니.”

“……그건.”

“새까맣게 잊어버리다니.”

“…….”

그때 예쁘게 울던 남자와 지금의 정혁은 같은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만큼 달랐으니까.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짙은 눈썹과 높게 솟은 콧날, 깊게 팬 눈매.

기억 속 정혁이 더 어려 보였다는 것과 지금의 정혁이 더 날카로워졌다는 것만 뺀다면.

“잊은 건 아니었어요. 다만…….”

“다만?”

“……미안해요.”

무어라 변명을 시도하려던 은서가 결국 꼬리를 내렸다.

“그래도…… 정말 잊은 건 아니었어요.”

동그란 눈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해 정혁은 웃음을 삼켰다.

이게 뭐라고.

차은서가 기억 속 저를 떠올리는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어이없게도 실없는 웃음이 나오려 했다.

저도 몰랐던 사실이었지만, 아마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꽤 서운했던가 보다.

“오랜만이야, 차은서 양.”

정혁이 붉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다시 만났네, 우리.”

은서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커졌다.

그가, 하정혁이,

웃고 있었다.

그것도 커다랗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

쏟아진 눈물의 양에 비하면 재회는 담백했다.

“……어떻게 바로 알아봤어요?”

정혁이 놓아둔 그 소파 위에 앉아 두 무릎을 세워 끌어안은 은서의 눈동자는 그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냥. 보자마자 알았어.”

한 번도 잊은 적 없었으니까. 기억의 서랍에 넣어 놓고 이따금 꺼내서 들여다보곤 했으니까.

옆에 나란히 앉은 정혁이 덤덤하게 답했다.

“나야말로 그때와 많이 달라졌잖아요, 알아보기 힘들 만큼.”

“그래. 처음엔 좀 의외였지.”

“꽤 오래전이었으니까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성인이었던 그와는 달리 저는 사춘기 소녀였다.

세상이 그저 아름답다고만 믿던 순수하고 겁 없던 어린아이.

“그러니까…… 이사장님이 하정혁 씨 어머니이신 거죠?”

“……맞아.”

은서는 뒤늦게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공모전 시상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재단 이사장 부부가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했다는 소식. 그래서 시상식에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은서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별장에 갔을 때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볼 걸 그랬다 싶어 조금 후회가 됐다.

이제야 왜 그날 제 그림을 보면서, 아니.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혁이 눈물을 흘렸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에게 말을 건 것도 어쩐지 위태롭고 처연한 게 눈길이 가서였으니까.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고민하던 은서는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을 풀어 내렸다.

힐끔 그를 보니 다리를 꼬아 앉은 정혁은 소파 팔걸이에 한쪽 팔을 세우고 턱을 괸 채 저처럼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

은서는 소파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의 손가락 끝에 제 것을 살며시 붙였다.

망설이듯 그 부근을 배회하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제 것을 얽어 넣었다.

“…….”

고개를 돌린 정혁의 시선이 엉킨 서로의 손에 닿았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러니까…… 이제 와서.

민망함에 어물거리자 그가 옅은 미소와 함께 은서의 손을 꽉 쥐어 왔다.

“……위로는 충분히 받았어.”

“…….”

“그날, 네게.”

은서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거 알아?”

정혁이 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탓에 은서의 몸이 기우뚱 기울며 정혁의 몸에 부딪혔다.

정혁이 비밀 이야기를 할 것처럼 은서의 귓가에 제 입술을 붙였다.

“차은서, 너…….”

“…….”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싶어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노래 못하더라.”

“!”

은서가 홱 고개를 돌려 정혁을 흘겼다.

정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좀처럼 듣기 힘든 그의 웃음소리였다.

그 사실이 어쩐지 기쁘게 느껴져 또 심장이 울컥거렸다.

“하정혁 씨가 말한 갚아야 할 빚이라는 게…… 이거였어요?”

“그래. 그날의 넌, 내게 구원과도 같았어. 넌 몰랐겠지만.”

정혁이 다른 한 손으로 은서의 물기 어린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하정혁이 그 모든 걸 뒤로하면서까지 은서씨에게 매달린 이유가 뭘까요.”

“…….”

은서는 마음 한구석에 맴돌던 질문이 점점 부피를 키워나가는 걸 느꼈다.

“하정혁 씨.”

은서는 정혁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으려 애썼다.

“그럼…… 내게 해 준 모든 게…… 그날의 일 때문이었어요? 그저 빚을 갚기 위해서?”

“…….”

눈물을 닦아낸 손가락을 말아쥐었던 그가 조심스레 은서의 뺨을 감쌌다.

언제고 끝없이 들여다보고 있고 싶은 눈동자를 보며 정혁은 직감했다.

이제 제 진실을 털어놓을 때가 됐다는 것을.

“아니.”

망설임 없이 단호한 눈빛을 보며 은서는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꼈다.

“사랑이었어.”

“…….”

“전부, 그래서 그랬어.”

반짝이는 빛을 담은 구슬 같은 눈동자가 속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위로 부풀어 오르는 투명한 물방울이 더없이 예뻤다.

“사랑하게 됐으니까, 사랑하니까 해 준 거야.”

뜻 모를 감정을 담은 눈물들이 흘러내려 그녀의 뺨에 닿은 손가락을 적셨다.

정혁은 간절히 바랐다.

이 눈물에 담긴 것이 기쁨이기를,

행복이기를,

제 고백에 대한…… 긍정적인 답이기를.

“네가 선택해, 차은서.”

정혁은 목을 조여오는 긴장을 숨기며 물었다.

“네게 그냥 빚 갚은 걸로 할까?”

나쁜 사람.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바보 같은 사람.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았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자꾸 보고 싶고…… 생각나고…….”

은서는 제 뺨을 감싸 쥔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사람의 미래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는…… 그런 생각이 들면 사랑하는 거라고요.”

정혁의 손은 오늘도 서늘했고,

“그게 사랑이라면…….”

따뜻했다.

“난 하정혁 씨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봐요.”

눈을 뜬 은서는 피하지 않고 그를 직시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돼요?”

난…… 내 손으로 하나뿐인 가족을 끌어내리는 끔찍한 사람인데.

가족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다정한 당신에게, 그런 내가 가당키나 한 존재일까.

어느새 은서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다시피 한 채 앉아 있었다.

정혁이 잡고 있던 은서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

떨어져나가는 온기에 은서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 허전함이 불안하고 무서웠다.

은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정혁을 바라봤다.

“차은서.”

정혁이 천천히 제 팔을 들어 올렸다.

“안아줄래?”

“…….”

“안아 주라, 꽉.”

명령이 아니었다.

지시도 아니었다.

그가 제게 처음 해 온 부탁이었다.

“흑.”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대로 손을 뻗어 정혁의 목을 끌어 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단단한 손이 제 품에 묻을 것처럼 가녀린 등과 허리를 휘감았다.

“……사랑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무거워 그다웠다.

깨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그의 마음이 흘러 들어와 이제 막 새 살이 돋기 시작한 심장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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