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윤수는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윤수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보던 은서가 현관에 어정쩡하게 선 도훈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된 건지 도훈에게 눈으로 묻자 도훈이 하하, 서글프게 웃었다.
“일단 들어가요, 은서 씨.”
“…….”
은서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이미 소파에 자리 잡은 윤수의 앞에 앉았다.
“자네는 자리 좀 비켜 주게.”
“회장님!”
윤수가 뒤따라 앉으려던 도훈에게 신호를 주자 도훈이 크게 당황했다.
“저 정혁이가 알면 진짜로 죽어요, 죽는다고요!”
“그러니까 모르게 온 거잖나.”
울상을 한 도훈이 거의 빌듯이 사정했지만 윤수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아, 회장님…… 이건 이야기가 틀리잖습니까.”
은서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며 긴장을 조금 풀었다.
아무리 정혁의 친구라지만 한 기업의 총수인데도 도훈이 편하게 대하는 걸 보니 그리 무서운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저…… 저는 괜찮은데요…….”
은서가 조심스레 도훈에게 의견을 피력하자 윤수는 거보라는 듯 턱짓했고 도훈은 불안해하다가 결국 현관으로 향했다.
“20분, 20분 지나면 저 다시 올 겁니다.”
“어휴, 저 저…… 누가 하정혁 비서 아니랄까 봐.”
“말씀 나누세요.”
떠나는 도훈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윤수는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은서에게 휙 시선을 던졌다.
“차은서 양이라고?”
“아, 네…… 차은서입니다.”
“허, 거참.”
윤수가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뱉어냈다.
그가 찾아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중훈에게 듣고서야 정혁의 배경에 대해 알게 됐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바로 대한민국 재계 1위인 도림그룹의 총수인 거였다.
최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주인공의 딸이었고, 그 사건에 정혁을 휘말리게 했으니 그가 자신을 질책한다면 무조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차은서 양.”
“네.”
은서가 다시 긴장하며 침을 모아 삼켰다.
“그러니까, 우리 정혁이와 같이 살았다고? 이 집에서?”
은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은서는 손가락을 그러모은 뒤 윤수를 마주 보았다.
하나뿐인 조카를 위험할 수도 있는 일에 끌어들였으니 그에게 사과하고 걱정을 덜어주는 게 맞았다.
은서의 입술이 막 벌어지던 때였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어요.”
“……네?”
뜻밖의 말에 맥이 탁 풀렸다.
“미안해요, 은서 양. 내가 진즉 알았으면 더 좋은 조치를 취해줬을 건데.”
은서가 당황해하며 보자 윤수는 쐐기를 박듯 한 번 더 사과를 건넸다.
뭘까 싶어 은서가 윤수의 눈을 보며 주춤거렸다.
“아뇨, 왜 제게 미안해하시는지 이해가 잘…….”
“젊은 아가씨를 이렇게 제집에다 두고서, 어휴. 내 딸 아이를 그렇게 했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놓았을 거야.”
윤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의미를 알아챈 은서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요.”
무서운 말을 중얼거린 윤수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곧 벙긋벙긋 웃으며 불쾌하지 않은 시선으로 은서의 얼굴을 살폈다.
은서는 도통 그의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깜짝 놀랐지 뭡니까. 정혁이가 제집으로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또 은서 양이라고 해서 더 놀랐지.”
“절……아세요?”
“알다마다.”
즉답이었다. 중훈을 떠올린 은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몇 년째 은서양 그림이 집에 딱 붙어 있는데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지.”
“……네? 그림……이라뇨?”
“음?”
먼저 미간을 찡그린 건 은서였고, 그녀의 반응을 본 윤수의 미간도 덩달아 찌푸려졌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실언한 모양이구먼.”
그제야 윤수가 난처해하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정혁이 녀석 답구먼. 쓸데없이 입이 무겁단 말이지.”
윤수는 은서의 투명한 눈동자를 보며 깨달았다는 듯 웃었다.
“난 그 녀석 그런 게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
“그놈이 어떤 놈인 줄 알아요?”
은서가 답을 고르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은서 양. 정혁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알고 있어요?”
“!”
처음 안 사실에 충격받은 은서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찬 윤수가 말을 이어갔다.
“정확히 그 녀석 스물두 살 때 떠났지. 그 이후 정혁이는 뭐든 혼자서 해 왔어요.”
“…….”
“내가 도와준다는데도 학비 한 푼 안 받아 간 녀석이야, 그놈이.”
윤수가 속상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그 녀석은 날 부모라고 생각도 하지도 않는 거지. 선을 그어놓고 그렇게 말이야.”
“…….”
“집안일 도와주는 사람 보내겠다고 해도 기어코 사양하고 저 혼자 밥을 해 먹고 사는 건지 어쩐 건지 걱정은 되는데.”
“…….”
“회사 차릴 때도 나한테 일언반구 말도 없었다고. 물론 뒤에서 몰래 도와주려고 애쓰다가 한번은 걸려서 욕만 먹었지 뭡니까?”
윤수는 정혁에게 쌓인 감정이 많은 듯 보였다.
“그렇게 혼자 다 하려는 놈인데. 다 짊어지려는 녀석인데. 얼마 전에 그 녀석이 난생처음으로 내게 도움을 청해 오더라고.”
“…….”
“경호실을 좀 빌려 달래.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몇 명만 좀 내어달래.”
묻지 않아도 그때가 언제인지 알 것 같았다.
민정을 만났던 바로 그날.
“이놈이 내 주치의도 마음대로 데려다 쓰면서 뻔뻔하잖아?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짜를 놨더니, 한숨을 퍽 쉬더니,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다지 뭐야?”
지키고 싶은 사람…….
은서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감이 왔지. 이놈, 여자가 생겼구나! 하고…….”
은서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런데 보여달라고 졸라대도 들은 척도 안 하더라고, 내가 서운하지 않겠어요?”
윤수가 하소연하듯 투덜거렸다.
“어쩌겠나. 도훈이 녀석을 쥐잡듯이 잡았지. 그랬더니, 은서 양 이름이 나와서 많이 놀랐어요.”
“…….”
“이 녀석이, 생전 내 도움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 것처럼 살던 녀석이 은서 양 때문에 내게 굽히고 들어왔구나 하고. 그렇게 이용하라고 내줘도 들은 체도 안 하더니 처음으로 내 배경을 이용하는구나 하고.”
“…….”
“왜 정혁이가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네.”
윤수가 재미있다는 듯 퍽 웃음을 터트렸다.
“그 녀석 눈총받기는 싫으니 내 힌트는 여기까지 주는 걸로 하지요. 이 집안 어딘가에 있을 테니, 잘 찾아봐요.”
“…….”
“그리고 은서 양.”
자리에서 일어나던 윤수가 덩달아 일어나는 은서를 불러 세웠다.
“가끔은 답답해도 그러려니 해 줘요, 저래 봬도 속은 따뜻하고 다정한 녀석이야.”
그는 정혁을 잘 부탁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갔다.
·
“회장님이 이상한 말씀 안 하셨죠?”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자리에 또 다른 태풍이 들이닥쳤다.
윤수가 남긴 말들을 다 소화해내지도 못했는데, 윤수와 바통터치를 한 도훈이 곧장 집으로 올라온 탓이었다.
“딱히…….”
“은서 씨!”
도훈이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절박한 눈을 했다.
“회장님이 무슨 소리를 했든 정혁이 안 버릴 거죠?”
“……네? 버리……다뇨?”
주춤 물러선 은서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서 씨 나랑 약속했잖아요. 정혁이한테 잘해주기로. 잊은 거 아니죠?”
“제가 언제…….”
“우리 그때! 탕비실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그날, 도훈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정혁에게 향하는 마음을 묻어두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제가 하정혁 씨 옆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덩달아 갸웃거리던 도훈이 뒤늦게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아니, 그 말이 어떻게 그렇게 들려요? 난 잘 부탁한다는 뜻이었는데?”
정말 억울했는지 도훈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휘었다.
“은서 씨, 사람이 왜 그렇게 비관적이에요?”
“……네?”
난데없는 공격에 은서가 헛숨을 터트렸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뭐라고, 무슨 자격으로 두 사람 사이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겠어요, 안 그래요? 그냥 내 친구니까 짠한 마음에 은서 씨한테 잘 좀 부탁한다고 청탁, 그래! 청탁한 거죠!”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닌걸요?”
“허? 그럼 둘이 대체 무슨 사이인데요?”
은서가 저도 모르게 변명처럼 뱉은 말에 도훈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냐면…….
“하정혁이 삽질하고 있는 이유를 알겠네. 여태 한집에 살면서 그런 이야기도 안 나누고 뭐 했나 몰라. 그것도 매일 24시간 붙어 있으면서.”
도훈이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은서 씨.”
도훈이 진중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하정혁이 무슨 생각으로, 왜 은서 씨를 이 집에 들였을 것 같아요?”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정혁이 한 해 굴리는 자금이 얼마인 줄 알아요? 걔의 1분 1초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정도 될 것 같아요?”
“…….”
“물론 돈으로 재단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은서 씨. 하지만, 하정혁이 그 모든 걸 뒤로하면서까지 은서씨에게 매달린 이유가 뭘까요.”
은서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서운 거 이해해요. 하지만, 은서 씨.”
“…….”
“이제는 믿을 만한 놈이라는 거, 잘 알잖아요.”
안다.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까 혼자 판단하지 말고 꼭 정혁이랑 이야기 나눠요.”
도훈이 은서를 어르듯 부드럽게 설득해 왔다.
“난 분명히 말했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은서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쓰나미가 지나가고 혼자 남은 은서는 어쩌지 못하고 거실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래, 그림.’
복잡한 생각을 잠시 멈춘 은서는 윤수가 말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럼 뭔가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
은서는 정혁의 방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통로 뒤편으로 몇 개의 방이 더 있는 건 알지만 가 본 적은 없었다.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하긴 했으니까.’
그가 했던 말이니 돌아봐도 괜찮겠지.
스스로 다독이며 은서는 차례로 방문을 열었다. 그렇게 몇 군데의 빈방을 본 은서가 마지막 문으로 향했다.
앞선 방과는 달리 문을 열자마자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소파가 보였다.
소파로 걸어가던 은서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소파가 마주 보고 있는 벽면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
은서는 홀린 듯이 그림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못 알아 볼 리 없었다.
황량한 광야 한가운데 수놓아진 하늘을 찌를 듯한 사이프러스 나무들.
이건, 제가 그린 그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