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정혁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다급함이 묻어나지 않도록 꾹 누르며 꺼낸 말이었다.
그러자 희미하게 미소지은 은서가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진작 나갔어야 했었는데, 지금도 많이 늦었어요.”
“다시 그 집으로 갈 건 아니잖아.”
은서가 살던 집에는 민경미와 그녀의 딸이 있었다.
경미가 시작한 사실혼 확인 소송은 은서의 제안이었다. 은서는 제가 증인으로 나서는 한 법은 무조건 경미의 손을 들어줄 거라며 경미를 움직였다.
끈 떨어진 연이라고 해도 엄연히 정치판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이였다. 그런 중훈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생기는 거였다.
경미는 은서의 제안을 신나서 받아들였다. 물론 중훈이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이 환수될 거란 사실은 굳이 알리지 않았지만.
은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경미가 그 집에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수영의 고통과 제 상처로 얼룩진 집이라 다시는 발 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갈 곳을 알아보고 천천히 움직여.”
정혁은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키는 대신 제 말이 배려처럼 들리길 바랐다.
은서가 상처를 딛고 일어서길 누구 보다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와 헤어질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엄마가 살던 집이 있대요.”
“…….”
정혁의 입가가 굳었다.
“윤 교수님이 먼저 말 꺼내셨어요. 엄마가 가장 마지막에 살던 집인데, 원하면 들어가 살아도 좋고, 처분해도 좋다고.”
“왜 내게는…….”
말하지 않았냐고, 의논할 수 있었지 않냐고. 정혁은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애써 참아왔는데 여기서 조급함을 드러내 은서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부 하정혁 씨의 도움만 받았는데, 그런 것까지 하정혁 씨에게 바라면 내가 너무 뻔뻔한 거잖아요.”
강탈자는 정혁이 아니라 저였다.
그도 저와의 시간을 즐기는 거니 괜찮다며 눈을 감고 그가 내민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저 쾌락만 좇는 관계라고 정의내렸지만 정혁이 제게 준 건 쾌락만이 아니었다.
그는 제게 숨 쉴 곳을 만들어 주었고, 안정감을 주었으며, 버틸 힘을 키워주었다.
저 혼자 허우적대고 있던 진창에 기꺼이 발을 들인 그는 진흙투성이인 자신을 망설임 없이 안아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
정혁이 말한 대로, 그가 저를 위해 만들어 놓은 세상 안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만 하면 됐다.
중훈의 불법 행위에 대한 증거를 모아 놓은 것도, 검찰에 협력해 판을 키운 것도 전부 그였다.
“그런 거 상관없다고 했잖아.”
은서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힌 정혁을 보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내가…… 내가 싫어서 그랬어요.”
그런 정혁에게 저는 줄 것이 없었다.
어느새 조금씩 키워버린 마음 하나밖에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아마, 사랑하는 것 같다고.
이제 와 그렇게 말한들 진심으로 그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은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도훈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에, 이런 것까지 안 해도 돼요 은서 씨.”
탕비실의 커피 머신을 청소하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도훈이 그녀를 막았다.
“아뇨, 흉내만 내는 건데요. 이런 것도 안 하면 하루종일 심심하기도 하고요.”
“정혁이 일하는 거 구경하면 되죠.”
“……그게 더 방해하는 거 아닐까요?”
“하긴.”
도훈이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
“음? 편히 이야기해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죠?”
“음?”
“아무래도 하정혁 씨가 계속 집에 있었으니까요…….”
“아.”
작게 탄식한 도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죄송해요.”
“은서 씨가 미안할 일은 아니죠. 전부 저 자식 고집 때문이니까.”
“…….”
“은서 씨.”
“……네.”
“정혁이가…… 은서 씨 많이 생각하는 거 알죠?”
“네.”
“이래 봬도 친구라서, 나는 저 녀석이 행복했으면 좋겠거든요. 언젠가는 따뜻하고 평안한 그런 가족을 만들었으면 싶기도 하고요.”
“…….”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네.”
도훈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는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안쓰럽다는 연민의 감정으로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한 남자다.
그런 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한다면, 그가 동정으로 자신을 받아줄 것 같았다.
은서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하정혁 씨한테 더이상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그래요.”
“…….”
정혁의 입술이 어름거리다 다물렸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 그녀는 어느새 단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건드리면 부서질 듯, 깨질 것처럼 유약하던 차은서는 없었다.
정혁은 침음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를 막을 권한 같은 거, 제게는 없었다.
“그래.”
“…….”
“알겠어.”
“음…… 하정혁 씨.”
고민하던 은서가 정혁을 바라보며 뜸을 들였다.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연기할 이유도 없으니까, 굳이 나올 필요 없겠지.”
“……그렇겠죠?”
아쉬움에 입술을 말아물었다 뗀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내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
“혼자 갈 수 있…….”
“기다려.”
“…….”
이것만큼은 양보하지 않을 듯, 단호한 눈빛이었다.
“그럴게요.”
은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정도의 욕심은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지막이니까.
*
정혁과 헤어져 침실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꺼내 침대에 누웠다.
늘상 해오던 일인데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추운 겨울에 들어왔는데 계절은 어느새 봄을 지나고 있으니 꽤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은서는 웅크렸던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누웠다.
오늘따라 커다란 침대가 유난히 허전했다.
눈을 뜨면 항상 정혁이 있던 자리였다.
언젠가부터 그는 이 방에서 함께 자지 않았다.
아마, 제가 그에게 안기지 않기 시작한 이후였던 것 같다.
덩그러니 빈 자리를 보던 은서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래, 지금껏 그 앞에서 제정신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었나.
처음부터 정상이 아니었던 관계였는데.
한 번.
단 한 번이면 족했다.
은서는 제 베개를 끌어안고 방을 나서 거실을 가로질렀다.
바로 반대편에 그의 또 다른 침실이 있었다.
방문 앞에 선 은서는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들겼다.
“…….”
벌써 잠들었는지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두드릴까 고민하다가 돌아서려던 때,
“차은서?”
문이 열렸다.
막 샤워를 마친 건지 편한 면바지만 걸친 그의 머리엔 물기가 살짝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몸에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떨어트렸다.
“왜, 잠이 안 와?”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같이 자도 돼요?”
그래서 용기가 생겼다.
“…….”
“정말 순수하게, 잠만, 잠만 잔다고요.”
“……들어와.”
정혁이 몸을 틀어 길을 터주었다.
은서는 혹시라도 그의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러 발을 들였다.
·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정자세로 누워 눈만 끔뻑이는데 정혁이 퍽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긴장했다고 그래요.”
“거울 보여 줘?”
“아, 진짜.”
은서가 증명하듯 정혁 쪽으로 휙 몸을 돌려 누웠다.
“…….”
그리고 정혁과 눈이 마주쳤다.
모로 누워 머리를 받치고 있던 그가 은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예뻐서?”
“……놀리는 것 같아요, 하정혁 씨가 그렇게 말하면.”
“칭찬을 해도. 넌 날 가끔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이상하죠. 하정혁 씨, 이상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어디가?”
반 박자 늦게 나오는 걸 보니 그는 진심으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불을 끌어 올려 눈만 내놓은 은서가 정혁을 빤히 쳐다봤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끝내주는 여대생이 원나잇 하자고 꼬셨는데 수영장에 던져 버렸잖아요.”
“그건…….”
정혁이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를 만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놓고 계속 찾아와서 사람 곤란하게 만들고.”
“…….”
할 말을 찾는 듯 정혁의 눈동자가 옆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게 보였다.
“……고마워요.”
은서는 풋 웃음을 터트리며 속삭였다.
웃음소리를 들은 그가 손을 뻗어 왔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이불을 천천히 끌어내린 탓에 숨겨두었던 얼굴이 드러났다.
“……정말 고마워요, 하정혁 씨.”
“…….”
“하정혁 씨가 이상한 사람이라서, 내 이상한 사춘기를 모른 체하지 않아줘서, 다행이었어요.”
정혁의 눈동자가 제게 닿는 걸 본 은서가 예쁘게 웃었다.
“그날, 하정혁 씨를 만난데 내 인생의 행운을 다 갖다 썼을 거예요.”
“차은서…….”
“고맙다는 말, 꼭 하고 싶었어요.”
“…….”
“잘 자요.”
쑥스러워진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은서는 몸을 다시 바로 했다.
그리고 이불을 다시 끌어 올린 뒤 눈을 감았다.
“차은서.”
머리 위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가끔은 연락해.”
“…….”
“기다릴 테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마 오늘 밤은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
“생각해 보니 가져갈 것도 없네.”
정혁이 출근하고 혼자 남은 은서는 짐이나 싸둘까 싶어 드레스룸을 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전부 정혁이 준 것이었다.
들고 가기도, 두고 가기도 애매했다.
“일단, 그냥 있자.”
막 거실로 향하던 때였다.
초인종이 울리며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지?”
경계심을 가지고 다가가자 도훈의 얼굴이 화면에 커다랗게 잡혔다.
“잠시만요.”
안심한 은서가 현관문을 열어주었을 때였다.
“은서 씨.”
곤란한 미소를 띤 도훈이 몸을 슬쩍 옆으로 비켰다.
“…….”
그의 곁에 있는 남자를 본 은서가 의아해하는 사이,
“반가워요. 난 황윤수라고, 정혁이 외숙부입니다. 혼자 있는데 미안하지만, 실례 좀 할게요.”
“!”
껄껄 웃으며 양해를 구한 남자가 도훈을 앞세워 집으로 밀고 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