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68화 (68/82)

68.

“이게 무슨……!”

대기실에서 녹취록을 확인한 중훈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의원님,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설명해 주시면…….”

중훈의 분노와는 상관없이 옆에 있던 참모진들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다 들킬 마당에 중훈이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친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딸 바보에 떠나간 아내를 지금껏 그리워해 재가도 하지 않은 이미지로 구축해 놓은 것이 모두 물거품이 돼버리는 거였다.

“잠깐 혼자 있게 해주겠습니까. 지금 놀라서 그러네. 자네는 남게.”

참모진을 모두 물린 중훈이 입고 있던 당 재킷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차은서, 당장 내 앞에 데려와!”

씩씩대던 중훈이 혼자 남은 보좌관을 향해 호통쳤다.

보좌관이 막 문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들겼다.

당황한 보좌관이 뒤로 물러서자 문이 벌컥 열리고 참모진이 다시 쏟아져 들어왔다.

“의원님! 큰일 났습니다.”

“!”

이번엔 또 무슨……!

중훈이 사색이 된 얼굴들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거, 검찰에서!”

다음 말을 들은 중훈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속보입니다. 한우리당 차중훈 의원에 대해 검찰이 구속 영장을 청구했습니다. 불법 정치자금 혐의로……]

누군가 튼 뉴스 내용이 커다랗게 흘러나왔다.

*

[검찰, 한우리당 차중훈 의원에 대한 영장실질심사 거쳐 구속영장발부]

“자택에서 구속된 차중훈 의원이 동부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차 의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전면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검찰이 차 의원에게 직권남용, 뇌물 수수, 횡령 등 5개 안팎의 혐의를 추가 기소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차기 대통령으로 점쳐졌던 정치인이었던 만큼 중훈의 이야기는 매일같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한 달이 지나 다른 이슈로 중훈의 이야기가 덮일 때쯤 또 다른 기사가 속보로 나왔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구속 중인 차중훈 의원이 또다시 소송에 휘말렸습니다. 이번에는 개인 가정사가 문제가 됐습니다.”

“소송 당사자인 A 씨는 자신이 6년간 차 의원과 사실혼 관계였다는 걸 인정해달라는 사실혼 확인 소송을 냈습니다.”

그나마 중훈의 무죄를 주장하며 석방을 외치던 목소리도 조금씩 사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중훈은 이제 버리는 패였다.

“한우리당은 차중훈 의원을 경선 후보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 당에서는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행실로 국민에게 심려를 끼치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 드리지 않고자…….”

실시간으로 새로운 뉴스가 떴다.

“사실상 차기 대선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언론이 중훈의 정치 생명이 끝이라고 일제히 입을 모으고 있었다.

“물론 몇 년 후에 어떻게 재기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차 의원의 경우 지지세력이 튼튼한 편은 아니기에…….”

*

“…….”

“…….”

은서는 앞에 앉은 중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중훈은 여전히 깔끔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덤덤한 척하려 애쓰지만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고 있다는 게 훤히 보였다.

“기분이 어떠세요?”

“……뭐야?”

“아직 그대로이신 걸 보니, 잘 지내신 것 같네요.”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냐. 응?”

중훈의 불안한 눈동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면회자가 은서라는 사실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면회에 응했지만, 중훈은 은서의 텅 빈 눈동자를 보며 썩 긍정적인 이야기를 듣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마치 그녀의 눈빛은 모르는 사람을 보는 듯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당장이라도 호통치고 싶은 걸 참으며 중훈이 은서를 노려보았다.

만약 이곳까지 찾아온 은서가 행여 이상한 말이라도 할 경우 곤란해지는 건 저였다.

아직 재판은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았고, 은서와 나누는 대화는 자칫하면 제게 불리한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궁금했어요, 아버지가 지금 어떤 느낌이실지.”

입술을 말아 문 중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은서를 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들어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거든 중간에 끊을 심산이었다.

“그대로 돌려받으시니 어떻던가요.”

“무슨 소리야.”

“새엄마도, 친구도, 모두 아버지가 만들어 주셨잖아요. 남편도 만들어 주실 뻔했죠, 제 인생도 직접 정해 주시려 했고요.”

“이상한 소리 할 거면 그만……!”

“감사해서 저도 똑같이 돌려드렸어요. 아버지가 제게 하신 것처럼요.”

은서가 중훈의 말을 잘랐다.

“저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하셨죠?”

중훈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말도 똑같이 돌려드릴게요. 전부 아버지를 위한 거예요. 올라가신 자리가 높을수록 그만큼 무너질 때 더 아플 테니까요. 걱정이 돼 미리 제자리로 돌아오실 수 있게끔 해드렸어요.”

“이, 이……!”

"이렇게 쉬울 줄 알았더라면 진작 하는 거였는데."

모든 상황이 은서의 짓이었다는 걸 확신하게 된 중훈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중훈의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보며 은서가 할 말을 마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뵐 일은 없을 거예요.”

은서가 중훈 쪽으로 슥 몸을 기울였다.

중훈이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휘어잡고 싶은 사람처럼 은서를 올려다봤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거든요.”

은서는 그런 중훈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제가…… 누구 딸인지.”

“!”

“그동안 감사했어요.”

“차, 차은서!”

덜커덩, 중훈이 벌떡 일어서며 의자가 쓰러졌다.

포효하듯 악을 지르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은서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니 그는 아직까지도 진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은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저는…… 누구의 딸인가요?”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떨림을 숨기며 물었던 질문이었다.

“나하고 네 엄마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어.”

“…….”

“그래, 수영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러울 짓 같은 거 하지 않았다. 맹세코.”

“그럼 대체 왜, 그날 저는 분명히…….”

“그게 수영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을 거다.”

“…….”

“의심의 싹이 피었어도 차마 제 손으로 확인할 자신이 없었을 거다. 만약 자기 딸이 아니라는 걸 제 눈으로 확인한다면, 그 모멸감을 견딜 자신이 없었을 테니까.”

“…….”

“네겐 미안하다만…… 그런 인간이야.”

수일의 말이 맞았다.

다행이었다. 중훈이 저런 사람이라서.

사랑하고 사랑했던 엄마, 수영을 더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돼서.

수영의 죄의 결과라 여기며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필요가 없어져서.

수영을 대신해 그녀의 죄를 중훈에게 갚을 필요가 없어져서.

아무 죄책감 없이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돌아설 수 있어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서…….

그가 제 친아버지라서 오히려 버릴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은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중훈을 위해 흘려 줄 눈물 같은 건 없었다.

·

기자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구치소를 빠져나온 은서는 근처의 공영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자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은서는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멀리, 오도카니 솟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도 은서를 보고는 멈칫하다가 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은서는 그대로 달려가 남자의 앞에 섰다.

“…….”

마주 본 채 정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은서도 그를 보며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차은서.”

먼저 입을 연 건 정혁이었다.

“안아줄까?”

“…….”

그리 물은 정혁이 팔을 활짝 벌렸다.

잠시 그 품을 보던 은서는 쓰러지듯 다가가 그의 허리를 안았다.

단단한 팔이 은서를 휘감고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다 끝났어요.”

“그래, 다 끝났어.”

“…….”

“수고했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어쩐지 눈물이 났다.

“흑.”

중훈 앞에서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구치소를 나와 걸어오는 동안에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었다.

그런데 정혁을 보고, 그의 품에 안기고,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엉엉, 어린 애처럼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흐르는 눈물이 그의 셔츠를 적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었다.

놓지 않을 듯 꽉 안은 그의 힘에 안도하며, 울어버렸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가 저를 두고 집을 나가던 날도 떠올랐다.

변해버린 아빠를 보며 무서워하면서도, 아빠마저 제 딸이 아니라고 버리면 어떻게 하나 무서워했던 것이 생각났다.

중훈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그의 억압에 참고, 견디고, 죽은 듯 사는 데 익숙해졌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사랑한다고 말하던 엄마의 얼굴이 생각났고, 그녀가 겪었을 고통이 그려졌다.

그 모든 걸 거쳐……

그녀는 오늘 제게 남은 단 한 명의 가족을 제 손으로 직접 끊어냈다.

끔찍하고…… 서글픈 이별이었다.

*

“깼어?”

“……눈이 안 떠져요.”

“그럴 만도 해. 퉁퉁 부었거든.”

“어으…….”

은서가 손을 들어 제 눈을 덮어 가렸다.

정혁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쓰러져 잤다.

한참을 울다가 바로 잤으니 제 몰골이 어떨지 상상이 됐다.

“이제 와서 가려서 뭐 해. 다 봤는데.”

“못 본 체해주면 안 되나…….”

“괜찮아, 나름대로 귀엽네.”

“아하하…… 칭찬 고맙네요.”

“진짠데.”

정혁이 장난치듯 은서의 손을 떼어낸 뒤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웃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거예요.”

“저녁 먹자. 일어나.”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정혁이 은서 옆 침대를 톡톡 두들겼다.

“……네.”

은서는 침실에서 먼저 나가는 정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할 생각이야?”

언제나처럼 은서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혁이 덤덤하게 물었다.

“글쎄요.”

젓가락을 입에 문 은서의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제자리를 찾았다.

“일단은…… 졸업부터 해야겠죠?”

“그래…….”

정혁을 가만히 보던 은서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았다.

“……왜 그래?”

먹다 말고 무게를 잡는 은서에 정혁의 한쪽 눈썹이 올라섰다.

“하정혁 씨.”

“…….”

“저요, 내일 이 집에서 나가려고 해요.”

“…….”

은서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정혁의 상체가 서서히 바로 서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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