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67화 (67/82)

67.

“커피 줄까?”

“아, 고마워요.”

따스한 봄 햇빛을 받으며 창가에 앉아 있던 은서는 정혁이 건넨 머그잔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녀에게 커피를 쥐여주고 곧장 소파로 간 정혁이 TV를 틀었다.

집에서 심심해할 은서를 생각해 처음 제집에 들여놓은 가전제품이었다.

[본격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화두가 되는 건 역시, 한우리당 내 경선이지요?]

시사토론 프로그램이었다.

[네, 상당히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두 후보 모두 화려한 정치 이력을 자랑하는 데다 워낙 지지율이 높다 보니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차 의원은 가정사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중훈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정혁은 채널을 돌리려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괜찮으니까 그냥 봐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은서가 정혁의 손을 저지하며 그의 옆에 앉았다.

[아내를 잃고 지금껏 외동딸을 홀로 키워 온 이야기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런 부분까지 조명이 되면서…….]

은서는 패널들이 중훈에 대해 평가하는 걸 덤덤하게 들으며 뜨거운 커피를 홀짝였다.

경선일까지는 이제 두 달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요즘도 만나요?”

은서가 커피를 홀짝이며 지나가듯 물었다.

“아니, 이제 직접 만나기에는 부담스러운 입장이 됐으니까.”

상대방 진영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정혁을 만났다가 어떤 식으로 정치 공작이 들어 올지 모르니 중훈은 더이상 어쩌지 못하고 몸을 사렸다.

“그래도 연락은 한 번씩 와.”

“노골적이네요.”

은서가 코웃음 쳤다.

“적당히 잘 피하고 있어, 미래의 장인어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예비사위 노릇하면서.”

“……놀리지 마요.”

등받이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괸 정혁이 은서를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잊지 않았죠? 더이상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거. 하정혁 씨가 곤란해지는 상황이 오는 건 절대 안 돼요.”

이미 모든 판이 정혁의 손에 짜여진 거였다.

은서가 마음을 먹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제가 준비해 온 모든 것을 은서에게 넘겨주었다.

은서가 한 거라곤, 마음을 결심하는 것뿐이었다.

제가 했어야 할 일을 전부 정혁의 손으로 했는데, 그가 여기서 더 나서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알아. 1원 한 푼 주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앞으로는 전면에 나서지도 말고요.”

“명심할게.”

정혁이 제 걱정을 하는 은서의 코를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은서게 제게 부탁한 역할은 간단했다.

은서를 좋아해서, 간도 쓸개도 다 줄 수 있을 것처럼 굴 돼 아무것도 내주지 않아서 중훈이 안달 나게끔 굴 것.

실제로 중훈은 대놓고 윤수를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슬슬 에둘러 그와 연결해달라는 표현을 하고 있었다.

정혁이 중훈과 밀당을 하는 동안 은서는 진짜 비서처럼 매일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을 하며 때를 기다렸다.

처음엔 중훈을 계속 속이기 위한 연기였지만 어쩌다 보니 도훈의 일을 돕기도 하면서 정말 비서처럼 지내고 있었다.

“내일인가.”

발목을 무릎 위에 걸친 정혁이 낮게 읊조렸다.

“네.”

“떨려?”

“……아뇨.”

“기분은.”

“생각보다 괜찮아요.”

“……후회돼?”

“……할 것 같아요?”

“잊고 있었네, 참. 차은서는 후회 따위 모르는 사람이었지.”

“놀리지는 말고요.”

“자.”

정혁이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밀었다.

“행운을 빌어, 차은서.”

“……고마워요.”

은서가 가볍게 제 잔을 가져가 부딪쳤다.

*

시작은 한 대형 언론사에서 기사를 올리는 것이 신호였다.

[차중훈 의원의 수상한 낚시터 만남?]

포털 사이트 메인에 뜬 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한우리당 경선 후보 차중훈 의원의 불법 정치자금 의혹이 제기되었다. 익명의 제보자는 최근 차 의원이 출처를 알 수 없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왔다고 밝혔다. 자금 조달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경기도 근교의 한 낚시터에서…….]

함께 올라 온 기사에는 낚시터로 들어가는 남자의 사진이 각각 찍혀 있었고, 한 명이 앉아 있던 자리에 짐을 두고 떠나면 다른 남자가 나타나 그 자리에 앉아 낚시를 즐기다가 옆에 놓인 가방을 챙겨 떠나는 방식이었다.

기사는 들불처럼 번져 나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

“차 의원님! 기사 내용이 사실입니까?”

“불법 정치자금 의혹을 받고 계신데 한 말씀 해주십시오!”

“당 경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선거 운동을 위해 나서던 중훈은 차에 오르려다가 몸을 돌렸다.

위풍당당하게 선 그는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카메라와 기자들의 눈을 하나하나 똑바로 짚어가며 응시했다.

“낚시터에 가서 확인은 해 보시고들 찾아온 겁니까?”

“그 질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자세히 좀 말씀해주세요!”

“제가 무너지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데,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만.”

“의원님, 그럼 정치적 공작이라는 말씀이신가요?”

“한마디만 더 해주세요!”

시끄럽게 뒤를 따르는 기자들을 두고 중훈을 태운 자동차는 사라졌다.

·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뒷좌석에 앉은 중훈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씩씩댔다.

낚시터에 함께 찍힌 남자는 순규였다.

다른 사람도 못 믿어 둘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보좌관조차도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사진 다시 줘 봐.”

명령하자 보좌관이 태블릿 PC를 넘겼다.

기사에 나온 사진은 악질적으로 중훈만을 노리고 찍은 사진이었다.

순규는 누군지도 알아볼 수 없게끔 각도가 애매한 사진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친다 이거지.”

어차피 의혹을 제기해도 같이 죽자고 덤벼들지 않는 한 중훈이 밝히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노린 짓이었다.

순규가 진즉 상대방 쪽으로 갈아탄 걸 알고 있는 중훈은 괘씸했다.

·

“퀵 서비스입니다.”

“여기…….”

교회 근처의 CCTV 사각지대.

헬멧을 쓴 남자는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곧장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졌다.

“허허.”

남자가 사라지자 순규는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방금 재유에서 중훈에게로 넘어간 정치자금 기록을 보낸 거였다.

아침에 올라 온 기사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저에게 접근 해 온 정체불명 남자의 예고대로 다행히 제 모습은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교묘한 각도였다.

그가 순규를 숨겨주는 조건은 하나였다.

다른 것들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오로지 중훈이 받아 온 자금 리스트를 전달하라는 것.

재유의 입장을 생각해서 버티니 그는 곧장 중훈과 순규가 돈을 주고받는 사진을 보내왔다.

공개된다면 빼도 박도 못하고 중훈과 함께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니야, 죽으라는 법은 없지.”

순규가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재유고 뭐고, 일단은 제가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제가 쥐고 있는 건 재유 하나만은 아니었으니까.

*

[차 의원을 향한 정치 공작?]

[차 의원, 자진 사퇴론 대두!]

며칠 내내 언론과 대중은 반으로 갈려 다양한 반응을 쏟아 냈다.

-정치인은 낚시도 하면 안 되냐?

-이건 명백한 조작이다!

추가로 나오는 내용이 없자 점점 중훈에 대한 비판은 옅어지고 정치 공작의 일환으로 굳어지는 모양새였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구먼.”

식겁했던 중훈은 보좌관의 보고를 들으며 오히려 만족스럽게 웃었다.

“은서는?”

“은서 양은 회사에 착실히 나가고 있습니다.”

“도림 측에서는 아직이고?”

“네, 워낙 그쪽으로는 꼿꼿한 사람이다 보니…….”

“거참…… 어차피 큰 사업 하려면 권력하고 멀리해야 좋을 것이 없을 텐데.”

“그래도 조카에게는 끔찍하다고 합니다. 하 대표를 워낙 아낀다고 하니 은서 양과 진전이 생기면 또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그래, 그렇겠지.”

미리 자금을 더 확보해 놔야 할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림이라도 남겨 둘 것을.

수영의 그림이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의원님, 이제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띠를 두른 중훈이 선거 유세 연설을 하기 위해 나섰다.

당의 기반이 되는 지역에서 진행되는 터라 특히나 중요한 자리였다.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둘 때였다.

·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차중훈이 물러나길 바란다는 세력들은 지금도 이를 갈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리고 있습니다! 그게 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옳소!”

중훈의 유세가 한창 이어가던 때였다.

“……이게 뭐야?”

휴대폰 실시간 검색을 본 당원 하나가 옆 동료를 툭툭 쳤다.

“응?”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보는 화면에는 단어 몇 개가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차중훈 실체]

[차중훈 딸]

[차중훈 정치자금]

[차중훈 교회]

[최 목사]

“녹취록?”

검색어를 눌러 본 당원 하나가 눈을 찌푸리며 파일을 재생시켰다.

그리고 곧 놀라운 대화 내용이 흘러나왔다.

“네가 내 딸이라면, 그럴 의무가 있는 거야.”

“의무요? 제 의무가 대체 뭔데요?”

“너, 네 아비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기는 해?”

“당장 대선이 코앞이야. 네 아비가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건 알기나 하는 거냐? 쯧쯧, 그림이나 그린답시고 까부니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선거는 그냥 하는 줄 알아? 전부 다 돈이다. 자금이 있어야 큰일도 성공적으로 치르는 거라고! 그런데 네가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려? 당장 최 목사한테서 오는 자금줄도 끊기게 생겼……!”

“……자금줄 끊길까 봐 저 결혼시키려는 거였어요? 그 목사 아들이랑?”

“어허. 넌 서운해하는 모양이다만 내가 이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네 아비가 잘 되는 것이 네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거다.”

황급히 볼륨을 줄여보았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후였다.

웅성거림이 점차 커져 나가고 단상 위에 있던 중훈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때쯤……

중훈은 사색이 된 참모진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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