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감사해요, 아버지.”
형교는 떨떠름하게 앞에 앉은 지석과 은서를 번갈아 보았다.
사라졌다던 은서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당혹스러운데 중훈에게 제 소식을 전해달라 부탁해 오는 건 더 당황스러웠다.
지석이 함께 고개를 숙이니 결국 들어주고 만 참이었다.
“자, 이제 설명 좀 해보거라.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버지, 그건 제가…….”
“아니야. 내가 직접 말씀드릴게.”
끼어드는 지석을 가로막은 은서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
“……어때요?”
드레스룸에서 쭈뼛쭈뼛 나온 은서가 정혁을 슬쩍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심코 뒤를 돌았던 정혁은 저도 모르게 굳은 채 말을 잃고 말았다.
“이상해요?”
제게 박힌 딱딱한 시선에 은서가 머쓱하게 웨이브를 넣은 머리끝을 만졌다.
“아니, 안 이상해.”
정혁은 침음하듯 겨우 입을 열었다.
“비서 같아 보여요?”
은서가 어색한 듯 타이트한 블라우스에 하이웨이스트의 펜슬스커트를 입은 제 차림을 한 번 더 훑어내렸다.
끽해야 단정한 원피스가 전부였는데 이렇게 타이트한 정장 차림에 짙은 화장까지 한 건 처음이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하얀 이에 짓뭉개졌다.
“…….”
그녀를 따라 덩달아 시선을 내리게 된 정혁이 외면하듯 급히 눈을 돌렸다.
위험했다.
그녀를 본 순간, 하마터면 그대로 침대에 쓰러뜨릴 뻔했다.
붉은 입술 사이를 벌리고 들어가 헤집어놓고 싶은 욕망이 일렁였다.
‘미쳐가는 건가.’
항상 매달린 건 차은서였는데, 정작 중독된 건 저였던 모양이다.
건강을 회복하며 살이 보기 좋게 오른 몸은 본래의 라인을 찾았지만, 정작 그 후로 정혁이 그녀를 안는 일은 없었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나신이 절로 눈앞에 그려지는데 만질 수 없는 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난잡한 그림이 자꾸만 그려지는 탓에 열기가 허리 아래로 몰리고 있었다.
미간을 짚은 정혁이 평온을 되찾으려 애썼다.
이런 식의 욕정은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타는 듯한 갈증은 차은서를 볼 때만 생기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도, 몸도.
전부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지독한 본능.
“후, 그만 갈까?”
애써 이성을 찾은 정혁이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이런 욕심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차은서 인생에 더없이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순간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
“바쁘신 분을 모시고 식사가 소홀한 것 같습니다.”
“아이고, 무슨 그런 말을. 나야말로 이렇게 응해주어 고맙지요.”
중훈이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강남의 한 한정식 식당.
그는 제 앞에 나란히 앉은 정혁과 은서를 차례로 눈에 담았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그림이었다.
하정혁 옆에 있는 차은서라니.
형교에게 전해 듣자마자 곧장 회사를 찾아본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정혁 대표. 알아보니 겉으로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도림 그룹의 유일한 후계였다.
그런데 은서가 하정혁의 비서로 일을 한다고?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었다.
정혁에 대해 조사를 끝내고 중훈은 곧장 정혁과 만남을 추진했다.
은서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회사로 찾아가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차기 대선 후보로 유력한 제 연락을 일개 기업인이 무시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혁은 더 흔쾌히 수락해 왔다.
그렇게 성사된 자리였다.
“딸 아이를 도와주어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해야겠습니다.”
“고맙긴요.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식당을 뛰쳐나간 은서를 발견한 이가 정혁이였다고 했다.
“막 출발한 참인데 차 비서가 그 앞으로 뛰어들더니 풀썩 쓰러지지 뭡니까. 많이 놀랐습니다.”
“그러셨겠습니다, 미안하군요. 딸 아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아닙니다. 다행히 근처가 저희 도림 재단의 병원이었던지라.”
은서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통에 꼬박 한 달을 병원에 있었다 했다.
제 가족들에게만 허락된 병실을 쓴지라 은서의 입원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던 모양이라며, 정혁이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네왔다.
“그 후에는 마침 제 전임 비서 자리도 비어있고 해서, 제가 같이 일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차 의원님 따님이었다니, 솔직히 놀랐습니다.”
“원래 딸 아이가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아이가 아니다 보니…….”
변명을 덧붙이던 중훈이 슬쩍 은서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정혁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해뒀는지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은서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 없다는 듯 평온하게 제 식사만 이어가고 있었다.
하긴, 몇 달 만에 보는 아비인데도,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던 그녀였다.
“어쨌든 그림만 그리던 아이라 부족할 텐데 걱정입니다.”
“일이야 하면서 배우면 되니까요.”
정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중훈은 흡족한 미소를 숨겼다.
아무리 도의적이었다지만 정혁이 은서를 VIP실에 입원시키고, 돌보고, 제 회사에까지 꽂아 넣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정혁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맛있는데? 좀 먹어 봐.”
“대표님 드세요.”
“난 먹고 있잖아, 차 비서 더 먹으라고.”
몇 달 만에 본 은서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정혁은 더 어른스럽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은서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제 앞에서도 숨기지 못하고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여인에 푹 빠진 사내였다.
“이런. 급한 전화라서,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갑자기 휴대폰을 확인한 정혁이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
탁, 문이 닫히고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 대표와 무슨 사이인 거냐.”
먼저 침묵을 깨뜨린 건 중훈이었다.
은서는 조소를 삼켰다.
그간 어딜 갔었느냐, 뭘 하고 돌아다녔느냐, 내 얼굴에 먹칠해도 유분수지 등등…….
저를 보면 중훈의 입에서 나올 말들을 상상하면서 왔는데 그의 첫 마디는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말이었다.
아니, 사실은 가장 예상했던 반응이기도 했다.
“무슨 사이라뇨. 직장 상사에요.”
“저쪽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은데.”
“…….”
“하 대표 마음을 꽉 잡아라.”
“……아빠. 몇 달 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겨우 그건가요?”
은서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네가 내 딸이라면, 그럴 의무가 있는 거야.”
“의무요? 제 의무가 대체 뭔데요?”
“너, 네 아비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기는 해?”
“…….”
“당장 대선이 코앞이야. 네 아비가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건 알기나 하는 거냐?”
중훈이 어이없다는 듯 타박했다.
“쯧쯧, 그림이나 그린답시고 까부니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
“선거는 그냥 하는 줄 알아? 전부 다 돈이다. 자금이 있어야 큰일도 성공적으로 치르는 거라고! 그런데 네가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려? 당장 최 목사한테서 오는 자금줄도 끊기게 생겼……!”
흥분한 중훈이 버럭 화를 내려다 말고 후우, 긴 숨을 내쉬었다.
“자금줄 끊길까 봐 저 결혼시키려는 거였어요? 그 목사 아들이랑?”
은서가 크게 실망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허.”
중훈이 신소리 말라는 듯 엄한 표정을 지었다.
“넌 서운해하는 모양이다만 내가 이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네 아비가 잘 되는 것이 네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거다.”
중훈은 은서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 최대한 다정하게 어르듯 말했다.
여기서 은서가 또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마지막 보루마저 사라지는 거였다.
은서가 사라지고 순규에게 신뢰를 잃었다.
당내 경선부터 성공적으로 이기려면 순규의 도움이 절실했다.
순규가 물어다 주는 좋은 인맥도 아쉽긴 했지만, 정치 바닥에서 구른 세월만 10년이 넘었다. 그런 건 제 스스로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제일 아쉬운 건 역시 순규를 통해 오는 자금이었다.
정치 자금이 순규를 거쳐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세탁되어 제게 들어오곤 했으니까.
당내 경선 라이벌로 거론되는 인물이 최근 순규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벌써 중훈의 귀에도 들려온 후였다.
정혁을 통해 도림 그룹과 연을 만들 수만 있다면, 훨씬 더 괜찮은 길이 열려 있었다.
“……그 사람하고 결혼하기 싫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들어주지 않은 건 아빠셨어요.”
“쯧쯧, 이리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결혼은 현실이야. 언젠가 내게 고마워할 날이 올 거다.”
“…….”
“어차피 최 목사는 물 건너갔어. 딴말 필요 없다. 마지막 기회야. 하 대표 꽉 잡아.”
“아……!”
반박하려던 은서는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바쁜 건 당연하지요.”
“……안 먹고 있었어? 왜 다 그대로야.”
중훈에게 예의만 차린 정혁이 곧장 은서의 밥그릇을 확인하며 눈을 찌푸렸다.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먼.
그 모습을 보며 중훈은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허, 하정혁 대표라니.’
“잠시…….”
입가를 꾹 눌러 닦은 은서가 자리를 뜨려 하자 정혁의 시선이 느른하게 그 뒤에 달라붙었다.
또 도망치려는 걸까 불안해진 중훈이 붙잡으려 했지만,
“다녀와.”
정혁이 조금 더 빨랐다.
문이 열렸다 닫히고 은서가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에 붙박았던 시선을 떼어낸 정혁이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우리 딸 아이를 많이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중훈이 꿍꿍이를 묻어두고 고마운 척 말을 던졌다.
“티가 많이 났습니까.”
하지만 정혁은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아는 지인의 전시회에 갔다가 따님을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습니까?”
중훈이 놀란 기색을 비쳤다.
“따님이 제 차 앞에 쓰러졌을 때, 솔직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
“저는 그냥 부하 직원 말고, 다른 쪽으로도 아끼고 싶습니다만…….”
중훈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
중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