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65화 (65/82)

65.

“후우우.”

중훈의 서재 앞에 선 경미는 손잡이를 잡으려다 한 번 더 심호흡을 했다.

벌써 몇 번째 하는 일인데도 긴장감에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 말까?’

이러다 들키면…….

중훈이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흘렀다.

그가 화내는 모습을 상상하면 오금이 저릿했다.

‘아니야, 이것도 실패하면 답이 없어.’

경미가 상념을 떨치듯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굳게 다짐한 경미가 문을 열었다.

서재 안은 조용했다.

특이점이 없는지 안을 차분히 훑은 경미는 최대한 다른 물건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었다.

경미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중훈의 책상에서 대각선 방향에 놓인 책장이었다.

경미는 곧장 빽빽하게 꽂힌 책 사이에 있는 두꺼운 사전으로 손을 뻗었다.

책을 펼치자 가운데 뻥 뚫린 공간이 나왔다. 책 제목에 있는 알파벳 모양에 맞춰 구멍을 뚫어 놓아 그곳으로 카메라 렌즈가 향하게 한 거였다.

일부러 꺼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미세한 구멍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소형 카메라를 바꿔 넣고 다시 제 자리에 넣어둔 경미는 곧장 책상 밑바닥으로 기어갔다.

책상 나사 쪽, 일부러 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을 곳에 붙여 놓았던 소형 녹음기도 손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서둘러 떼어내 새로 붙인 경미는 마무리까지 확인하고서 후다닥 방을 빠져 나왔다.

“후하.”

거실까지 후다닥 달려 나간 경미가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서재에 있는 동안 숨도 제대로 못 쉬었더니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쾅거렸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전자기기를 꺼내 손아귀에 넣고 움켜쥐었다. 이젠 이 작은 기기가 제 생명줄이자 동아줄이었다.

경미는 중훈이 들어오는 게 보일 만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어휴, 내가 어쩌다가…….”

투덜거리면서도 경미는 얌전히 이어폰을 꽂고 녹음기를 재생시켰다.

특별한 대화 내용이나,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은서에게 전하기로 약속한 탓이었다.

은서를 집으로 데려가려다 실패하고 모든 걸 들켰던 그 날.

회사 대표라는 남자는 거래를 빙자한 협박을 해 왔다.

그의 제안에 응하고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중훈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까 계속 고민이 됐다.

중훈에게 들인 공이 있다 보니 쉽게 버리고 갈아탈 확신이 없었다.

“고민되시나요.”

그때 생각을 정하게 한 건 며칠 뒤 다시 만나게 된 은서였다.

감정 없는 차가운 인형 같은 표정을 지은 은서는 제게 충격적인 말을 전해줬다.

“호적에 올려준다는 거,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어요. 그럴 생각도 없었고 제가 결혼하는 즉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쫓겨나셨을 거예요.”

“거, 거짓말! 나한테 화 나서 거짓말하는 거지.”

“제가 뭐하러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사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6년 동안 바로 옆에서 지켜보셨으니까요. 사랑하는 척하면서.”

“…….”

“교회에서 만났다고 하셨죠?”

게다가 은서는 더 놀라운 사실을 전해줬다.

“그럼 그분도 아시겠네요, 최순규 목사였던가요.”

“아…… 알기야 알지.”

“이미 민정이에게 들어서 알고 계시겠죠. 제가 맞선 본 것.”

“…….”

“그 목사님 아들과 맞선 보는 자리였어요. 가족을 동반한.”

“!”

“그리고 주말마다 제가 아버지와 누굴 만났는지 아세요?”

그러고 보면 은서와 중훈이 같이 집에 들어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얼마 전에 보셨던, 제 오랜 친구인 지석이네 가족이었어요. 물론 그 자리도 온 가족이 함께하는 맞선 자리였죠.”

그 말을 들을 땐 옆에 있던 민정이 움찔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민정은 제게 닿는 서늘한 은서의 시선에 다시 사선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맞선이라니…….

그제야 지석의 감정이 롤러코스터 타듯 오르내렸던 것이 이해됐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왜 항상 저만 데리고 갔을까요?”

“…….”

“맞아요, 아버지는 아주머니를 그 바운더리에 넣을 생각 같은 거 조금도 없었어요.”

경미와 민정은 동시에 이를 악물었다.

결국 은서의 곁에 맴돌면서 중훈에게 전해주어도 자신들은 중요한 부분에선 제외된 제삼자였던 거다.

“실망하신 눈치네요. 안타깝게도.”

은서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긴 속눈썹을 차분히 내려뜨렸다.

“정확히 뭘 원하세요. 돈인가요? 아니면…… 정말 민정이를 위한 배경인가요.”

여유롭게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녀는 더이상 제가 알던 은서가 아니었다.

“은서야, 나는 있잖니. 그래도 널 진심으로 딸처럼 생각했어, 너도 잘 알잖니? 그 마음을 봐서라도…….”

“네, 그렇죠. 그래서 가끔은 숨 돌릴 기회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기회를 드리는 건 제 감사의 표시에요. 돈과 민정이를 위한 배경. 두 가지 다 가질 수 있게 해드리죠.”

“…….”

은서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좋아요. 앞으로 하셔야 할 일을 알려드릴게요.”

“어, 으응.”

“똑같이 해주세요.”

“으응?”

“내게 했던 것, 그대로 제 아버지께 똑같이 해주시라고요. 지켜보고 제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주세요.”

“어휴, 그런 거 보면 부녀가 맞긴 맞는가 봐.”

민정이 일을 그르칠까 싶었는지, 민정의 미래까지 저당잡고 민정의 손발과 입을 묶은 그녀였다.

은서 앞에서 쥐 죽은 듯 숨도 못 쉬고 있었던 걸 떠올리자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에게 굴종하고 말았던 제가 조금 부끄러웠지만, 돈 앞에 장사가 어딨겠나.

차중훈에게 붙어 있던 6년을 보상받으려면 은서에게라도 고개를 숙이는 게 맞았다.

“차중훈, 이 쓰레기 같은 놈이.”

중훈에게 속았다는 걸 생각하자 화가 났다.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건 따로 있었다.

“나 몰래 그런 일을 벌이고 있었단 말이지?”

은서와의 대화를 곱씹던 경미는 중훈에게 저를 소개해 준 사람을 떠올리자 괘씸해졌다.

·

“네, 최순규입니다.”

-목사님, 저예요.

“아니, 갑자기 어쩐 일로…….”

낯선 번호에 습관처럼 정중하게 전화를 받은 순규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당황했다.

꼬리를 잡히지 않을 루트로 통하고 통해 연락하는 게 약속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전화를 해 오다니.

“이건 말이 틀리잖아요, 이만 끊읍시다.”

-잠시만요, 목사님. 저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제가 너무 마음이 힘들어서 연락 드렸어요.

“그게 무슨…….”

-딸 아이, 그러니까 은서가요. 결혼을 하려는 모양이더라고요.

“…….”

순규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의원을 통해 중훈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 순규는 중훈이 아내를 잃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미리 언질을 받은 후였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눈여겨보던 경미와 계속 부딪치게 했고, 의외로 쉽게 경미는 그 집에 입성했다.

그 이후, 순규는 이따금 경미를 통해 중훈의 동향을 전해 듣곤 했다.

중훈과 딸의 기이한 관계도 그 덕에 이미 알고 있었다.

-맞선을 봤다는데 제겐 말도 안 하고 데려가지도 않았더라고요.

“으음, 그건…….”

그녀는 이제서야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순규 저 자신도 굳이 경미에게 미주알고주알 공유해 줄 이유는 없었다. 경미가 그 정도로 중요한 상대는 아니었다.

순규가 난처해하며 변명하려던 때였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가족이라 했든가…… 아이들끼리 소꿉친구라더라고요.

“……음?”

-동료 검사였나, 어디 부장검사라고 했던 것도 같고.

“그거, 확실한 건가요?”

-은서에게 직접 들었는걸요.

“……은서 양은 요즘 어떻게 지내요?”

-잘 지내요, 그 소꿉친구랑 결혼 준비 때문에 자주 만나는 것 같더라고요. 목사님, 저 이러다 혼주석에도 못 앉는 거 아니겠죠?

“……허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안 그래요?”

-그렇겠죠? 어휴, 죄송해요 목사님 바쁘실 텐데…… 제가 너무 답답해서 그만.

“아닙니다, 이해해요. 힘들 땐 언제든지 또 연락하세요.”

-네, 감사해요. 아시죠? 제가 목사님 많이 믿고 의지하는 거.

“네, 이해합니다.”

-그럼 또 연락 드릴게요.

“그러시죠.”

전화를 끊은 순규의 볼이 떨렸다.

“그럼 그렇지. 이 능구렁이 같은 인간.”

딸 아이 건강 문제라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더니, 몇 달 내내 질질 끌던 이유가 있었던 거다.

앞에서는 제 일을 도와주는 척, 법안을 만들고 준비하면서 뒤에서는 다른 꿍꿍이를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대체 누굴 물었기에 감히 이 몸을 물 먹이는 거지?’

부들부들 떨던 순규가 이마를 짚으며 후, 깊은숨을 내쉬었다.

혹시 몰라 준비하던 차선책이 있던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슬슬 박차를 가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순규가 곧장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

“왜 이렇게 시끄럽나.”

국회로 들어가려던 길목, 차는 움직이질 않고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시민 단체에서 종교인 과세 유예 법안 때문에 시위 중입니다.”

“쯧.”

중훈이 갑갑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은서도 찾아내지 못한 마당에 순규를 잡아두려면 필요한 극단의 조치였다.

‘차은서…….’

벌써 몇 달째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는 그녀를 떠올리며 중훈이 침음했다.

수영이 사라졌던 때의 악몽이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완벽한 인생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대학의 법대에 진학해 한 번에 사법고시를 패스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연수원을 졸업해 누구나 꿈꾼다는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탄탄대로였다.

특히 기업인과 정치인의 비리 게이트를 조사한 뒤로는 스타 검사가 되어 정치권까지 성공적으로 입성했다.

중훈은 수영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검사 시절, 모임에서 우연히 아름답고 재능 있는 미술학도인 수영을 만났다.

쉽게 넘어오리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끝까지 저를 거절했다.

그 사실이 괘씸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기어코 그녀를 가졌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굴던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고 가정에 적응한 듯 보였다.

중훈은 모든 것이 제 계획대로 흘러간다 생각했다.

그랬는데, 홍수영. 그 여자가 제 인생에 흠집을 낼 줄이야.

더이상 제 인생에 흠집이 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어딜 감히.

중훈의 눈이 표독스러워지는데, 진동이 울렸다.

형교였다.

중훈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연락 기다렸네.”

-연락이 많이 늦었네.

“아닐세. 혹시 딸아이 소식 알아낸 게 있나?”

-회사에 다닌다더구먼.

“……회사?”

중훈은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자네 J 인베스트먼트라고 들어봤나.

J 인베스트먼트?

중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

“이거면 된 거냐.”

통화를 마친 형교가 헛숨을 뱉으며 물었다.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은서의 투명한 눈동자가 반짝 빛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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