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은서야.”
먼저 도착해 거실을 서성이던 수일이 다급히 달려와 은서의 앞에 섰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서는 수일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를 만난 곳은 정혁과 종종 들르곤 했던 그의 집 중 하나였다.
“아니다. 연락해줘서 고맙다.”
은서의 상태를 살피던 수일은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아직 안전을 기해야 할 것 같아, 굳이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그래요, 나도 지인이 있어 종종 들르는 곳이라 마침 잘 됐다 싶었습니다.”
수일은 은서 뒤에 보디가드처럼 서 있는 정혁을 보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가 저를 찾아와 은서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처음에는 경계심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고는 하늘에 운명을 맡기듯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며 수영의 중요한 흔적들까지 그를 믿고 넘겼다.
“사실, 며칠 전에 차 의원이 날 찾아왔었거든.”
수일의 말에 정혁의 눈이 날카로워졌고, 은서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네, 그럼 대화 나누시죠.”
“……어디 가요?”
자리를 피해주려던 정혁은 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을 보곤 은서를 쳐다봤다.
“옆에 있어요.”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일이 미소를 머금었다.
결국 마주 앉은 세 사람 사이로 따뜻한 찻잔이 놓였다.
‘이 집에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네.’
은서가 찻잔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엉뚱한 생각을 하는 제가 낯설었다.
하긴, 어릴 때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날 만나려 한 건, 전부 알았다는 뜻이겠구나.”
미소를 지운 은서가 고개를 들어 수일을 마주 봤다.
“……많이 놀랐겠구나.”
수일이 착잡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평생 후회했단다.”
그의 눈동자가 금세 붉어졌다.
“네 엄마가 결혼하게 됐다며 날 찾아왔던 날, 붙잡았어야 했어.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뛰어난 재능으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미술학도였던 수영이, 하필 중훈의 눈에 띈 것이 원흉이었다.
비업 기리를 조사하고 있던 중훈은 그 커넥션 안에 수영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중소기업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을 빌미 삼아 그녀에게 결혼을 종용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네 엄마 말에, 그냥 보내주고 말았다.”
“……엄마의, 마지막은 어땠나요.”
먹먹함을 가라앉히며 은서는 일기장에서도 알 수 없었던 내용을 물었다.
“행복해하면서도 불행했지.”
수일이 씁쓸하게 털어놓았다.
“생의 마지막에서야 그 집을 떠나 자유로워졌지만…….”
“…….”
“결국 널 두고 나왔으니까.”
은서는 떨리는 두 손을 모아 잡았다.
“눈을 감을 때까지 널 그리워했어. 네 걱정만 했단다.”
“…….”
다시금 눈물이 날 것 같아 은서는 입술에 힘을 꾹 주고 참았다.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마지막으로,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저는…… 누구의 딸인가요?”
*
“후우.”
은서와 헤어져 학교로 돌아온 수일은 책상 앞에 앉아 마른 세수를 했다.
스무 살의 해맑았던 수영의 미소가 떠오르고, 결혼을 앞두고 찾아와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얼굴이 연이어 떠올랐다.
“엄마를 도와주신 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게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던 은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영아, 그 인간. 아니. 인간도 되지 못하는 놈은 여전히 찌질하고, 끔찍한 놈이야.”
반성은 조금도 하지 않는 뻔뻔한 얼굴을 떠올리며 수일은 치를 떨었다.
아니,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이나 할까 싶었다.
조금 지나서 어깨를 늘어뜨린 수일은 은서의 곁에 우직하게 버티고 있던 정혁을 생각했다.
“그래도, 네 딸…… 이제는 괜찮을 거야.”
수일이 눈시울을 붉혔다.
늙으니까 눈물만 느는 것 같았다.
수영의 바람대로, 은서는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받으며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일은 은서가 지금 이 시간을 잘 이겨내길 바랐다.
그리고 하정혁, 그 남자가 은서에게 큰 힘이 되어줄 거였다.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수일이 찔끔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내 딸이 행복하게 사는지, 네가 대신 지켜봐 줘.”
이제야 수영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다.
*
“……무슨 생각해.”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던 정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냥…… 이런 저런?”
“…….”
은서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수영이 남긴 걸 본 은서는 제일 먼저 수일을 만나고 싶어했다.
혹시나 그때처럼 울진 않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수일에게 진심을 전했다.
갑자기 성숙해진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하정혁 씨.”
창 밖을 물끄러미 보던 은서가 고개를 돌렸다.
“나 바람 쐬고 싶어요.”
“…….”
“……안 될까요?”
“……어디든 상관 없어?”
“네, 조용한 곳이면 어디든.”
정혁이 망설임없이 핸들을 돌렸다.
·
“와, 예쁘다!”
은서가 하얀 벽돌로 쌓은 주택을 보며 감탄했다.
그가 한참 차를 몰아 온 곳은 경기도 외곽의 숲 깊숙이에 있는 별장이었다.
하얀 벽돌집은 야트막한 산 입구에 홀로 있었지만, 주변이 나무로 가득해 딱히 외로워 보이진 않았다.
정혁이 입구의 철문을 열어 은서가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났는지 은서가 조르르 달려가 잔디밭 위를 춤추듯이 밟았다.
강아지처럼 폴짝대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하긴, 그녀로선 몇 달만의 외출이니 신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은 정혁이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두 팔을 펼치고 한껏 공기를 들이마시는 은서를 보며 정혁이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차르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안에 궁금하네요.”
어느새 곁에 다가온 은서가 눈을 빛냈다.
“…….”
말없이 문을 열어주자 정혁을 힐끗 올려다본 그녀가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예쁘네요.”
먼지가 조금 쌓여 있긴 했지만, 누가 봐도 화목한 가족이 살 것처럼 아늑해 보였다.
정혁이 이런 집도 소유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간 갔던 정혁의 공간은 하나같이 다 삭막할 정도였으니까.
“구경해도 돼요?”
“얼마든지.”
자주 오는 곳인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정혁이 익숙해 보였다.
정혁을 따라가는 대신 거실을 지나쳐 눈에 보이는 좁은 통로로 향했다. 막 들어가려는 찰나, 문득 장식장 위에 놓인 액자 하나가 보였다.
서로에게 다정하게 기댄 중년 부부가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혁의 부모님인듯했다.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은서는 휙 고개를 돌려 사진을 외면했다.
소중한 아들을 붙잡고 이러고 있으니, 정혁의 부모님께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오늘 정혁에게 꺼낼 이야기도 그녀의 죄책감을 키우는 데 한몫을 더했다.
어색해진 은서는 그냥 거실 베란다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섰다.
“마셔.”
금방 따뜻한 차를 내온 그가 맞은 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음…… 있잖아요. 나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원래 그에게 꺼내려 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안 보고 사는 걸로 끝을 낼까.”
찻잔을 쥔 가느다란 손가락이 느리게 부드러운 면을 문질렀다.
“아니면, 엄마가 겪은 고통만큼 돌려주는 게 맞을까…….”
은서가 눈을 내리깔았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봤는데…… 역시 내 손으로 끝맺음하는 게 좋겠더라고요.”
“…….”
“내 손으로 가족을 끌어내리려는 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끔찍하겠죠?”
은서가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슬쩍 긁었다.
“복수극이든, 막장극이든 네가 하고 싶은 거라면 그게 답이야. 망설이지 마.”
그는 오늘도 은서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
“어느 쪽이든 하정혁 씨 도움이 없으면 역시 힘들 것 같더라고요…….”
눈동자만 위로한 은서가 정혁의 눈치를 살폈다.
뻔뻔하다는 건 저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아무리 그가 도와준다고 했다지만, 끝까지 그를 이용하는 거였다.
“말했잖아, 해주겠다고.”
“그렇지만…… 하정혁 씨가 얻는 건 없잖아요.”
은서가 곤란한 기색을 내보였다.
더는 게임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이제 제게는 도망칠 도피처가 있어서는 안 됐다. 그러니 제가 정혁을 유혹할 이유도, 그가 절 안을 이유도 사라졌다.
그렇다고 다시 새로운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와 지금까지처럼 똑같이 조건을 걸고 몸을 섞는다면, 말 그대로 그저 몸뿐인 관계가 될 거였다.
정혁과 언제까지 그런 관계로 남고 싶지 않았다.
하정혁에게 그런 존재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차은서.”
팔짱을 낀 정혁이 삐딱하게 은서를 내려다봤다.
“서운한데?”
“……네?”
“그래도 우리 꽤 가까운 사이 아니었나.”
정혁의 입술 끝이 삐뚜름해졌다.
“그간 착실히 몸의 대화를 쌓아 왔잖아, 우리. 이제는 서로의 몸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을 정도인데.”
“…….”
“어딜 만지면 차은서가 좋아서 신음하는지도 다 알 정도지.”
어쩐지 공기가 더워지는 것 같아 은서는 헛기침했다.
“지, 지금 그런 걸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귀까지 붉어진 은서를 보며 정혁이 쿡 웃음을 흘렸다.
안아달라고 매달릴 땐 언제고,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숙녀처럼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은서를 물끄러미 보던 정혁이 팔짱을 풀고 미소를 지웠다.
“차은서.”
“?”
“난 네게 갚을 빚이 있어.”
“……빚이요?”
“그래, 빚.”
“하정혁 씨가 내게 갚을 빚이 뭐가 있는데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은서의 눈썹이 축 처졌다.
“있어, 그런 게. 그러니까 돌려받는 거라 생각해.”
“……그래도 그건…….”
더 묻지 말라는 듯 단호한 태도에 은서가 말끝을 흐렸다.
“정 마음에 걸린다면.”
정혁이 은서의 말을 잘랐다.
“그림 하나 그려줄래?”
“……그림이요?”
“그래. 오로지 나 하나만 생각하면서 그린 걸로.”
“…….”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
제 그림을 달라 청하는 정혁에게 은서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제가 그리는 그림은 전부, 정혁을 생각하며 그린 것들 뿐이었으니까.
“……알겠어요.”
“좋아, 그럼 이제 차은서의 계획을 들어볼까.”
턱을 괸 정혁이 느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