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사라지는 수영의 얼굴에 벌떡 일어났던 은서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추스르지 못한 서러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엉엉 소리 내 우는 은서를 보며 정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토록 울리려 할 때는 입술을 꾹 깨물고 버티던 은서였다.
마치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울면 안 되는 사람처럼.
그렇게 고집스레 버티던 그녀가 소리 내 울고 있었다.
정혁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내디뎌 바닥에 쓰러진 은서를 부축하고 품에 안았다.
아기를 어르듯 그녀의 고개를 제 가슴에 묻고 그녀의 머리 위에 제 얼굴을 기댔다.
“……그래, 울어.”
가녀린 몸을 떨면서 한껏 서러움을 토해내는 그녀에 정혁은 몇 번이고 쓰디쓴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녀의 고통을 제가 대신 겪을 수 있다면, 차라리 몽땅 뽑아내 제 몸에 심어 버리고 싶었다.
“……차은서.”
……울지 마.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아파하지도 말고.
……웃어.
난 네가 웃었으면 좋겠어.
마음속 진심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
“언제 알았어요?”
은서가 퉁퉁 부은 얼굴로 물었다.
“네가 사라졌을 때.”
은서가 양손으로 쥐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으려 하자 건네받은 정혁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소파에 옆으로 앉아 무릎을 웅크린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렇게 일찍?”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은 은서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락 없이 봐서 미안해.”
그가 먼저 모든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권하는 수일 때문에 불가피하게 열어 본 진실이었다.
정혁이 뒤늦은 사과를 건네자 은서가 그건 문제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이유를 알면서도 은서는 굳이 그에게 묻는 걸 선택했다.
“네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기다렸어.”
그리고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
“내가 만약,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
침묵은 곧 동의였다.
“내가 간다고 하면 보낼 거였어요?”
새삼 다른 것이 궁금해져 물었다.
“내게 널 막을 권리는 없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묶어두고 싶었겠지만.
“그리고 또 내게 도망쳐 오라 했겠지.”
“…….”
이 집에 있는 내내 그는 제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었으며 정복자였다.
함부로 저를 다루면서도 정작 이럴 때는 철저하게 차은서의 의견에 복종하는 자세였다.
이상한 사람.
하지만 그게 정혁다워 은서는 풋, 웃고 말았다.
처음부터 복잡한 관계였고,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사이였다.
“……더 울 줄 알았어.”
은서의 웃음소리에 정혁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요, 이상하게 개운하네요.”
은서가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이렇게 울어 본 게 처음이라서 그럴까. 눈물에 모든 고통이 씻겨 내려가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마음을 확고히 정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계속 진창에 빠진 채 허우적대기만 할 순 없었다.
모든 진실을 알았으니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얼굴 엉망이죠?”
은서가 잔잔하게 웃었다.
“아니, 예뻐.”
“……거짓말.”
“내가 그런 서비스까지 할 사람으로 보이다니. 의외네.”
“진심이라는 말을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은서가 놀리듯 읊조렸다.
“……진심이야, 예뻐.”
“…….”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도와줄게.”
그가 손을 뻗어 은서의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내가 뭘 할 줄 알고요.”
“그게 뭐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하정혁 씨는.”
복잡한 빛을 띤 눈동자가 정혁의 눈을 보며 흔들렸다.
“예뻐서.”
“…….”
“네가 예뻐서, 뭐든 해주고 싶게 만들어.”
콩닥콩닥 뛰던 심장이 그의 말에 점점 속도를 높였다.
“네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
사람을 뒤흔드는 말을 던져 놓은 그는 특유의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이거 봐.
꼭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입술만 어름거리던 은서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허, 이거 참.”
순규가 황당하다는 듯 연신 헛숨을 내뱉었다.
그날 이후 중훈은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 가타부타 진척이 없었다. 벌써 몇 달째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한 달 뒤에는 결혼식이어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별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들을 보며 짜증을 냈다.
“나한테 물으면 내가 뭘 알아요?”
황당하긴 민준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민준은 은서가 튕기는 거라 여겼다.
도도하게 구는 것도 집안의 뜻으로 하는 결혼이니 끽해봐야 초반 기 싸움을 벌이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상견례 자리에서 잠수라니.
“둘이 그래도 몇 번 만났잖아. 대충 보이는 기색이 있었을 거 아냐.”
“아, 몰라요.”
민준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실 은서와 단둘이 만난 건 딱 한 번뿐이었지만 지금 그걸 순규에게 말했다가는 당장 날벼락이 떨어질 거였다.
“사내자식이 기집애 마음 하나 사로잡지를 못 해가지고…….”
“아 왜 내 탓을 하는데!”
“허우대만 멀쩡하게 낳아주면 뭘 해.”
혀를 끌끌 차던 순규가 팔걸이를 툭툭 쳤다.
“하긴. 그냥 고 어린 것이 결혼하기 싫어서 부리는 치기가 아닐 수도 있지.”
순규는 항상 친절한 가면을 쓰고 있는 중훈을 떠올렸다.
능구렁이 같은 그 속내를 누가 알까.
딸의 철부지 행동으로 화살을 돌려놓고 대선자금만 지원받고 입을 씻으려는 걸 수도 있었다.
만약 그가 대선에 성공한다면 지금 제 딸을 내놓은 게 꽤 아쉬울 거였다.
“흥, 그런 거라면 한참 잘못 생각했지.”
아무리 날다 긴다 하는 정치인인들, 돈이 없으면 결국 이빨 빠진 호랑이와 다름없었다.
“칼자루를 쥔 건 이쪽이라는 걸 알아야지.”
순규가 여유롭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대안을 마련해야 하나.”
순규가 음험하게 중얼거렸다.
*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죠.”
-……가능한 겁니까?
“네, 그럼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던졌지만, 순규는 믿지 않는 듯 떨떠름했다.
“아이가 졸업을 앞두고 진로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거기다 결혼을 앞두니 긴장도 됐겠지요.”
-아직 나이가 어리니 그럴 수도 있지요.
“걱정 마십시오, 목사님. 식전에는 회복될 겁니다.”
-글쎄요…… 일단 식사 자리도 그렇게 끝이 나서, 한 번은 다시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가족이 될 사이인데요.
“네, 그렇지요. 아이가 회복되는 대로 다시 자리 만들어 보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중훈은 초조해졌다.
“망할…….”
순규의 도움 없이는 제가 원하는 곳까지 오를 수 없었다.
정치인이란 그런 자리였다. 보는 눈이 많고, 제약이 많은 자리.
누군가 은밀하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원하는 걸 해낼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러니 순규는 제게 꼭 필요한 끈이었다.
어느 정도 법망 외에서 벗어나고 언론의 관심에서 빗겨 나 있는 이.
이제 와 다른 사람을 찾아 이 정도의 관계를 형성하려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질 거였다. 무엇보다 자금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순규에게 들인 공만 해도 7년이었다.
‘이를 어쩐다.’
여전히 은서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서재 안을 왔다 갔다 하던 중훈이 책상 위에 놓은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고도 망설이던 그가 결심한 듯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일세.”
자존심이 상한 듯 중훈의 턱이 일그러졌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네.”
*
“날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직접 여기까지 행차하시다니요.”
자리를 권하지도 않은 수일이 싸늘하게 손님을 응시했다.
교수실 안에 들어선 이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얼굴이었다.
“그래, 나도 그 낯짝 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왜 왔습니까?”
“내 딸 어딨어.”
마치 맡겨 놓은 물건을 찾으러 온 태도에 수일은 어이가 없었다.
몇 달이나 지나 찾아온 걸 보니 정혁이 완벽하게 은서를 보호했구나 싶었다.
헤매고 헤매다 결국 마지막에 찾아온 것이 저라니.
오죽 급했으면.
절로 비웃음이 났다.
“무슨 말씀이시죠?”
수일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다 알고 왔어. 내 딸, 어디로 빼돌렸어?”
“의원님의 따님을 왜 제게서 찾으십니까.”
“말장난하지 마!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중훈이 당장에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왜 이러는지 이유도 모르겠군요.”
수일이 차갑게 응수했다.
“네가 빼돌렸잖아, 그때처럼. 안 그래?”
“……당신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뭐라고?”
중훈의 눈동자가 희번덕였다.
어느 언론에서도 볼 수 없는 그의 이면이었다.
“내가 빼돌렸다고? 그때처럼? 웃기지 마. 수영이는 제 발로 떠난 거야.”
“어디 감히 그 이름을……!”
중훈이 참지 못하고 수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더러운 손 치워.”
수일이 곧장 중훈의 양손을 잡아떼어내 뿌리치곤 옷을 툭툭 털었다.
“당신의 곁에서는 모두가 불행하고 끔찍해지는 가 봅니다. 그 아이도 마찬가지겠지. 수영이처럼 불행해하고 고통스러워하다 제 발로 떠났겠지.”
“뭐, 뭐라고?”
“꺼져, 그 끔찍한 면상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 자식이!”
“목소리 낮추는 게 좋을 텐데. 여기가 학교라는 거 잊었나 봅니다. 듣는 귀가 상당히 많은데 말입니다.”
“……이익.”
“아니면 기자라도 부를까?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난 잃을 게 없거든. 유명 화가 윤수일, 한우리당 차중훈 의원, 불륜 스캔들의 내막.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명심해. 내 딸까지 너한테 내주진 않을 거니까.”
부들대던 중훈이 어쩌지 못하고 돌아섰다.
“찌질한 놈.”
그나마 조금 있던 젊은 날의 총기는 사라지고 탐욕만이 가득해 보였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수일은 참았던 욕설을 뇌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