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그래.”
정혁이 덤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여리고 소중한 차은서가 알을 깨고 나올 순간이 된 모양이었다.
“들어줄게, 얼마든지.”
젖은 날개를 펼친 그녀가 곧 제 곁을 떠나 훨훨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정혁은 그저 다정한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정혁의 도움을 받아 샤워하고, 그의 감시 아닌 감시를 받으며 죽을 먹었다.
굳이 차이를 고르자면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힘없이 비틀거리던 은서가 이제는 제 다리로 버티려 애를 쓴다는 점이었다.
“내가 치울래요.”
제가 먹은 흔적을 말끔하게 정리한 은서가 제 몫의 차와 정혁이 마실 커피를 준비해왔다.
달라진 것이 또 있었다.
티 타임을 가질 때면 항상 옆에 앉던 그녀가 이제 제 앞에 앉아 있는 것이 그랬다.
정혁은 그녀의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잔의 내용물이 반쯤 사라졌을 때.
“나, 더는 이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은서가 입을 열었다.
“노력하지 않을 거예요. 연민을 느끼는 것도 관두기로 했어요.”
잔을 한 번도 들지 않은 정혁이 잠자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아버지니까 외면하고 모른 체했어요. 그 사람이 내게 했던 모든 잘못들.”
씁쓸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이내 서늘해졌다.
“용서하지 않으려고요.”
“……확고한 거야?”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고 탓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확인하듯 제 결심을 한 번 더 물어 올 뿐이었다.
“네. 이제 그 집에서 벗어나려고요.”
그녀의 속내를 가늠하듯 은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정혁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차은서.”
“?”
그가 뭐라고 할까 긴장된 은서가 귀를 쫑긋 세웠다.
“너한테 전해 줄 것이 있어.”
“전해줄…… 거라뇨?”
은서가 경계하듯 미간을 좁혔다.
“그 전에 네게 먼저 물을게.”
“…….”
“이걸 네가 받게 되면, 많은 것이 변할 거야.”
“…….”
“지금까지 네가 살아 온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항상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던 그가, 망설이듯 한 번씩 말을 멈추기도 하면서 조심스레 말을 건네고 있었다.
“어쩌면, 네가 지금껏 마주해 온 힘든 상황들보다 더 괴로울 수도 있어.”
“……뭐길래 그렇게 겁을 주는 거예요?”
“선택은 네 몫이야. 두렵다면 그냥 묻어둬도 괜찮아.”
“……아무것도 선택할 필요 없다면서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언젠가 정혁이 했던 말을 따라 읊으며 은서가 눈을 휘었다.
“하정혁 씨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면서요.”
“그랬지.”
“그런데 왜 이젠 나보고 선택하라고 해요?”
“우리의 게임은 끝났고, 더는 내가 네 세상이 아니니까.”
“…….”
은서의 미소가 사라졌다.
“내가 만들어 준 거 말고, 너 스스로 만들 때니까.”
정혁의 말이 단호한 비수처럼 은서에게 날아와 꽂혔다.
“난 이제 네 세상을 쥐고 흔들지 않을 거야.”
그건 마치, 사형 선고 같기도 했고, 따스한 격려의 포옹 같기도 했다.
“대신.”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숙인 정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
은서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그를 바라봤다.
“난 계속 있는 곳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
“나 믿고.”
그가 씩 웃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쿵쾅대는 심장이 온몸으로 온기를 퍼트렸다.
“……그럼 받을래요. 하정혁 씨가 내게 줘야 한다는 그거.”
어떻게든 살아갈 작정이었다.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저만의 인생을 살고 싶어졌다.
그리고, 자유로운 어른이 될 것이다.
“……이리 와.”
굳게 각오를 다진 은서가 정혁의 뒤를 따랐다.
·
“이건…….”
서재로 은서를 데려간 정혁이 그녀에게 내민 것은 낡은 상자였다.
은서가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정혁을 바라봤으나 책상에 기대 팔짱을 낀 그는 묵묵히 저를 보고만 있었다.
“…….”
그가 더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아 은서는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낡은 노트 몇 권과 DVD가 들어 있었다.
제일 위에 있는 노트를 꺼내 펼쳐 보니 누군가의 일기장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필체를 보며 미간이 깊어진 은서의 눈동자가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그 사람이 또 뺨을 때렸다. 무서운 건, 폭력에 점점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다. 무기력과 우울이 내 영혼을 갉아먹고 그를 향한 분노와 증오가 나를 좀먹어 간다.]
[저녁을 하다 문득, 칼을 보며 섬뜩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죽어 버리면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은서가 그때 울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생각을 그대로 실행했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이 점점 심해진다. 어차피 밖에 나가지 못하는데도, 그의 의심은 끝없이 깊어만 간다. 오늘은 은서가 내 얼굴에 있는 멍을 보며 뭐냐고 물었다. 은서가 커가면 폭력의 흔적을 눈치챌 텐데. 사랑하는 내 아이. 은서만큼은 이런 끔찍한 지옥을 모르게 하고 싶다. 은서의 앞에서 가면을 쓰고 버티는 것도 언제까지 가능할까.]
"......."
수영의 일기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적힌 일기는 전부 은서의 기억과는 달랐다.
온통 끔찍한 결혼생활로 인한 불행한 심리만이 가득했다.
당혹스러워진 은서가 다른 노트를 꺼내 들었다.
믿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부옇던 머릿속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었다.
새로 집어 든 노트는 앞서 보았던 것보다 몇 년 뒤의 것이었다.
[수일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세상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게 돼 기쁘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수일이 잘된 것이 너무 기쁜데 자꾸 눈물이 난다.]
[저녁 뉴스에 수일의 이야기가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게 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 사람이 벨트로 …… 숨을 쉴 수가 없어……]
“!”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충격적인 내용에 은서가 눈을 부비고 다시 들여다봤다.
손이 덜덜 떨려서 은서는 저도 모르게 노트를 떨어트렸다.
미친 거다.
이건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 집안의 어딘가 제가 모르는 곳에서, 제 눈을 가린 곳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다.
“……읽어……봤어요?”
은서가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정혁을 올려다봤다.
“…….”
은서의 눈물을 본 정혁은, 대답하는 대신에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제가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때였다.
“…….”
정혁의 말이 맞았다.
제가 살아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은서는 입술을 깨문 채 일기장을 읽어나갔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읽어야만 했다.
알아야만 했다. 수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녀가 왜 저를 두고 떠나야만 했는지.
그게 그간 수영을 원망해 온 자신에 대한 벌이었고, 혼자 아파해야 했던 엄마에 대한 속죄였다.
어느덧 은서의 눈은 일기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일기를 수일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착한 그는 내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다면 내 청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안다. 내가 수일에게 잔인한 짓을 한다는 걸. 울며 매달리던 그를 외면한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내게 남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수영의 일기를 읽다가 은서는 숨을 멈췄다.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다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암세포는 내 불행과 증오를 자양분 삼아 내 몸에 뿌리를 내리고 서서히 자라난 모양이다. 죽을 날이 다가온다고 하니 오히려 편안하다. 하지만 죽어가는 나를 그 사람은 놔주지 않겠지. 아니, 죽어서까지도. 그러니 나는 마지막 용기를 낼 생각이다. 적어도 내 생의 마지막만큼은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보낼 것이다.]
‘아.’
은서는 마음 깊이 탄식했다.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 이 모든 걸 은서의 침대 아래 숨겨 두던 것도 이젠 끝이다. 가장 편안해야 할 은서의 잠자리를 내 추악한 고통으로 물들이는 것 같아 마음 아팠는데. 아아. 우리 은서, 내 딸. 다만 은서가 걱정이 될 뿐이다.]
그 후 일기는 끝이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죽음을 기꺼워했을까. 은서는 불행과 고통 속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걱정하던 수영의 마음에 결국 오열하고 말았다.
“……아직 봐야 할 것이 남아있어.”
정혁이 그런 은서를 안아 주면서도 다음으로 나아갈 것을 종용했다.
울고 무너지면 그대로 품에 안고 모든 걸 잊게 해주던 때와는 달랐다.
은서를 품에 안은 그는 은서가 아직 보지 못한 DVD를 챙겨 홈시어터가 있는 공간으로 걸어갔다.
아직 울고 있는 은서를 두고 그는 착실하게 DVD를 실행시켰다.
커다란 화면에서 영상이 시작되고 텅 빈 서재가 나왔다.
정혁은 조용히 은서의 뒤편으로 걸어가 은서의 어깨를 잡아 지그시 힘을 실었다.
“은서야.”
“!”
오래도록 듣지 못했던 엄마의 목소리에 펑펑 눈물을 쏟던 은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리 딸, 은서.”
화면 속에 앉은 그녀는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머리는 빠져 없었는지 가발을 쓴 것 같았고, 눈 밑과 입술이 전부 꺼멓게 보일 정도였다.
“이 영상을 네가 보고 있다는 건…….”
눈물이 치밀어 오르는지 수영이 울컥하며 말을 잠시 멈췄다.
“네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겠지.”
“…….”
“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됐다는 뜻이겠지.”
덤덤하려 애쓰는 듯 수영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네가, 모르길 바랐어.”
결국 수영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네가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나는 네 기억 속에 불륜을 저지르고 도망간, 끔찍한 엄마로 기억된다 해도 좋았어. 미안해...... 그집에 널 혼자 두고 나와서.”
앉아 있는 것이 힘겨운지 그녀는 연신 손수건을 입에 대고 기침을 해댔다.
“고마워.”
영상 너머로 손 하나가 컵을 내밀었다.
아마 수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서야.”
천천히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른 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고통을 겪게 해 미안해. 할 수만 있다면 네가 고통이나 슬픔 따위 같은 감정은 모르게 하고 싶었어.”
“…….”
“뱃속에 널 품은 순간부터. 넌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거든.”
수영이 따스하게 웃었다.
늘 은서가 꿈에서 보던 그 미소였다.
“그러니, 부디. 행복하게 살아주렴.”
“…….”
“아름답고, 예쁘게,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주렴. 할 수만 있다면, 네 눈을 보고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수영이 화면을 어루만지듯 손을 뻗었다.
“사랑한다, 내 딸. 은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