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경미는 연신 희망의 지푸라기를 잡으려 애썼다.
“……한심하긴. 남자 하나 때문에 일을 망쳐.”
“……그럼 물려받은 피가 어디 가겠어?”
경미의 비난에 민정이 조소하며 응수했다.
“제대로 알아봤어야지! 너 때문에 다 끝났잖아!”
경미가 옆의 남자들을 번갈아 본 뒤 소리쳤다.
“잊었어? 어디 있는지만 알아 오라며 닦달한 건 엄마였어.”
지석을 통해 은서와 약속을 잡은 뒤 곧장 경미에게 알렸다.
그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약속 장소와 시간을 물었다.
“이걸 어째. 큰일 났네.”
경미가 징징거렸다.
중훈에게 떡하니 데려가 큰소리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두 사람이 무의미한 입씨름을 벌일 때 다시 문이 열렸다.
“!”
저벅저벅 걸어와 맞은편에 앉는 남자를 본 민정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또 보네요. 그렇죠?”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웃는 남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뭐지?’
경미가 경계하듯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남자는 민정과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상당히 비싸 보이는 옷차림을 한 남자는 날카로운 미남이었고 위협적인 분위기를 뿜어냈다.
“여긴 왜…….”
“내가 여기 왜 있는지 그쪽이 알 필요는 없고.”
민정의 머릿속에 그간 의심스러웠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혹시, 은서가 이상했던 이유가 이 남자 때문이라면…….
저는 중요한 단서를 놓친 거였다. 스쳐 지나는 만남이라 생각해 중훈에게 보고하지 않았으니까.
“거래를 하나 제안하죠.”
“……거래요?”
반응을 보인 건 경미였다.
“그래요, 거래.”
정혁이 느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차은서 납치 미수로 바로 경찰서에 넘길까 생각도 했지만…… 아쉽게도 차은서가 두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해서.”
경찰서라는 단어에 경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나, 납치 미수라뇨? 그렇게 치면 그, 그쪽도 납치한 거 아닌가?”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차은서는 그냥 단순 가출일 뿐입니다.”
정혁이 우습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런데 그쪽은 어떨까?”
경미가 침을 꼴깍 삼켰다.
“민경미 씨가 데려온 남자들은 아직 내 수중에 있는데.”
“시, 신고해요, 그럼! 난 의원님이 빼 줄 테니까.”
“정말, 그렇게 믿는 건가?”
경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모르지 않을 텐데. 차 의원은 당연히 발 빼겠지. 민경미 씨, 당신이 차중훈의 집에 살았다는 걸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
“이대로 차은서 없이 돌아가 봐야, 차은서에게 다 들킨 마당에 건질 것도 없을 것이고.”
경미가 마른 침을 삼켰다.
“혹 성공했다고 해도, 차 의원이 과연 약속을 지킬까? 그간 한집에 살면서 어떤 사람인지 봐 왔을 테니 잘 알 텐데.”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불확실한 미래에 배팅하느니, 눈앞에 놓인 확실한 이득을 챙기는 게 낫죠.”
그녀의 머릿속 계산기가 팽글팽글 돌아갔다.
“어떤가요, 내 제안에 응할 마음이 좀 생겼습니까?”
“…….”
“좋아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논의해 볼까?”
정혁이 꼬았던 다리를 내리며 눈을 음험하게 빛냈다.
*
“흑흑.”
누군가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
은서가 두리번거리며 돌아보니 한 여인이 웅크리고 울고 있었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뒷모습이었다.
어쩐지 그녀의 눈물에 저까지 울 것만 같았다.
여인을 위로해 주고 싶어 은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은서야, 우리 딸. 불쌍하고 가여운 내 딸.”
가까이 가 보니 여인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었다.
“……엄마?”
은서가 나지막이 부르자 울고 있던 그녀가 휙 뒤를 돌아봤다.
“은서야. 은서야.”
수영이었다.
울어서 엉망이 된 그녀가 은서를 껴안으려는 듯 달려오려다가 넘어졌다.
“어, 엄마.”
그녀를 붙잡아 일으켜주려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가야 하는데.
수영을 보며 버둥거리던 은서는 누군가 제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놔주세요.”
“어딜 가.”
고통에 신음하며 뒤를 돌아보자 중훈이 비열하게 웃으며 머리칼을 쥔 손을 잡아당겼다.
“!”
기절할 것 같이 놀란 은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 눈을 깜빡이며 은서는 저도 모르게 잡혔던 제 머리칼을 만졌다.
……꿈, 전부 꿈이었다.
“왜 그래, 차은서.”
‘아.’
낮은 목소리와 함께 포근한 온기가 금방 은서를 에워쌌다.
“……악몽 꿨어?”
정혁의 향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자 그가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그러고 있기를 한참.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이 서서히 제 속도를 찾았다.
옆에 있는 정혁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낯선 풍경이었지만 은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제가 잠든 후에 어떻게 됐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잘 버텼어.”
“넌 그냥 내게 맡기면 돼.”
“금방 올게. 기다려.”
흐려지는 의식 속에 그가 남긴 말의 잔상이 또렷이 떠오른 탓이었다.
“……왜?”
은서가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치자 그가 무엇이 필요한지 말하라는 듯 물었다.
“씻고 싶어요.”
식은땀에 젖은 몸이 축축해 찝찝했다.
“기다려.”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그가 욕실로 향하고 곧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벗어.”
금방 돌아온 정혁이 은서의 니트 밑으로 손을 넣었다. 은서는 옷을 벗기는 그의 손길에 순순히 응했다. 악몽의 여파인지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바지도 벗고.”
순식간에 나체가 된 은서의 다리 밑으로 손을 넣어 안아 든 정혁이 다시 욕실로 성큼 들어섰다.
“눈 감아.”
그녀를 김이 오르는 욕조 안에 내려놓은 정혁이 은서의 머리 위에 대고 샤워기를 틀었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의식이 점점 명료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픽 웃은 그가 소매를 걷고 은서의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향기 좋은 샴푸를 가득 손에 부은 그가 부드럽게 거품을 내 은서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느긋하게 머리를 감겨주는 손길에 심장이 노곤해졌다.
“배는 안 고파?”
힘들이지 않고 작은 몸을 씻긴 정혁이 은서의 젖은 머리끝을 손가락에 말아 돌리며 태연하게 물었다.
“너 점심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잠만 잤어. 이거 계약 위반인 거 알지?”
이러면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똑같은 태도였다.
“씻고 먹을게요.”
다리를 당겨 무릎을 세운 은서가 픽 웃었다.
정혁이 그렇게 대하는 게 더 고마웠다.
그가 은서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안위를 물었다면, 아마 더 비참하고 끔찍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뒤로 젖혀 차가운 대리석에 기댄 은서가 눈동자만 굴려 정혁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습관처럼 은서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곳이 허전하다 못해 쓰라렸다.
“……들어오면 안 돼요?”
여기 넓은데.
물기에 젖은 입술이 아쉬운 듯 달싹였다.
뜨겁던 물은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글쎄, 어떻게 할까.”
정혁이 짓궂게 선택의 주도권을 은서에게 넘겼다.
“나 추운 것 같은데.”
작게 속삭인 은서가 어깨 끝에 닿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을 잡아 슬그머니 가슴 쪽으로 당겼다.
물속으로 끌어들인 정혁의 손가락을 벌려 그의 손바닥이 말캉한 살덩이를 감싸게 했다. 뾰족하게 선 끝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걸렸다.
손가락 하나를 미끄러뜨린 정혁이 그 부근을 느리게 문지르다 정점을 꾹 눌렀다.
“아…….”
찌릿 전기가 울리며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감기 걸리면 곤란해.”
정혁의 목소리가 한층 탁해진 걸 느끼며 은서는 젖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러니까 하정혁 씨가 따뜻하게 해 주면 되잖아요.”
은서는 정혁이 더는 심술부리지 못 하도록 혀끝으로 물기 어린 입술을 쓸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략은 정확히 먹혀들어 갔다.
“……입 벌려.”
은서의 뒷목을 감고 입술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은 정혁이 그대로 고개를 내렸다.
“아, 응.”
타액이 섞이며 찔꺽이는 소리가 아래에서 찰박이는 물소리와 섞여 습기 찬 공간을 타고 크게 울렸다.
열기가 더해지자 욕조 밖으로 은서를 안아 든 정혁이 제가 앉았던 곳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하아, 추운데.”
가쁜 호흡에 탐스러운 젖가슴이 오르내렸다.
“금방 더워질 거야.”
배꼽을 타고 흘러내려 간 손가락이 촉촉해진 샘을 찾아 어루만졌다.
“흐읏.”
다리가 느슨하게 벌어졌다. 몸을 뒤로 젖힌 은서가 따뜻해진 대리석을 두 손으로 짚으며 쓰러지지 않으려 버텼다.
혼탁해진 눈동자와 요염하게 벌어진 입술에 시선을 둔 정혁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이어진 곳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미끄러워졌다.
“이리 와.”
“아.”
첨벙,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다시 몸이 욕조 안으로 끌려 내려갔다.
“꽉 잡아.”
그가 양손으로 골반을 잡아당겨 제 아래에 맞추었다.
엉덩이에 스치는 노골적인 열기에 은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단단한 것이 가늠하듯 문지르는 것이 아쉬워 허리를 들썩이자 보채지 말라는 듯 혀를 차던 그가 갑자기 침입해 왔다.
“아, 흣.”
치대는 강한 힘에 몸이 앞으로 밀리자 은서는 욕조 끝을 꽉 부여잡았다.
움직이지 못 하도록 족쇄처럼 잡은 손이 금방 흔들리는 가슴을 움켜쥐어왔다.
“아, 아……!”
은서의 예민한 곳을 속속들이 아는 정복자는 자연스레 그녀의 쾌락을 지배했다.
반쯤 차 있던 물이 욕조 벽에 부딪혀 밖으로 흘러넘치는 소리가 마치 철썩이는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읏, 아!”
점멸하듯 번쩍거리는 희열에 견디지 못하고 연신 신음을 흘렸다.
쾌감에 부서지는 몸이 마치 바닷가의 작은 외딴 섬이 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파도에 침식되다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정혁 씨.”
“……오랜만이네, 차은서.”
침대 옆을 지키고 있던 정혁이 보고 있던 태블릿 PC를 내렸다.
“잘 잤어?”
“응. 정말, 푹 잤어요.”
긁힌 듯한 목소리이면서도 은서는 개운한 표정이었다.
“그럼 됐어.”
정혁이 그런 은서를 보며 픽 웃었다.
뇌가 쾌락에 절어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섹스했던 그 날 밤, 은서는 예정된 순서처럼 끙끙 앓기 시작했다.
체력적인 한계가 올 때까지 내몰렸으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며칠 내내 고열과 씨름하며 앓던 그녀가 눈을 뜬 건 4일 만이었다.
“……하정혁 씨.”
“그래, 듣고 있어.”
“나, 마음 정했어요.”
사그라질 것 같은 희미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녀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금방 잠에서 깬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