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60화 (60/82)

60.

“지금…… 뭐라고…….”

몸을 일으킨 은서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나뿐인 딸은, 그 집에 빼앗겨서 어릴 때 생이별했어. 지금쯤 은서 만해졌을 텐데…….”

딸이 너무 보고 싶다며 처연하게 눈물을 아롱거리던 경미였다.

“어머, 아가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난 오늘 아가씨 처음 보는데!”

경미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저 사람 딸은, 차은서가 아니라 나라고요.”

“아니야! 거짓말이야!”

항상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 같던 경미의 목소리가 유리 파열음처럼 갈라지고 찢어졌다.

“얌전히 계시죠.”

단호하게 쐐기를 박는 민정에 경미가 발작하듯 몸부림치다가 옆에 있던 남자의 제지를 받았다.

경미가 헉, 숨을 토해내며 뒤늦게 은서의 존재를 떠올렸다.

안 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어.

어떻게 버텨 온 시간인데!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속을 긁어대는 중훈의 무시를 웃음으로 견디며 지내 온 나날들이었다.

경미는 다급해졌다.

“거짓말이라고, 난 정말 모르는 아가씨야! 응? 은서야, 듣고 있니?”

“얌전히 계시라 했습니다.”

고개를 뒤로 돌린 경미가 은서를 찾으려 요리조리 눈을 굴렸지만, 그마저도 남자에게 막혀 소용이 없었다.

“…….”

지석은 침음했다.

경미가 부정할 때마다 민정의 표정은 점점 더 비참하게 일그러져 갔고 눈물이 흐르는 속도는 빨라졌다.

은서와 제게 감당할 수 없는 큰 충격을 안겨준 그녀가, 마치 피해자가 된 듯 비참하게 울고 있었다.

지석은 또 한 번 은서가 두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없음에 안도해야 했다.

비틀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은서를 뒤따라 일어난 정혁이 그녀를 붙잡듯 뒤에서 감싸 안고 있었다.

“일부러 접근했어.”

자포자기한 민정이 툭 진실을 내뱉었다.

지석에게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던 추악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의 앞에서 모든 걸 들킨 상황에 더는 버틸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미 지석의 차가워진 눈빛과 표정은 전부 끝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제게 애정 한 톨 없던 그였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낸 적은 당연히 없었다.

그러니 이젠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이었다.

“미술 학원에 간 것도, 처음 만난 날 은서한테 연필을 빌린 것도 전부 의도한 거였어.”

“아아악!”

당장이라도 민정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지만, 양옆의 남자들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자 경미가 악을 질러댔다.

조금만 있으면 되는데! 왜, 저놈의 기지배가!

충혈되어 벌게진 표독스러운 눈이 지석에게 향했다.

저놈 때문인가.

그래, 저놈 때문이야!

민졍이 얌전히 협조하던 이유가 지석 때문인 걸 알 리가 없는 경미가 이를 으드득 갈며 지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은서를 잘 감시하면 우리를 호적에 올려주겠다고 했거든.”

폭탄이 떨어진 듯 고요해졌다.

지석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경미는 좌절한 채 눈을 감았다.

“…….”

전후 상황을 눈치챈 은서는 힘없이 정혁의 팔을 붙잡았고, 정혁은 그런 은서를 달래듯 더욱 강하게 품에 안았다.

“……호적에, 올리다니?”

지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차중훈 의원이 약속했어.”

지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연극을 진즉 집어치웠으려나.

민정은 제가 처한 상황이 우스워 조소했다.

지석을 처음 본 날을 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에 대한 마음이 커질 수록, 지석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도 커져 갔다.

그래, 마치…… 은서처럼.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그리고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잠시나마 부풀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래, 내 인생이 이렇지.’

민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모녀가정으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누군가의 내연녀로 살다가 저를 낳은 경미는 남자에게 버림받았다.

사실 민정은 제 생부가 누군지도 몰랐다.

여러 명의 남자를 전전하다 실패하면서도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지 좋은 남자를 찾겠다며 커다란 교회로 성당으로 부지런히도 참석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신이 나서 돌아왔다.

“우리 팔자 피게 생겼어.”

경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마어마한 거물급 국회의원이야. 아내가 죽고 딸하고 둘이 산다는데, 자기 집에 들어와서 딸을 돌봐주래. 그럼 호적에 올려주겠다고 했어.”

이상했다. 그렇다고 그 남자가 경미와 만나는 것도 아니라 했다.

딸을 돌봐주기만 하면 생판 남인 모녀를, 그것도 쥐뿔도 없는 모녀를 호적에 올리겠다고? 처음엔 딸 사랑이 지독한 사람인가 싶었다.

“그러니까 너도 협조해.”

“싫어.”

“얘는? 너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미술도 할 수 있는데?”

솔깃한 제안이었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 버려야 했던 꿈을 다시 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냥 그 집 딸하고 친구가 되기만 하면 돼. 너는 친구도 생기고, 미술 공부도 할 수 있잖아.”

거절할 수 없는 유혹에 그녀는 경미의 지시대로 학원에 가 은서를 만났다.

“은서가 만나는 사람, 은서한테 벌어지는 일. 전부 보고했어.”

이제 나는 더이상 너와 만날 수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겠지.

지금껏 지석의 시선을 피하던 민정이 차분해진 얼굴로 지석을 응시하며 덤덤하게 고백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민정아.”

“맞아. 오늘도 내가 알렸어. 은서가 이대로 사라져 버리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게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리거든.”

공포스러워보이기까지 하는 지석의 표정에 민정이 키득거렸다.

“네가 진짜로 은서와 연락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너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길 바랐는데.”

민정의 말끝이 흐려지고 고개를 숙인 그녀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

은서는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간 왜, 중훈이 그토록 집착하면서도 제게 감시자를 붙이지 않는지 의아했다.

가끔 협박처럼 해오긴 했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으니까.

그게 일말의 애정이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러니까 그것이.

“하.”

허망해진 은서가 헛숨을 토해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은서의 24시간을 지켜보며 전해 줄 감시자가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했다가 정치 생활에 흠이 잡히느니 이런 식의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을 선택한 거였다.

새엄마로, 단짝 친구로.

그렇게 은서가 안심하고 긴장을 풀 수 있는 존재를 옆에 붙여두고,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지켜보던 거다.

소름이 끼쳤다.

중훈의 사고방식과 그가 저지른 비현실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어째서 이렇게까지?

“…….”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며 과부하가 걸렸다.

머리에 훅 열이 올랐다.

은서가 힘을 잃고 쓰러지자 정혁이 빠르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몇 번이고 괜찮겠냐는 질문에도 버티고 버티던 그녀가 결국 한계에 이른 모양이었다.

“……그만 가자.”

은서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떼어 낸 정혁이 작게 속삭였다.

은서는 눈을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혁이 은서를 데리고 나간 뒤 문이 철컥, 무겁게 닫혔다.

“민정아. 하나만 물을게.”

소리의 잔상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지석이 민정을 지그시 바라봤다.

“나와 은서를, 아니.”

“…….”

“은서를, 친구로 생각하긴 했어?”

적어도, 조금이라도 은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절실해진 지석이 다급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은서에게, 미안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

친구?

처음엔 예쁜 인형 같은 데다 친절하기까지 한 그녀가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좋기도 했다.

좋은 배경과 뛰어난 재능은 솔직히 부러웠다.

경미에게 전해 듣는 그녀의 일상을 알게 되고는 짠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모든 감정은 질투로 귀결되었던 것 같다.

그래, 질투.

내가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을 가지고도 불행한 그녀가.

“아니.”

민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없었어. 단 한 번도.”

“……그래.”

지석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래도, 널 친구로 생각했어.”

마지막을 고하듯 읊조린 지석이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민정은 눈을 감았다.

그거 알아?

난 한 번도 널 친구로 생각한 적 없어.

네가 날 친구로 생각하길 바란 적도.

*

은서를 옆 호실로 데려와 침대에 눕힌 정혁은 걱정스럽게 은서의 이마를 짚었다.

충격 때문인지 급격하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차은서. 이것만 삼키자.”

구급약 통을 뒤져 찾은 해열제와 생수를 가져온 정혁이 은서의 상체만 일으켰다.

“으.”

하지만 턱이 덜덜 떨리는 은서는 추운지 몸을 웅크리며 앓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후우, 한숨을 쉰 정혁이 은서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강제로 입을 벌렸다.

혀를 손가락으로 누른 정혁이 곧장 생수를 들이켜 입에 머금었다.

은서의 혀 위에 약을 넣은 그가 바로 입을 맞추고 물을 흘려 넣었다.

뱉어낼 수 없게 혀로 문지르고 밀어 넣자 약이 녹아 쓴 물이 꼴깍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녀가 모조리 삼키고서야 입을 떼어 낸 정혁이 은서의 눈가와 콧날에 입을 맞췄다.

“고생했어.”

그녀가 오늘 마주한 진실은, 그녀에게 잔혹하고도 잔인했다.

“잘 버텼어.”

하지만 은서가 한번은 마주쳐야 할 상황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가 진정한 자유를 가지려 한다면.

“이제 내가 다 해결할게.”

정혁이 식은땀에 젖어버린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속삭였다.

“말했지? 넌 걱정할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지금은 그저 차은서가 마음 하나만 잘 붙잡고 버티길 바랄 뿐이었다.

“넌 그냥 내게 맡기면 돼.”

더없이 소중한 사람을 만지듯 은서의 볼을 감싸 쥔 손이 애틋했다.

“금방 올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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