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응?”
지석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은서는 얼이 빠져 버린 지석을 쳐다봤다. 25년을 알고 지내면서 지석이 저런 얼굴을 하는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지석은 당황한 눈치였다.
은서도 덩달아 의아해졌다.
어차피 정혁을 통해 민정과 약속을 정한 거라 들었다. 그러니 셋이 만난다고 해서 곤란할 만한 일은 딱히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너 오늘 안 온다고 했잖아. 우리 둘이 만나라고 했잖아.”
“야, 왜 그래. 아무리 은서가 좋다지만 내가 낀 게 그렇게 싫어?”
민정이 다다다 쏘아대자 헛웃음을 터트린 지석이 놀리듯 되물었다.
“아, 그, 그러니까.”
그제야 제가 과하게 반응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민정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은서랑 둘이 이야기하고 싶어. 너, 너는 은서 어디 있는지 다 알면서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아, 서운한 건 이해하는데…….”
“그, 그러니까 가. 은서랑 둘이 있을 거야.”
지석에게 다가간 민정이 그의 팔을 잡고 입구 쪽으로 당겼다.
“뭐? 민정아, 너 왜 그래. 나 지금 좀 당황스러워지려고 해.”
“얄미워서 그래. 가.”
지석이 버티자 민정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지석이 곤란한 표정으로 은서를 돌아다 봤다. 어쩌면 좋을지 묻는 얼굴이었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은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정아.”
결국 끼어든 은서가 민정을 불렀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눈치였다.
지석의 눈썹과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솔직히 제가 있어도 민정의 모든 관심과 신경이 은서에게 쏠리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민정은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진심으로 싫은 것처럼 보였다.
“아, 알겠어. 갈게, 갈게.”
은서의 컨디션을 고려한 지석이 결국 백기를 들고 순순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실랑이를 벌여봐야 은서만 피곤해질 거였다.
그제야 안도한 듯 어깨의 긴장을 푼 민정이 지석의 뒤를 따랐다.
“……다음에 보자.”
문을 열기 전 지석이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은서에게 아쉬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뭐죠?”
지석이 본능적으로 입구를 막아섰다.
남자들은 버티는 지석을 손쉽게 밀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떠한 예의도 보이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걸 보니 정혁의 사람들이 아닌 건 확실했다.
“당신들 누구야?”
지석이 같은 층 어딘가에 있을 정혁에게 들리길 바라며 크게 외쳤다.
“입 다물어.”
남자 하나가 재빨리 지석의 입을 틀어막으며 두꺼운 팔로 지석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
지석이 버둥거리며 은서를 바라봤다.
“…….”
은서는 저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다른 남자를 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은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은서는 덜덜 떨리는 손을 꾹 움켜쥐며 눈에 힘을 줬다.
‘괜찮아.’
옆에 있겠다고 했으니까.
그가 구해 줄 것이다. 전에도 그랬듯이.
은서는 두려움을 다스리며 정혁이 빨리 이 순간을 눈치채길 바랐다.
“은서야.”
“!”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파가 있는 곳까지 물러섰던 은서가 제 귀를 의심했다.
제게 다가오는 남자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은서의 눈동자가 곧 혼란으로 물들었다.
“……엄마?”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경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집에 가자, 은서야.”
“……여긴 어떻게.”
은서의 눈동자가 황급히 지석에게 향했다.
하지만 지석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바짝 경계한 채 경미와 민정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은서가 지금, 엄마라고 했어?’
제가 아는 은서의 모친은 저 여자가 아니었다.
은서는 지석의 황당한 표정을 보며, 그가 경미를 본 적이 없다는 것과 그녀의 존재조차 모른다는 걸 떠올렸다.
대외적으로 경미는 엄연히 은서와 일면식도 없는 남이었다.
지석과 은서의 시선이 부딪쳤다.
지석이 아는 사람이냐는 듯 눈짓으로 물어왔다.
중훈과 지석이 손을 잡은 게 아니라면, 그녀는 대체 어떻게…….
‘설마.’
은서의 시선이 자연스레 민정에게로 향하고, 지석도 은서를 따라 옆에 있는 민정을 쳐다봤다.
“…….”
내내 붙잡힌 지석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민정은 지석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민정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게 보였다.
“…….”
믿을 수 없어 은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문이 다시 벌컥 열리고 또 다른 남자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여러 명의 남자들에 이어 마지막에 들어 온 남자 둘이 문을 닫고는 그 앞을 지키고 섰다.
“뭐, 윽!”
지석을 붙잡고 있던 남자가 지석을 밀치고 곧장 덤벼들었지만, 상대방이 재빠르게 피한 탓에 육중한 몸이 앞으로 쏠리며 고꾸라졌다.
“이……!”
은서 쪽으로 향하던 남자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눈치를 보다가 마음을 정한 듯 은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들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누군가 등을 발로 찬 탓에 그의 몸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놔, 이 새끼야.”
무표정의 남자들은 버둥거리는 두 남자를 나란히 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힘으로 눌러 결박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폭풍이 휩쓸고 간 듯했다.
그제야 입구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 둘이 각각 민정과 경미에게 다가갔다.
“얌전히 따르신다면 거칠게 하진 않겠습니다.”
무겁게 떨어진 경고였다.
*
“은서야!”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되자 지석이 곧장 은서에게 달려왔다.
막상 다가와 놓고도 창백한 낯빛을 본 지석은 괜찮냐는 질문도 꺼낼 수 없었다.
은서는 남자들에 의해 소파에 나란히 앉혀진 민정과 경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거, 현실인가?
은서는 제가 꿈속을 헤매는 건가 싶었다.
지석이 은서에게 손을 뻗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익숙한 향기가 뒤에서부터 은서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귓가에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에 은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등 뒤로 퍼지는 단단한 열기 때문인지 마치 서서히 그에게 잠기는 기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걸 겨우 버티며 은서는 제 허리를 감싼 정혁의 팔을 부여잡았다.
“잘 버텼어.”
정혁이 은서의 눈꼬리에 가벼이 입을 맞추며 읊조렸다.
시끄럽게 굴던 남자들은 입을 틀어막힌 채 밖으로 끌려나간 후였다.
남자 하나가 다른 곳에서 의자를 가져다가 정혁의 앞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레 의자에 앉은 정혁이 제 무릎 위에 은서를 앉히고 두 팔로 그녀의 허리와 다리를 감아 당겼다.
정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은서가 흐르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삼켰다.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일 테지.
어쩌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걸지도.
은서는 정혁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그의 목 언저리에 제 고개를 파묻었다.
정혁이 제가 곁에 있다는 걸 알리듯 은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는 맞은편의 남자에게 눈짓했다.
‘……아.’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은 지석은 이곳에서 자신이 철저히 부외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럼에도 제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다.
떨리는 은서의 손가락을 본 지석이 조용히 민정의 앞으로 향했다.
“…….”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힐긋 시선을 던졌던 민정이 지석인 걸 알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경미와 민정이 시선을 주고받지 못 하도록 그들 사이에는 정장 입은 남자 하나가 끼어 있었다.
그녀들의 바로 뒤에도 각각 남자들이 서 있어서 정혁이 있는 곳에선 그녀들이 보였지만, 그녀들은 뒤를 돌아본다 해도 은서와 정혁을 볼 수 없었다.
민정과 경미를 지켜보되 은서와 정혁의 존재는 그들에게 철저히 숨기려는 것 같았다.
지석은 은서가 보고 있는 것이 민정의 뒷모습뿐이라는 사실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 민정의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을 은서가 봤다면 분명 커다란 상처가 될 테니까.
지석이 소파에 앉자 그 옆에 있던 남자가 정혁에게 허락을 구하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정혁이 그냥 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의 입이 될 남자는 앞에 앉은 두 여자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스산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몸을 움츠렸다.
“여기에 무슨 일로 왔죠?”
취조하듯 내리꽂히는 말에 경미가 입술을 씹어대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 내 딸을 데리러 왔어요.”
“……딸?”
안 그래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지석이 중얼거리자 민정이 흠칫 몸을 떨었다.
“다, 당신들이야말로 누구죠? 왜 내 딸을 데리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없어져서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요?”
오히려 경미가 따져 물었다.
그녀는 절박했다. 무조건 은서를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두려움을 이겨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이겁니까?”
“그래요. 집으로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
남자의 질문에 경미가 입을 다물었다.
지석은 중년의 여인이 고집스레 민정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느낀 건 옆의 남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질문을 바꾸죠. 두 사람, 무슨 관계입니까.”
“무슨 관계라뇨, 처음 보는 사람인데.”
경미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부정했다.
남자의 매서운 시선이 이번에는 민정에게 향했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만.”
“…….”
민정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보지 않아도 저를 지켜보는 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하필…….
“민정아.”
지석이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그녀를 불렀다.
무섭게 생긴 남자의 협박보다도 그의 한 마디가 가시 돋은 채찍이 되어 민정을 후려쳤다.
민정이 눈을 감아버린 탓에 고인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말해줘, 어떻게 된 건지.”
지석의 부드러운 재촉에 민정의 떨리는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엄마예요. ……우리, 엄마.”
민정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
그리고 고개를 든 은서가 두 사람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