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
정혁과 은서의 입술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난처해하는 지석이 보였다.
“그게, 그러니까, 아…….”
변명을 해보려 더듬더듬 입술을 열던 지석이 결국 포기한 듯 고개를 떨궜다.
지석은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얼굴을 숨기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제가 뭘 본 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민망해도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저 남녀가 이곳에서 정사를 벌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손님이 있었네.”
지석에게서 태연하게 시선을 떼어 낸 정혁이 움켜쥐었던 은서의 손과 엉덩이를 놓아주었다.
떨어지려는가 싶었던 그는 한 손으로 은서의 허리를 감고서 제가 흐트러트린 머리를 정돈해주고, 입술 끝에 흘러내린 타액을 엄지로 문질러 닦아냈다.
그의 뻔뻔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혁은 제가 놓친 곳은 없는지 은서의 턱 끝을 받쳐 들어 올리고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기까지 했다.
“…….”
지석은 그 낯 뜨거운 행위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손길을 당연하다는 듯 누리는 은서 때문에.
“온다는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
이미 지배인을 통해 지석이 왔다는 걸 보고 받긴 했지만, 정혁이 타박하듯 읊조렸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은서를 살피는 채였다.
“그게…….”
“뭐, 상관은 없지만.”
지석이 설명하려 하자 가볍게 한 마디로 그의 입을 틀어막은 정혁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은서의 허리를 놔주었다.
“차은서.”
정혁이 은서의 볼을 손가락으로 토닥이듯 두들겼다.
“나는 바로 옆에 있을 거야.”
“기다릴 거예요?”
“그래. 그러니 편히 대화 나눠. 이야기 끝나면 데리러 올 테니까.”
“옆에서 뭐 하고 있을 건데요?”
“뭐하긴. 일하면서 공주님 기다려야지.”
그의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은 은서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이따 봐.”
쿡 웃고는 가볍게 입을 맞춘 정혁이 문을 열고 나갔다.
지석은 순간 저 남자의 눈에 자신이 보이지 않는 건지 의심해야 했다.
정혁이 사라질 때까지 문을 쳐다보던 은서가 뒤늦게 지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야.”
“어, 응.”
지석은 인형처럼 무표정이 된 은서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투정을 부리듯 정혁에게 매달리며 대화하던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차가웠다.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는 거야.’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지만 지석은 애써 괜찮은 척했다.
“들어갈까?”
저벅저벅 걸어 지석의 곁을 지나친 은서가 소파로 가 앉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지석도 은서의 맞은 편에 후다닥 자리했다.
“오늘 원래 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걱정이 돼서 왔어.”
지석이 왜 제가 나타나게 됐는지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
“민정이 성격 알잖아. 아무래도 네가 혼자 감당하기 버겁지 않을까 싶어서.”
목소리 크고 활동적인 민정을 떠올리니 지석의 우려가 이해됐다.
“잘 지냈니?”
무릎 위에 양손을 얹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은서가 의례적인 안부를 물었다.
“……아니.”
지석은 서글프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널 힘들게 해놓고, 잘 지냈으면 안 되는 거잖아.”
“…….”
“미안해, 은서야.”
“…….”
“무시해도 좋아, 그래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은서의 굳게 닫힌 입술을 보며 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를 전했다.
“너를 위한답시고, 내 욕심을 앞세웠어. 그리고 아닌 척했어.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웠어.”
“…….”
“오해는 하지 말아줘. 오늘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정말로.”
은서는 가만히 지석을 쳐다만 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에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짧게 한숨을 쉰 은서가 허리의 긴장을 풀었다.
“……하정혁 씨한테 네 이야기 들었어.”
작게 읊조리는 소리에 지석의 고개가 들렸다.
“도와줘서 고마워.”
전후 사정을 떠나 지석이 정혁을 찾아간 덕에 제가 그의 곁으로 갈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미안해.”
“지석아.”
은서가 조금 단호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린, 친구지?”
뜻밖의 질문에 지석의 눈이 커졌다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그래, 친구지.”
지석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마음이야, 묻어두고 덮어두다 보면 희석되어 사그라드는 날이 올 것이다.
적어도 은서의 마음을 갖는 게 제가 아니라 한다면, 그녀에게 좋은 친구였던 시간만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은서의 마음에 작은 흔적이 될 수 있다면.
이 정도 미련은 허락되지 않을까, 지석은 감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처음보다 누그러진 공기에 침묵이 들어찼다.
지석은 차분한 은서를 몰래 힐끔거렸다.
‘음?’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은서의 목덜미에 붉은 흔적이 얼핏 보였다.
“!”
뭔가 싶어 자세히 관찰하던 지석의 얼굴이 곧 홍당무처럼 벌게졌다.
이미 두 사람의 외설적인 애정 행위를 보고 난 뒤라, 흔적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저기.”
“?”
은서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렀다.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지만, 민정이 도착하기 전에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기에, 그…… 가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지석이 가리키는 쪽을 손으로 덮은 은서가 의미를 깨닫고는 니트를 턱 아래까지 올렸다.
“고마워.”
지석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내비치지 않는 은서가 퍽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뭐라 딱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은서의 분위기가 한층 더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과 그 사이로 오뚝하게 내려오는 버선코에 도톰하고 붉은 입술.
지석의 머릿속에 조금 전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이 다시 재생되었다.
타액이 흐르는 입술 사이로 탐욕스럽게 드나들던 붉은 혀와, 정혁의 다리를 느른하게 문지르며 휘감던 가늘고 긴 다리.
젖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던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 소리.
‘아.’
화상을 입은 듯 온몸이 화끈거렸다.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을 떨치려 지석이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걸 보게 될 줄이야.’
은서가 걱정되는 마음에 약속 장소와 시간도 알고 있겠다, 그냥 별다른 연락 없이 와 버렸다.
정혁이 민정에게 전하라 한 대로 호텔 로비에 와 특정 지배인을 찾았고, 하정혁 씨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지배인은 직접 이곳으로 지석을 안내해줬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기다리려니 긴장이 돼 구경 삼아 안을 돌아보고 있다가 인기척이 들리기에 나온 참이었다.
“……키스해 달라고?”
“네.”
믿기 힘든 대화 소리가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런 관계구나.’
아예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생각보다 쉽게 현실이 받아들여졌다.
“하정혁 씨 말이야.”
지석이 상념을 떨치듯 다른 대화 주제를 꺼내 들었다.
차라리 쿨하게 두 사람을 응원하자 싶었다.
“?”
정혁의 이야기를 꺼내자 은서가 여느 때보다 크게 반응을 해왔다.
“널 많이 아끼시더라.”
“…….”
“정말 사랑하시나 봐.”
사랑?
은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지석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그런 광경을 봤으니 지석은 정혁과 제가 연인 사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사랑…….’
입 안이 썼다.
이유가 뭐든 정혁의 마음을 착각하고 싶었던 때도 있긴 했었다.
“언제까지 이럴 생각인데?”
“조용히 해. 방금 잠들었어.”
“나 참, 안쓰러운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끼고 도는 거라고 생각 안 해? 정도가 지나치다고.”
그날 밤, 거실에서 정혁과 도훈이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진짜 그가 절 사랑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안쓰러운 마음.
정혁이 제게 잘해주는 이유를 깔끔하게 정의하는 표현이었다.
무력하고 위태로운 저를 위해 베푸는 커다란 호의.
“역시, 사랑하는 감정은 숨길 수 없는 건가 봐.”
“사랑하는 감정이 어떤 건데?”
은서가 무감한 얼굴로 물었다.
“어어?”
당혹스러워하던 지석이 어물거리다 볼을 붉혔다.
“글쎄…… 자꾸 보고 싶고, 생각나고, 옆에 있으면 마냥 행복하고 좋다가도 한없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
“그 사람의 미래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는 그런…….”
은서를 생각하며 느꼈던 감정들을 직접 앞에 대고 읊으려니 부끄러워졌다.
“너도 그 사람 보면서 느끼는 거겠지만…….”
지석이 씁쓸함에 말끝을 흐렸다.
‘내가 느끼는 거…….’
마치 지석의 말이 뇌를 헤집어 놓은 기분이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다시 어색해진 분위기에 지석이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지석이 자리를 뜨고 난 직후, 도어벨이 울렸다.
은서가 경계심을 세우고 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딩동, 딩동.
정확히 신호대로 벨이 두 번 울리고 난 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지배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닫히고 곧 안으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서는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할 때 민정이 나타났다.
“차은서!”
입을 크게 벌려 외친 민정이 날듯이 뛰어와 은서를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휘청인 은서가 그대로 소파에 풀썩 쓰러지다시피 했다.
“너, 너!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네가! 나한테!”
“민정아.”
겨우 자세를 바로 한 은서가 저보다 한 뼘은 작은 민정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미안해, 걱정 많이 했지.”
“그걸 말이라고!”
민정이 울먹거리며 은서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어디 있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하나하나 설명할게.”
다급하게 쏘아대는 민정을 달래느라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몇 달 동안 만난 사람이라고는 정혁과 가끔 만나는 의사 선생 두 명뿐이었다.
도훈이 집으로 온 적이 몇 번 있긴 했지만, 눈인사 정도만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내내 말이 없는 사람들과 지내다가 오랜만에 민정의 펄떡대는 기운을 마주하게 되니 정신이 하나 없었다.
은서는 무척 익숙했던 민정의 성격이 반가워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넌 지금 웃음이 나와?”
“미안.”
“…….”
“……보고 싶었어.”
눈을 흘기는 민정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왔구나.”
그리고 그때, 지석이 다시 돌아왔다.
“!”
순간 몸을 굳힌 민정이 은서를 밀어내며 뒤를 돌아봤다.
“……서지석?”
지석을 본 민정이 벌떡 일어났다.
‘?’
민정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의아해하던 은서는 민정의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생각보다 늦었다?”
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지석이 웃으며 다가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지석에게 묻는 민정의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