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57화 (57/82)

57.

카페 입구에 이른 지석은 유리창 너머의 민정을 보며 착잡해졌다.

기말고사 이후 민정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오늘 만나자며 연락해 온 것은 아마 은서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후.”

크게 심호흡을 한 지석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민정아.”

“아, 왔어?”

“응,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민정은 웃고 있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유독 축 처진 목소리였다.

눈 밑이 퀭한 걸 보니 며칠 잠을 자지 못한 사람 같았다.

‘걱정되겠지.’

민정 입장에서는 항상 보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거였다.

민정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속여야만 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민정에게 모든 걸 시시콜콜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지석도 아예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정혁과 약속을 했기에 그나마 은서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거였다.

“지석아.”

지석이 주문한 음료를 받아오자마자 민정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응?”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충분히 예상된 지석이 일부러 컵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너, 은서 소식 들은 거 있니?”

“……아니.”

지석이 침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없어?”

“응, 너는? 너는 아직도 연락 안 돼?”

지석은 입술을 핥지 않으려 조심하며 연기를 이어갔다.

“……응.”

민정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은서가 사라진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면 졸업식이었다. 은서 없는 저 혼자만의 졸업식.

“여행을 가거나, 어딜 간 거면 연락이라도 남기고 갔을 텐데…… 이렇게 연락 안 될 애가 아닌데.”

“…….”

지석은 마음속으로 민정에게 미안하다 연신 사과를 건넸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은서 자신이 나올 때가 되면 네게 제일 먼저 연락하겠지.

조금만 기다리면 돼.

지석이 그렇게 자위할 때였다.

민정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주룩주룩 흘렀다.

“미, 민정아.”

크게 당황한 지석이 급히 티슈를 집어 건넸다.

“나, 너무 걱정돼.”

고개를 박고 흐느끼는 민정에게 카페 안의 시선이 집중됐다.

“은서, 지금 어디 있는 걸까? 무슨 일 있는 거면 어떡해?”

“민정아…….”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집이 엄격하긴 해도, 이렇게 연락 안 된 적은 없었잖아.”

“…….”

민정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지석이 민정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였다.

지석은 은서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은서 소식 좀 알려줬으면 좋겠어.”

민정이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잠도 못 자겠고 밥도 못 먹겠어. 잠만 자면 꿈에 은서가 나와. 자꾸 도와 달라 그러고, 날 원망해.”

“힘들고 걱정되는 마음 나도 알아. 나도 그러니까.”

지석이 네 맘 다 안다는 듯 민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지석아, 은서 어디 있는 걸까? 얘 지금 대체 뭐 하고 있는 걸까.”

“…….”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한 민정이 지석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은 지석이 두 다리를 뻗으며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한참 동안 울면서 은서를 걱정하는 민정을 겨우 달래 보내고 나니 온몸의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몰려드는 피로함에 눈을 몇 번 감았다 뜬 지석이 휴대폰을 꺼냈다.

“해보는 게 나으려나.”

화면 위에서 망설이던 손가락이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흐음.”

통화를 마친 정혁이 휴대폰 모서리에 턱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은서, 제일 친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은서 걱정을 많이 해요. 일단 아무것도 전하진 않았는데, 혹시나 은서가 보고 싶어 할까 봐서요.”

지석은 착실하게 저와의 약속을 지키는 모양이었다.

“친구.”

정혁이 감았던 눈을 떴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선택은 은서의 몫이었다.

은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안아달라 조르는 횟수도 많이 줄어들었고, 하루의 대부분을 그림 그리는데 보내느라 바빴다.

그림을 그리다 지쳐 잠이 들거나, 자다가도 깨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계속 곁을 지킬 필요 없으니 회사에 가라고 오히려 정혁의 등을 떠미는 통에 가끔은 서운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어쨌든 긍정적인 변화였다. 물론, 끼니를 자꾸 잊는 건 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었지만.

“거기서 뭐 해요?”

침실 문을 열고 나온 은서가 젖은 머리를 말리며 다가왔다.

“잠깐 고민 좀 했어.”

“무슨 고민이요?”

“…….”

질문엔 답하지 않은 정혁이 자연스레 은서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았다.

소파에 앉은 정혁이 은서의 허리를 감아 제게로 당겼다.

그의 손길대로 얌전히 끌려간 은서가 정혁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차은서.”

수건으로 긴 머리를 감싸 쥐고 물기를 제거하던 정혁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응?”

“나갈래?”

“…….”

은서의 숨이 순간 멎었다.

“오해하지 마. 집에만 있으니까 갑갑하냐고 묻는 거야.”

“아.”

그제야 식은 숨결을 토해낸 은서가 슬그머니 정혁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나갈래, 그 한마디에 덜컥 겁이 나는 걸 보면 아직 그의 곁을 떠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조금 나아졌다고 판단한 그가 제집에서 저를 내보내려는 걸까 봐 무서웠다.

“갑자기 그건 왜요?”

“네 친구가 널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이야.”

친구라면…….

“……민정이요?”

은서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걱정 많이 하고 있겠구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잊었던 그리움이 훅 끼쳐왔다. 동시에 커다란 미안함도.

“그래, 그 친구. 네 기사님한테 연락이 왔거든.”

그가 지석을 부르는 호칭에는 다분히 놀리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리고 민정의 이야기에 우울해질 저를 알고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도 섞여 있겠지.

이제는 그의 대화나 행동의 이면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석이가 곤란했겠네요.”

그가 원하는 대로 목소리를 끌어올린 은서가 태연한 척 대꾸했다.

“보고 싶으면 만나.”

“…….”

은서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민정을 보고 싶긴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직 정혁의 곁을 떠날 각오도 되어 있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한 것도 없는데 밖을 나간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없었다.

그저 그림 그리는데 모든 열정을 쏟고 있을 뿐이었다.

고민하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정혁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말리는 데만 집중했다.

“……나가는 거, 괜찮을까요?”

결국 민정에게 느끼는 미안함이 모든 불안을 잠재웠다.

민정의 성격상 잘 있으니 걱정 말라는 연락 한 통으로는 걱정을 멈출 수 없을 거였다.

“누가 보면 어떡해요?”

고개를 반쯤 돌린 은서가 허락을 구하듯 정혁의 눈을 바라봤다.

“그런 건 걱정 마.”

네가 다른 사람 눈에 띌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라는 듯 그는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민정과 만나기로 한 날.

약속 장소에 도착한 은서는 왜 정혁이 그토록 여유로웠는지 깨달았다.

정혁이 그녀를 데려온 곳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호텔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차를 세워놓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지배인이 두 사람을 안내했다.

정혁이 일부러 가리듯 은서와 지배인 사이를 막으며 걸었다.

어차피 캡 모자 위에 후드 모자까지 푹 눌러 쓴 터라 그가 은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는 어느 층에도 서지 않고 곧장 꼭대기의 객실 층으로 향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정혁과 은서가 내리자 뒤에서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던 지배인이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서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건 너무 오버 하는 거 아니에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은서는 정혁을 원망하듯 올려다봤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멀쩡히 영업 중인 대형 호텔의 엘리베이터 하나를 조작하게 만든 그였다.

정혁의 철저함이 고마우면서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민망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마.”

하찮은 일을 굳이 언급한다는 듯 무심하게 대꾸한 정혁이 은서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끼워 넣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해요.”

“어디, 얼굴 드러내면 안 되는 연예인 여자친구랑 데이트하나 보다 생각하겠지.”

“……연예인은 좀, 너무 갔어요.”

“글쎄, 내 눈에는 그런가 보지.”

오히려 성의 없이 툭 던지는 말이 더 진심 같아서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어쨌든요. 하정혁 씨한테 안 좋은 거잖아요.”

“차은서.”

“?”

“내가 어디 가서 걱정, 근심 어린 시선을 받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

어련하시겠어요.

오만한 그의 발언에 작게 탄식한 은서가 입술을 비죽였다.

픽 웃음을 흘린 정혁이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고는 은서를 안으로 휙 끌어당겼다.

“여기 다시 온 소감이 어때.”

“그때 거기네요.”

은서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낯설지 않은 공간이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그의 재킷을 뒤집어쓴 채 따라 들어왔던 곳이었으니까.

“친구가 도착하면 지배인이 이곳으로 바로 안내해 줄 거야.”

“…….”

몇 달 전의 기억을 추억하던 것도 잠시.

현실로 돌아온 은서는 정혁의 손을 꽉 붙잡았다.

민정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불안해?”

“모르겠어요, 그냥…….”

정혁이 그대로 은서를 제 품에 안고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 걸 거야.”

“……그럴까요?”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

정혁의 곁에 있으면서 들인 습관이었다.

그래야 계속해서 마음을 좀먹는 불안을 조금이라도 떨칠 수 있었으니까.

은서는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서늘한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이제는 저 차가움 속에 든 다정함을 알았다.

은서가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목을 감아 제게로 당겼다.

“……키스해달라고?”

“네.”

짓궂은 미소로 묻는 그에게 당당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가 웃음을 삼키며 그대로 입술을 붙여 왔다.

달래듯 부드럽게 어루만지는가 싶던 그가 곧장 사이를 벌리고 들어왔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어서였는지 그는 단번에 혀를 얽고 농락하듯 문질렀다.

잡아먹을 듯 몰아치는 그의 기세에 밀려 주춤거리며 뒤로 밀려나던 은서의 등이 벽에 닿았다. 깍지 낀 손을 벽에 붙인 정혁이 고개를 비틀어 더욱 깊이 저를 밀어 넣었다.

“흐읏.”

헐떡이는 숨 사이로 못 참겠다는 듯 비음을 흘리자 허리에 있던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힘을 주어 당기며 은서의 몸을 제게 밀착시켰다.

“으, 음…….”

느리게 비벼지는 감각에 아래가 간지럽게 조여들었다.

오므리고 싶은 본능을 거스르고 벌린 다리 사이로 그의 허벅지를 끼워 넣은 은서가 손을 미끄러뜨려 그의 가슴팍을 더듬을 때였다.

“어, 저기…….”

헛기침과 함께 어쩔 줄 몰라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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