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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안고, 울리고-56화 (56/82)

56.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연 은서는 오늘도 가득 차 있는 내용물에 어깨를 움츠렸다.

전부 제가 좋아하는 위주의 음식뿐이었다. 좋아한다고 입 밖에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만큼 정혁이 제게 온 관심을 쏟고 있다는 뜻이었다.

작은 통에 담긴 샐러드를 꺼내 들고 거실을 가로지른 은서는 통으로 된 창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맨바닥에 앉아 밥을 먹는 걸 보면 정혁이 좋아할 리 없겠지만, 어차피 지금은 혼자였다.

짙푸른 한강 물과 도로에 줄지어 선 자동차를 멍하니 보며 은서는 풀떼기를 꾸역꾸역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맛은 느껴지지 않는데도 음식물이 들어가는 걸 느낀 위장이 기다렸다는 듯 꼬르륵거렸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하긴, 현주가 그런 말을 했었다. 30분 동안 섹스를 하면 300칼로리가 소모된다고.

“그럼 나는 몇 칼로리를 쓰는 거야.”

매일 같이 지쳐 잠이 들 정도였다. 계산해보려다가 포기한 은서는 입안에서 까끌거리는 음식물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내 다이어트 비법이야.”

비밀을 전수해준다는 듯 앙큼하게 윙크하던 현주가 떠올랐다.

그녀는 제가 하정혁과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현주를 생각하니 자연스레 민정이 생각났다.

걱정 많이 하고 있을 텐데…….

심란해지려는 마음을 떨친 은서는 몇 입 먹지 않은 샐러드를 내려놓았다.

지켜보는 이도 없으니 조금 후에 다시 먹어야겠다 싶었다. 유독 제가 먹는 것에 신경을 쓰는 남자였다.

“뭘 그리 탐스럽게 봐. 왜, 먹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먹어 봐, 그럼. 네 입에 맞는지.”

“…….”

“이 세우지 말고, 먹을 거면 제대로 먹어.”

두툼하게 올라선 걸 제 손에 쥐여주던 그가 생각났다.

입에 담기 버거워 쿨럭이자 바로 뱉어내게 하던 것도.

함부로 저를 대하는 듯 엉망으로 굴면서도 막상 어느 선 이상을 넘지 못하는 남자.

드러나는 다정함을 숨기려 드는 이상한 남자.

은서는 눈을 감고 정혁을 그렸다.

짙게 일자로 뻗은 눈썹 아래, 서늘하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턱선에 높이 솟은 콧날.

바늘 하나 파고들지 못할 것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몸은 오래전, 유럽 여행 때 박물관에서 봤던 고대 조각상처럼 아름답게 균형이 잡혀있었다.

그를 처음 본 날, 현주는 제게 정혁이 여자로 하여금 음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남자라고 했다.

지금은 그녀의 표현이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무심한 얼굴이 탐욕에 젖어 미끄러지듯 일그러지면, 저절로 몸이 찌르르 울리곤 했으니까.

문득 손가락 끝이 근질거렸다. 그를 생각하고 있자면 불쑥 불쑥 그리고 싶은 여러 이미지가 튀어올랐다.

정혁을 생각하던 은서는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 뒤로 함께 비치는 배경을 스윽 훑었다.

은서는 이제야 제가 처음으로 이 집을 둘러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족히 100평은 될 것 같은 커다란 집이었다.

그간 데려갔던 여타 집이 아니라, 실제 정혁이 사는 집이었다.

제 공간으로 데려온 것도 놀라웠는데 심지어 그는 어디든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달간 그녀가 시간을 보낸 곳은 침실과 그 안에 딸린 욕실, 부엌과 거실이 전부였다.

한 달 내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그에게 매달렸고 그는 기꺼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선사했다.

몸이 척척해지는 게 느껴져 민망해진 은서가 서둘러 거실 TV를 켰을 때였다.

[종교인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소득세법 개정안이 유예됐습니다. 올해 초,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시행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차중훈 한우리당 의원 등 국회의원 33명이 유예안을 발의하면서……]

“!”

뉴스 화면에 나오는 얼굴을 본 순간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겨우 숨을 토해낸 은서가 리모컨을 찾다가 거실 소파에 거꾸러지듯 쓰러졌다.

가까스로 마음 깊은 곳에 눌러두었던 이름이 퍽하고 튀어나오며 은서의 마음을 무너트렸다.

겨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은서가 좌절감에 괴로워할 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혁 외에 다른 사람일 리 없었다.

은서는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달려갔다.

현관문이 열리고 그의 얼굴이 보였다.

"상당히 반기는군."

제 앞까지 조르르 달려온 은서를 보며 정혁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늦는다고 했잖아요."

"글쎄, 누가 서운해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

"밥은."

"먹었어요."

거실 쪽을 힐끔거리는 은서의 시선을 따라 간 정혁이 알만하다는 듯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밥이 아니었던 모양인데.”

“어쨌든 먹긴 먹었잖아요.”

은서가 다급히 정혁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서, 칭찬해 달라는 건가?"

현관문을 넘어온 그는 어느새 은서의 코앞까지 와있었다.

그의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그를 올려다보던 은서는 기다렸다는 듯 한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응, 칭찬해 줘요."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벨트를 움켜쥐었다.

정혁의 입술 끝이 올라섰다.

그는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했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침대? 아니면, 눈 오는 풍경이나 보면서 할까."

그가 넥타이를 천천히 끌어 내리며 은서의 의사를 물었다. 그러다 버클을 푸는 손의 다급함을 보고는 비싯거렸다.

"그럴 여유조차 없겠군."

몸을 숙여 은서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싼 정혁은 은서의 엉덩이를 받쳐 손쉽게 안아 올렸다.

허공으로 뜬 은서의 손이 본능적으로 단단한 어깨를 짚었다.

"칭찬받고 싶을 땐 어떻게 하라고 했지?"

답을 알고 있는 은서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제 입술을 가져갔다.

서늘한 말과는 달리 그의 입술은 뜨거웠다.

단단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린 은서는 생명수라도 되는 듯 그의 입술을 빨아댔다.

그는, 은서가 방황 끝에 찾아낸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바로 현관 앞에서 안을 생각은 없었던 정혁이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은서가 어설프게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읏.”

욱신한 통증에 낮게 신음을 흘리니 은서의 몸이 긴장한 듯 뻣뻣해지는 게 느껴졌다.

미안했는지 혀끝으로 달래듯 문지르던 은서가 다시금 성급하게 그의 혀와 제 것을 얽었다.

“…….”

이상하다 싶었던 정혁은 은서에게 응해주면서도 집 안으로 귀를 기울였다.

[교육부는 오늘……]

희미하게 딱딱한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뉴스를 본 모양이었다.

정혁은 최근 들어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을 떠올렸다.

은서가 매달리는 이유를 알게 된 정혁은 망설임 없이 안고 있던 몸을 내려놓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고개를 비틀어 어설프게 깔짝대던 작은 혀를 물고 빨아대자 작게 벌어져 있던 입술이 헐떡이며 들어갈 공간을 넓혀 주었다.

딱딱하게 세워 더욱 깊숙이 밀어 넣으며 입천장을 꾹 눌렀다.

동시에 옷 틈을 자유롭게 벌리고 들어간 커다란 손이 아래위의 여린 살을 무례하게 움켜쥐었다.

“하아, 하아.”

혀를 쑤욱 뽑아내자 타액이 길게 늘어지다 아래로 흘렀다.

“뭐 해, 손이 놀잖아.”

붉어진 눈가에 입을 맞춘 뒤 귓가에 속삭이자 작은 손이 조신하게 다가와 제가 풀다 만 버클을 마저 풀어냈다.

철컥, 뱀처럼 기다란 가죽끈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재질의 홈웨어가 하얀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정혁의 은밀한 곳으로 찾아 들었다.

그 와중에도 거실 TV 쪽을 신경 쓰지 않으려 고집스레 시선을 제게 붙이고 있는 은서를 본 정혁이 목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넥타이를 풀어냈다.

“눈 감아.”

감은 눈 위로 부드러운 실크가 덮였다.

“내가 말했지.”

“하아.”

시야가 가려진 탓에 다른 감각이 예민하게 섰다.

가빠지는 호흡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아무것도 보지 말고, 듣지 마.”

귓가에서 끈적한 언어가 흘러 들었다.

“나만 보면 돼.”

“……아!”

이윽고 익숙한 쾌감이 몸을 뚫고 들어왔다.

*닿은 부위로 느껴지는 온기가 아직 뜨거웠다.

한숨 같은 호흡에 남은 열기를 흘려보내는 은서를 품에 안은 정혁이 거실 소파에 눕듯이 기댔다.

조명 하나 켜 두지 않았지만, 커튼을 걷어 놓은 탓에 서로를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함박눈을 뚫고 들어오는 달빛에 적당해진 어둠이 오히려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눈 와.”

“……봤어요.”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동그마한 어깨를 옴작거린 은서가 제 몸을 바짝 붙여 오며 중얼거렸다.

“……그래.”

정혁은 습관처럼 은서의 긴 머리와 움푹 팬 등허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내려앉은 침묵이 편안했다.

함께 내리는 눈을 한참이나 보고 있을 때였다.

“있잖아요.”

은서가 입술을 어름거리다 말을 건네왔다.

“……나, 그림 그리고 싶어졌어요.”

“!”

허리 부근에서 노닐던 긴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적나라한 반응에 머쓱해진 은서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나가 얼굴을 마주 보려 하자 정혁이 덩달아 몸을 세웠다.

정혁의 다리에 손을 올려두고 몸을 숙인 탓에 흘러내린 긴 머리가 노출된 하얀 가슴을 가렸다.

“집에서 그림 그려도 돼요?”

빈 캔버스 위에 마구 쏟아내고 싶은 충동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얼마든지.”

그가 은서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치며 입술을 머금었다.

오래지 않아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미소였다.

“……준비해 놓을게.”

“고마워요.”

어쩐지 쑥스러워진 은서가 눈을 내리깔며 그에게 다시 제 몸을 붙였다.

풀썩 제게로 쓰러지듯 안기는 은서의 머리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에 입술을 묻은 정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맙다, 차은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다던 그녀였다.

유일하게 그녀가 제 의견을 피력하는 건 그에게 안겨 올 때뿐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안기는 그녀에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여겼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그의 여린 공주님은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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