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55화 (55/82)

55.

거품을 내 몸을 문지르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조금 전 흉흉한 제 열기를 확인시키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한 얼굴이었다.

“…….”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은서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심장이 그에게 반응하듯 서서히 큰 소리로 박동하고 있었다.

점점 커져 이제 몸 전체를 울리는 심장 소리가 제 피부 위를 오가는 그의 손에 닿을 것만 같았다.

‘아…….’

발밑에서부터 시작된 꾸덕한 불안이 슬금슬금 온몸으로 퍼졌다.

그의 집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 시간 내내 정혁은 오로지 저에게만 집중했다.

더없이 무심한 얼굴과 말투로, 그는 자신을 소중한 공주님을 대하듯 굴었다.

게임이라고 해 놓고서.

즐길 뿐이라고 해 놓고서.

그가 저를 설득시키며 했던 말과는 전혀 달랐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것 같은……

“…….”

은서가 주먹을 꾹 쥐었다.

지금 제가 힘들어서, 그의 다정함을 착각하는 걸 거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그와의 섹스만이 목적이 되어야 했다.

품에 안겨 매달리고 그가 주는 쾌락에 현실을 잊고, 그러면 되는 거였다.

하정혁은 제게 도피처일 뿐, 그 외에 다른 존재가 되어선 안 됐다.

그런데……

혼란스러웠다.

제가 그어 놓은 선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정혁때문에 헷갈렸다.

함부로 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절 위한 배려였다.

그의 다정함에 길들여진 나머지 정혁이 제 곁에 있는 게 당연해지고 있었다.

아니 그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다른 미래를 자꾸만 상상하게 됐다.

그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그에게 쾌락이 아닌 다른 것을 바라고 싶어졌다.

정혁과 제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될 다른 단어와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그의 뒤로 달라붙는 게 보였다.

‘안 돼.’

인형 같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균열이 생겼다. 눈을 질끈 감은 은서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으며 외면했다.

중훈과 수영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래서 제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도 잘 알면서, 이런 걸 느끼는 제가 끔찍하고 한심했다.

혹시나 하고 기대하는 제가 비참했다.

“왜 그래, 눈에 들어갔어?”

정혁이 손을 떼어내려 하자 은서가 절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보이면 안 돼.’

지금 이 표정을 보이면 그에게 다른 감정을 들킬 것만 같았다.

나는 절대 그런 허망하고 부질없는 감정에 매달리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전부 당신 때문이다.

당신이 날 안지 않아서, 그래서 잠들 수 없어서, 자꾸만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아파? 어디 봐봐.”

정혁이 강제로 은서의 손을 떼어내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보였다.

울지 않으려고 버티는 고집스러운 얼굴이었다.

모든 걸 정혁의 탓으로 돌린 은서가 눈을 뜨고 원망스레 그를 바라봤다.

“…….”

커다란 눈망울에 든 감정을 본 정혁이 망설이듯 침묵하다가 곧 샤워기를 틀어 은서의 몸을 깨끗하게 했다.

몸을 적시던 물줄기가 사라지고 정혁이 은서에게 제 입술을 부드럽게 붙였다가 떼어냈다.

“……알겠어.”

입술 바로 위에 멈춘 그가 달래듯 속삭였다.

모를 리 없었다. 차은서가 생각하는걸.

“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그가 허리를 감아오며 깊이 입술을 맞물렸다.

은서는 기다렸다는 듯 두 팔로 그의 목덜미를 단단히 휘감았다.

축축한 증기 속에 섞이는 열기가 온몸을 뜨겁게 했다.

제발 그가 배려 없이, 저를 엉망으로 안아줬으면 싶었다.

쓸데없는 생각 같은 거…… 다시는 하지 않도록.

*"……우는 건가."

느긋하게 몰아붙이던 정혁이 허리를 멈추고 물었다.

느끼는 지점만 골라 정확히 짓치던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흔들거리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이미 몇 번이나 그에게 안겨 절정에 몸을 떤 뒤였다.

"……아뇨."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건 딱 한 방울이었는데, 그는 은서가 내보인 찰나의 미세한 반응도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그녀가 울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사람처럼.

뜨거운 정염에 휩싸여 밀착되어있는 몸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들어찼지만 은서는 입을 앙다문 채 버텼다.

"……."

고집스레 입을 다문 그녀를 내려 보던 정혁은 더 이상 묻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쯤에서 관심을 끄려는 걸까? 은서가 안도하려던 찰나.

“……아! 으응.”

천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그의 움직임에 허리가 들리며 저절로 비음이 샜다.

그가 갑자기 멈춘 탓에 희미해졌던 감각들이 되살아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은서는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붙들기 위해 애썼다.

가장 깊은 곳까지 단단하게 들어선 걸 여유롭게 놀리면서도, 그의 짙어진 눈은 은서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댔다.

정혁과 눈이 마주친 은서는 손을 들어 축축해진 눈을 가렸다.

그가 저렇게 볼 때면 어쩐지 견딜 수가 없었다. 감정 없는 까만 눈동자가 집요하게 속을 파고드는 것만 같아서.

"안, 흣, 울어요."

시트 자락을 움켜쥐며 은서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

눈을 덮은 손 위로 정혁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좀 보지 말아요.

"그래?"

이대로 그가 모르는 체 해줬으면. 그냥 넘어가 줬으면.

쾌감에 취해 흘리는 의미 모를 눈물 같은 거,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은서의 바람과는 달리 뜨거운 손가락이 수갑처럼 손목을 감아왔다.

어느새 그의 입술까지 끌려간 새하얀 손바닥 위로, 정혁이 낙인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짙어진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에게 박아놓은 채였다.

"……아쉽네."

정성 들여 주문을 새기듯, 정혁은 느리고 무겁게 입술을 놀리며 속삭였다.

"우는 게 더 예쁜데 말이야."

그의 낮은 목소리와 뜨거운 숨결이 더 가까워졌다.

“그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고 엉망으로 울면…… 더 흥분되거든.”

그의 노골적인 말에 반응한 몸이 저절로 움찔하더니 아래가 바짝 조여들었다. 그녀의 솔직한 반응을 느낀 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몸은 솔직하지. 안 그래?”

그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늘어졌다. 네 마음 따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였다.

은서의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묘한 줄다리기 끝에 매달리고야 마는 이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은서는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그냥 빨리……."

은서는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이미 쾌감에 절여질 대로 절인 몸은 끝을 원하고 있었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은서는 정혁의 입술이 닿아있던 손바닥을 미모사처럼 오므렸다.

"우리 공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웃음기가 조금 섞인, 놀리는 기색이 가득한 말투였지만 따질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얼른요.”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다리로 감아 당기며 재촉하자 정혁은 기꺼이 응하며 착실하게 은서의 가느다란 다리를 힘주어 잡았다.

빨라진 그의 움직임을 따라 미묘하게 멈춰있던 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소리, 참지 말라고 했을 텐데."

흐드러진 쾌락 속에서 그의 명령 같은 말이 또렷이 들렸다.

"흐읏."

착실한 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은서는 깨물었던 입술을 열고 목 언저리에서 맴돌던 소리를 터트렸다.

맺혀있던 응어리를 떨치듯이 억눌려 있던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다시 시작된 쾌감은 빠르게 몸과 이성을 잠식해서, 은서는 제가 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없었다.

“하으, 흑…….”

신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은서는 그저 정혁이 이끄는 대로 몸을 떨었다.

“그래, 잘하고 있어.”

정혁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넌 지금처럼 그냥 울면서 나한테 매달리면 돼.”

그의 커다란 몸 아래에 갇힌 이 순간만큼은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어.”

그저 태풍에 휩쓸리는 작은 돛단배처럼, 그가 움직이는 대로 철썩이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지금 이 시각까지도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제설 작업이 한창입니다만 혼잡한 퇴근길이 예상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분께서는…….]

휴대폰으로 보던 뉴스를 꺼버린 도훈이 가져올 게 있다며 사라졌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탓에 내내 책상에 붙어 있던 정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침부터 오던 눈이 그칠 생각을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겨울 오후 햇빛 속에 커다란 눈이 내리는 풍경은 퍽 예뻤다.

“차은서가 봤으려나…….”

올겨울 들어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게다가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정도로 쏟아지는 함박눈이었다.

“하필 오늘.”

정혁이 혀를 찼다.

이 풍경을 은서와 같이 볼 수 없다는 게 사뭇 아쉬웠다.

집에 있었다면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나란히 앉아 감상했을 텐데.

회사에 나온 건 한 달만이었다.

“이번 미팅은 꼭 참석해야 돼. 알지?”

정혁의 마음이 바뀔까 걱정하던 도훈이 몇 번이나 확답을 받아낼 정도로 중요한 자리라 어쩔 수 없이 은서를 두고 나와야만 했다.

회의는 끝났지만, 그 이후의 내용을 정리해야 하다 보니 곧장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제 건강상 위험한 시기는 지났지만, 그녀를 집에 혼자 둔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자꾸 걱정이 앞섰다.

“일어났으려나.”

정혁은 휴대폰 화면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세 시. 애매한 시간이었다.

오늘 혼자 남아 있어야 할 은서가 걱정돼 일부러 새벽까지 놓아주지 않고 집요하게 안았다.

그래야 지친 그녀가 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아침에만 해도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만 눈에 담고 나온 후였다.

고민하던 정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직 자는 건가.’

-네.

“.......일어나 있었네.”

역시나 길어지는 신호음에 끊으려던 그가 뒤늦게 놀랐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자고 있어야 하는 게 맞았다.

-방금 일어났어요.

아직 잠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저녁까지는 쓰러져있을 줄 알았는데. 체력이 좀 생긴 건가.”

-덕분에요.

퉁퉁 부어있을 얼굴이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정혁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은서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늘 늦을 거야.”

-얼마 나요?

“…….”

불안한 듯 다급히 물어오는 은서에 정혁이 침음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그녀의 마음이 다 회복된 건 아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 벌써 그리운가? 어젯밤에 기절한 걸로는 부족했나?”

정혁은 걱정을 드러내는 대신 짓궂은 말을 건넸다.

-제 목소리 안 들려요? 완전히 가라앉은 거.

뾰로통한 목소리가 돌아오는 걸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밥은.”

-먹을게요.

“잘 챙겨 먹어. 그럼 예뻐해 줄 테니까.”

-두 번 예뻐했다가는 목소리를 잃겠어요.

“말대꾸하는 걸 보니 쌩쌩한데. 어제 많이 봐준 것 같아 후회되네.”

-……그만 끊을게요, 목이 아파서요.

“그래.”

정혁이 웃음을 삼키며 통화를 끝냈다.

감금 상태였던 차은서를 데려왔던 날,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처럼 생기 없던 때에 비한다면 많이 밝아진 거긴 했다.

“은서 씨?”

“응.”

문을 열고 들어온 도훈이 막 통화를 끝낸 정혁을 보며 물었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하정혁이 저렇게 따스한 얼굴을 할 리 없었다.

“박사님 이야기 들어보니까 많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네가 애 많이 쓴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런가.”

정혁이 조소하듯 미소 지었다.

만약 제가 차은서에게 하고 있는 짓을 알고도 그리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녀의 심리 상담을 맡은 의사가 알게 된다면 당장 은서를 그에게서 떼어내려 할지도 몰랐다.

쾌락에 의존하는 그녀를 말리기는커녕 돕고 있으니까…….

“많이 변했네. 은서 씨 때문인가?”

“?”

“아니야, 아무것도.”

도훈은 복잡한 빛을 띠는 정혁의 표정을 보며 새삼 놀라웠다. 원래 저렇게 표정이 풍부한 녀석은 아니었다.

“빨리 끝내자.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정혁이 날카로운 눈을 장착하며 서둘렀다.

늘 봐오던 모습이긴 했지만, 누가 봐도 지금의 정혁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밥, 먹기 싫은데.”

톡 쏘는 탄산처럼 앙칼지게 굴던 기운은 사라지고 무기력한 우울감이 은서를 에워쌌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몸을 웅크리니 서늘한 한기가 가운을 타고 피부에 스며들었다.

은서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가만히 손으로 쓸어보았다.

한 번씩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깰 때면, 항상 그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고 있었다.

그럴 때면 근육이 빼곡하게 잡힌 그의 커다란 몸이 주는 약간의 갑갑함과 온기에 묘하게 안심이 되고는 했다.

최근에는 그와 관계를 나누고 지쳐 잠들기 바빠서 악몽을 꾸는 횟수조차 줄어버리긴 했지만.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든 은서는 달력 앱을 눌러 천천히 날짜를 셌다.

“한 달……. 한 달이라.”

은서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함박눈이 내린 세상은 새하얬다.

내일이면 벌써 이곳에 갇힌 지도 한 달이다.

자유로운 감옥이었다. 지난 한 달간 집 밖으로 나간 적은 없었다. 먹고, 자고, 그와 몸을 섞은 게 전부였다.

모든 시간을 속박당하고 그에게 목줄을 내주고 길들여지는 걸 선택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제 선택으로.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 있다 보니 참 편안했다. 제게 벌어졌던 모든 사건들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렇지만…… 조금씩 건강이 회복될수록 이성 또한 커져갔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을 거라는 현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그가 회사에 나간 것도, 아마 몇 번이고 거절하고 거절하다 갔을 거라는 게 눈에 훤했다.

언제까지 그를 제 곁에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하아…….”

그를 놓아야 한다는 이성과 놓고 싶지 않은 본능이 매일 같이 줄다리기를 했다.

답이 없는 싸움을 하다 보면 결국 생각하길 포기하고 그에게 매달리는 걸로 끝이 나곤 했다.

“첫 번째 조건이야. 굶는 건 절대 안 돼.”

그가 무심하게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일단 먹자.”

생각을 멈춘 은서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보다 살이 더 빠진다면 그는 저를 절대로 안지 않을 거였다.

그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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