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은서의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피어났다.
“……그럼 안아줄 거예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 은서에 정혁이 한숨을 삼켰다.
버티지도 못할 몸이면서 안기려 드는 걸 보니 절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손에 쫀득하게 감기던 살결을 어루만지고 싶고 제 아래에서 흐느끼던 낭창한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으나……
정혁은 은서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상념을 지웠다.
지금의 차은서는 욕정을 앞세워 안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노라 했던 다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거절해야 차은서가 순순히 수긍할까 고민하던 정혁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 같네.”
“?”
“네가 날 유혹하려는 게. 그렇지?”
“…….”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진 은서가 정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곧장 입을 맞춰오는 대신 짓궂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어쩐지 심술부리고 싶어져.”
정혁이 붉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느른하게 핥았다.
“나는 네가 날 유혹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게 좋거든.”
“…….”
“그러니, 다시 게임을 해볼까.”
정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침묵은 동의로 간주하지.”
은서는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떼어냈다.
순 제멋대로였다.
그래도 은서는 반발하지 않았다. 정혁이 제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 것이 차라리 편했다.
은서는 결국 그의 이상한 설득에 제가 쉬이 넘어가리라는 걸 알았다.
아니, 처음 게임을 제안해 오던 때처럼 조금 매혹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끝끝내 넘어가게끔 만들고야 마는 위험한 유혹을 쉽게 내뱉는 이상한 남자.
“조건을 내 걸지.”
“……조건이라뇨?”
은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서로의 동의하에 하는 섹스에 조건까지 필요할까 싶었다.
“내 손을 잡고, 내 집에 들어왔으면, 내 뜻에 따라야 하지 않겠어?”
“……치사해.”
“잊었나 본데, 나는 사업가야.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안 해. 그런 내가 계약상 을이 되어주는 거라고.”
“…….”
“차은서, 너 하나 때문에. 내게 원하는 걸 얻고 싶다면, 너도 내가 원하는 걸 내놓아야지.”
입꼬리가 비죽 올라선 그는 참 오만해 보였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어서 은서는 입을 다물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거였고, 지금 그의 몸이 아쉬운 건 저였다.
“난 우리의 관계가 꽤 마음에 들어, 재미있거든.”
은서는 픽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에 안도하는 자신이 퍽 우스웠다.
“벌써, 꽤 중독된 것도 같고.”
제게 닿는 그의 시선이 외설적이었다. 은서는 저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너도 마찬가지라는 거 알아. 그러니, 쉽게 우리의 계약이라고 생각해.”
정혁이 담백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이렇게 해서 은서의 마음속에 남을 불편함을 깨끗하게 지워낼 목적이었다.
제 곁에서 떨어지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하도록.
“알겠어요.”
은서는 순순히 수긍했다.
“말이 잘 통해서 좋군.”
정혁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조건은 간단해. 내가 하라는 대로 하고, 생각하라는 것만 생각해.”
“…….”
“쉽지?”
“……그러네요, 쉽네요.”
정혁이 제 손을 잡고 있던 은서의 손을 휘감아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일단 살부터 찌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을 긁듯이 문질렀다.
“이 상태인 널 안으면서 쓰레기가 된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아.”
“…….”
“알잖아. 내가 널 어떻게 안는지.”
그의 말에 머릿속에 여러 장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귀까지 화르륵 열이 올랐다.
“적어도 버틸 정도는 되어야지.”
가볍게 혀를 찬 그가 손목을 놓아주자 은서가 후다닥 식탁 밑으로 손을 내렸다.
“첫 번째 조건이야. 굶는 건 절대 안 돼.”
“……알았어요. 그럼…….”
날 언제 안을 건데요?
은서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앙다물자 정혁이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리 와.”
정혁이 제 앞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
의아해하면서도 은서는 그의 앞으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벗어.”
“!”
은서가 제 앞에 서자마자 정혁이 짧게 명령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당황한 은서가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벗어. 아니면, 벗겨 줘?”
정혁이 확인시켜주듯 한 번 더 목소리를 꾹 눌렀다.
“…….”
지금은 아니라더니.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은서가 머뭇거리다가 니트 끝자락을 끌어 올렸다.
속옷을 드러낸 채 그의 앞에 서자 어쩐지 부끄러워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욕정이 담기지 않은 정혁의 새까만 눈동자가 아래로 향하는 게 보였다.
“!”
정혁의 손이 허리를 잡고 미끄러져 올라오다 가슴 바로 밑에서 멈췄다.
“네가 널 안는 건.”
그의 손가락 끝이 빗장뼈를 슥 훑었다.
“이 뼈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날로 하지.”
“…….”
눈만 들어 올린 정혁과 눈이 마주쳤다.
“동의해?”
“…….”
오늘따라 퇴폐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에 은서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주변에 별일 없니?”
“……왜요?”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과일을 먹을 때였다.
“너, 아는 게 있구나.”
슥 던진 말에 움찔하는 지석의 반응을 본 형교가 확신을 갖고 추궁했다.
제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오랜 검사 생활로 쌓인 촉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은서, 어떻게 된 거냐?”
“…….”
“은서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지석이 포크를 내려놓자 성연이 덩달아 놀라 물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왜 물으시는데요?”
“중훈이, 그 친구가 찾아왔었다.”
지석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모르는 체해주세요.”
“?”
“저 믿고,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주세요. 아저씨가 뭘 부탁해도 들어주지 마세요.”
“위험한 일이라도 생긴 거면 어쩌라고 무턱대고 모르는 체해달래.”
“……은서는 지금 집에 돌아가는 게 더 위험해요.”
“…….”
오히려 집에 가는 게 더 위험하다라.
형교는 가족 모임에서도 좀처럼 드물게 웃던 은서를 떠올렸다.
그녀가 상당한 압박감 속에 있다는 건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혹시, 너와 관련이 있는 거니.”
짚이는 구석이 생긴 형교가 슬쩍 흘리듯 물었다.
최근 지석의 태도도 그렇고, 모임 내내 은서의 반응을 생각해 봤을 때 혹 억지로 그런 자리에 온 게 아닐까 싶었다.
지석의 짝사랑이었을 뿐, 은서 입장에서는 소꿉친구와 갑자기 그런 식으로 엮으니 거부감이 들 수 있었다.
“그런 간단한 이유는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은서를 곤란하게 한 건 맞아요. 저를 위해서라도 아저씨에겐 아무것도 전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은서를 크게 다치게 했거든요.
끝말은 전하지 못한 지석이 입을 다물었다.
“……어휴, 그 집은 참 느낌이 그래.”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에 성연이 목소리를 높여 끼어들었다.
“음?”
“아니, 뭐랄까. 보면 화목한 것 같은데, 느껴지는 게 묘하달까?”
성연이 혀를 끌끌 차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거 당신 똥촉이 또 발동되는 거 아닌가?”
“어머? 내 촉이 얼마나 좋은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다행히 이쪽으로 관심이 넘어온 듯 하자 성연이 기억을 더듬었다.
“수영 씨도 보면, 웃고는 있는데 꼭 우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랬다고요. 그런데 이번에 은서 보니까 꼭 비슷하더라니까.”
“흠.”
종알대는 성연과 달리 지석과 형교의 표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어두워졌다.
*“많이 좋아졌네.”
마치 숙제 검사를 하듯 담백한 말투였다.
“살도 좀 붙은 것 같고.”
맨살 위를 문지르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은서가 움켜쥐고 있던 옷자락을 놓자 하얀 피부가 금방 하늘색 니트에 가려졌다.
매일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그는 꼭 사명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은서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은서는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옷자락을 들어올려야 했다.
처음에는 그 순간이 어색하고 민망했지만, 그의 무덤덤한 반응에 덩달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좋아. 잘 지키고 있네.”
볼 일을 다 봤다는 듯 은서를 혼자 세워둔 그가 침실로 향했다.
샤워하러 가는 거였다. 이것조차 늘 똑같은 순서였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심술이 났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안아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마네킹을 보는 것만도 못한 시선으로 저를 무감하게 보는 정혁의 눈동자가 미웠다.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더니, 도피처니까 마음껏 이용하라더니!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는 거 뻔히 알면서…….
제발 지쳐서 편히 잠들 수 있을 때까지 그가 저를 몰아붙여 줬으면 싶었다.
침실 안으로 따라간 은서는 비장하게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가 벗어 둔 셔츠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곧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
은서는 그가 만졌던 부위를 제 손으로 짚었다.
이만하면 원래의 체형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계약을 지키려고 입맛이 없어도 꾸역꾸역, 얼마나 성실하게 끼니를 챙겼는데.
결심한 은서는 니트를 벗어 던지고 입고 있던 바지도 벗었다.
브래지어의 고리를 풀고 손가락을 걸어 아래 속옷까지 벗었다.
전에도 매달리니 모르는 체 넘어가 줬던 그였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떨리는 마음에 입술을 혀로 핥은 은서가 욕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
머리를 적시는 그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자 정혁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먹힐까?’
궁금해하며 그의 등에 볼을 묻었다.
“뭐 하는 거야?”
샤워기의 물을 끈 정혁이 은서의 손목을 잡아 앞으로 끌며 물었다.
“유혹하는 거예요.”
있는 힘껏 버티며 그것도 모르냐는 듯 톡 쏘아붙이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차은서.”
“…….”
“불안해?”
“…….”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버티자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왔다.
그리고 은서의 턱을 쥐고 저를 보게 했다.
정혁의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눈가에 떨어진 물방울에 슬쩍 눈을 찌푸렸을 때였다.
뜨겁고 부드러운 게 입술을 머금어 왔다.
“흡.”
격정적인 키스였다. 벌을 주듯 살덩이를 옅게 깨물다가 깊게 빨아들이는 그의 행위에 숨이 모자라 허덕여야 했다.
“하아.”
한참을 잡아먹을 것처럼 농락하던 그가 입술을 떼어냈다. 짙은 눈동자가 제게 박혀 있었다.
“후.”
한숨을 쉰 그가 은서의 손을 잡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봐.”
“!”
“참는 거야.”
그가 다른 한 손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얌전히 씻자.”
은서의 머리 위로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몸 아래는 여전히 화가 난 그의 것에 붙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