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53화 (53/82)

53.

“서류 확인했어. A 반도체 건은 보류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진행해.”

전화로 업무 이야기를 하는 정혁의 다른 한 손은 연신 냄비 안의 내용물을 젓고 있었다.

도훈이 본다면 기함할 만한 광경이었다.

“……그래, 아. 다시 전화할게.”

부스럭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와 정혁은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

“뭐해요?”

잠에 취해 비몽사몽하던 은서가 눈을 부비며 나왔다.

정혁의 곁에 있다는 게 현실이라는 걸 인지하고 나니 그간 밀렸던 잠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것 같았다.

“너 먹일 거.”

정혁이 픽 웃으며 인덕션의 전원을 껐다.

은서가 자연스럽게 제 몫의 수저를 챙겨 식탁 앞에 앉았다.

집으로 데려오고서도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녀는 조금씩 일상의 패턴을 찾기 시작했다.

잠이 줄어드는 만큼 먹는 양은 조금씩 늘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혈색도 꽤 돌아왔고 생기도 희미하게나마 살아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정혁을 안도하게 했다.

제 곁에서 은서가 평온을 찾아가고 있다는 게.

“……그런데.”

은서가 죽을 떠먹다 말고 정혁을 힐끔거렸다.

“회사는 안 가요?”

식탁에 양손을 짚고 서서 은서의 먹는 양을 지켜보던 정혁이 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차은서, 살만해졌나 봐?”

“네?”

“내 걱정도 다 해주고 말이야.”

“아니…… 계속 집에 있는 것 같아서.”

잠에 취해 있을 때야 몰랐다지만, 이제는 모를 수가 없었다. 정혁이 24시간 내내 제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쯤은.

그뿐인가.

삼시세끼 제 끼니까지 직접 챙겨 해 먹일 정도였다.

“차은서가 내 집에서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거든.”

“……누, 누가 죽는다고 그래요.”

되레 찔린 은서가 말을 더듬었다.

딱히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망가진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건 사실이었다.

그의 집에 오고 나서도 악몽을 꾸다가 깨어나고, 곁에 있는 그를 보며 안도하길 반복했다.

그는 정말 제가 죽을까 봐 걱정돼 곁을 지키는 걸까.

생각이 복잡해진 은서는 괜히 숟가락 손잡이 부분만 만지작거렸다.

“차은서.”

그 모습을 본 정혁이 느른하게 몸을 일으키며 팔짱을 꼈다.

“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은서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일단 먹어.”

정혁의 눈동자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

그의 단순명쾌한 지시에 은서가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다시 집었다.

“차은서.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내가 한 번 더 확인시켜줘?”

시키는 대로 얌전히 죽을 떠넣고 있자니 정혁이 맞은편 의자를 드르륵 빼 앉으며 물었다.

“…….”

무얼 말하려는 걸까.

“이거 보여?”

은서가 물끄러미 눈으로 묻자 정혁이 식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은서의 손등을 가리켰다.

정혁이 늘 약을 발랐는데도 아직 빠지지 않은 멍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넌 감금당했다가 겨우 탈출한 상태야. 그리고 널 둘러싼 상황은 복잡한 데다 아주 엿 같지.”

“…….”

“게다가 널 이렇게 상처 입힌 사람은, 네가 악착같이 버티고 지켜내려 애쓰던 네 부친이지.”

그가 차갑게 나열하는 이야기가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되어 피부 위로 꽂혔다.

제가 겪은 거였는데도, 정혁의 입으로 들으니 더 비참하고 서러웠다.

“이게 누구나 겪는 일 같아?”

“…….”

“……절대 아니지.”

힘 빠진 손가락 사이로 숟가락이 주르륵 흘러내려 챙그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은서.”

정혁이 은서의 턱을 감싸 쥐고 들어 올려 강제로 그를 보게 했다.

“울어.”

그가 창백해진 은서를 보며 명령했다.

“아파하고, 원망해. 당연히 그래도 되는 거고, 그래야만 하는 거니까.”

은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못 하겠어?”

“……그냥,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은서가 하소연하듯 텅 빈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픈 건지도, 슬픈 건지도 모르겠어. 난…… 이제 뭘 해야 해요?”

지금껏 억지로 지켜 온 세상은 무너져 내렸고, 갈 곳 없는 나는 막막하기만 한데.

“알려줄게, 네가 뭘 하면 되는지.”

“…….”

은서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냥 지금처럼 먹고, 자고, 그것만 해.”

은서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군.”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정혁만의 것이었다. 어디에도 은서의 의지는 보이질 않았다.

괜찮은 척 버티지만, 상처뿐인 그녀의 마음이 훤히 보였다.

“날, 왜 데려왔어요?”

은서가 내내 생각하던 걸 뱉어냈다.

“그게 왜 궁금하지?”

“하정혁 씨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정혁의 손을 잡고 도망쳤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 정혁에게 계속 폐를 끼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에도 못 가고 있잖아요.”

그리고 이미 그에게 많은 폐를 끼친 후였다.

은서의 힘없는 손가락이 제 턱을 쥐고 있던 정혁의 손을 밀어냈다.

“대표면서…….”

정혁은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는 은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널 사랑하니까.

지켜주고 싶으니까.

답은 간단했다. 단지 전할 수 없을 뿐.

산산이 조각난 마음에 전한다 한들, 온전히 닿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사랑을 다른 것으로 포장하면 될 일이었다.

“자꾸 같은 말을 하게 하네, 차은서.”

“?”

픽 조소하자 은서의 눈동자가 들렸다.

“난 게임에 졌어. 네 유혹에 넘어갔고, 널 안았지.”

“…….”

“그 대가로 네 도피처가 되어주기로 했잖아.”

은서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래서 넌 도망쳐 온 거야, 내 곁으로.”

차은서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면, 제가 그녀의 세상이 되면 될 일이었다.

차은서를 버티게 할 수단으로 저를 도구로 내어주고, 그녀의 산산조각 난 마음은 제가 모조리 먹어 치울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과 마음이 생겨날 수 있도록.

‘도피처…….’

은서는 정혁의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동정도, 연민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그는 담백한 어조였다.

그리고 그는 은서의 불안을 손쉽게 잠재웠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의 곁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모든 것이 간단해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건강이나 회복하도록 해.”

툭 던지는 그의 말에 은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네도 오랜만이구먼.”

“그렇지. 자네가 여의도 입성하고 나서 올 일이 없었지 않나.”

형교가 웃으며 대꾸했다.

갑작스레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온 중훈은 심지어 형교의 직장 근처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물론 중훈과 자리한 곳은 다른 손님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공간이긴 했다.

하지만 평소 같았으면 주변 눈을 의식해 일절 걸음하지 않았을 그였다.

‘아이들 문제 때문인가.’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기 전 함께 한 식사가 마지막 모임이었다.

중훈의 의도를 가늠해 보던 형교는 중훈의 혈색이 썩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흐흠.’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형교는 중훈이 입을 열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일단 식사부터 하세.”

중훈은 가까스로 만든 미소가 형교에게 들키지 않길 빌었다.

벌써 은서가 사라진 지도 일주일이었다.

지금도 은밀하게 사람을 풀긴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어디서 꼬리를 밟힐지 모르니 사람을 더 고용할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떠올린 사람이 바로 형교였다.

은서와도 사적인 친분이 있는 그이니, 어쩌면 개인적으로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사실, 부탁이 있어 찾아왔네.”

중훈이 본론을 꺼낸 건 식사 자리가 거의 마무리 됐을 때였다.

“…….”

형교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가?”

중의적인 질문이었다.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라네.”

중훈이 정에 호소하듯 말에 무게를 실었다.

“……일단 들어나 보지.”

형교의 반응에 중훈이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낯선 모습에 형교는 놀란 기색을 숨겼다.

중훈이 정치판에서 빠르게 잡은 비결은 쉬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늘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딸아이가 사라졌어.”

“……뭐?”

형교가 한 박자 늦게 미간을 찡그렸다.

“은서가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세히 얘기하지 못해 미안하네만…… 딸아이 찾는 걸 좀 도와주게나.”

“위험한 상황인가.”

형교가 다급히 되물었다.

“……그건 아니네.”

제게 앙심을 품고 은서를 납치한 거라면 지금껏 무어라 연락이 와도 왔을 터.

은서는 제 발로 사라졌다 보는 게 맞았다. 정황상으로도 그렇고.

“집을…… 나간 것 같아.”

“…….”

그러니까, 가출이라는 건가 지금.

형교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급한 상황이라면, 일단 실종 신고를 먼저 하는 게 어떤가.”

조금 안도한 형교가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아무리 제가 검찰에 속해 있다고 하나, 사적인 문제에 공권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건 곤란하네. 언론에 알려지는 건 안 돼.”

고개를 내젓는 중훈은 확고한 태도였다.

언론을 걱정하는 걸 보니, 어쩌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안 사정은 함부로 판단할 게 아니었다.

“……일단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겠네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 주게.”

형교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어쨌든 자식 둔 아비로서 중훈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고맙네.”

중훈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만 먹을래요.”

“그래, 무리해서 먹지 마.”

“그래도 많이 먹었어요.”

며칠 내내 정혁이 시키는 대로 잘 먹고, 잘 자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게.”

은서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쳐다보자 정혁이 손을 뻗어 은서의 입술 끝을 슥 문질렀다.

“!”

순간 저릿한 감각이 몸을 에워쌌다. 정전기가 오른 것처럼 따끔거렸다.

은서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져 나가는 정혁의 손을 따라가다가 그의 입술로 향했다.

선명하게 붉은 입술이 눈에 박혔다.

“…….”

은서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저 색스러운 입술이 얼마나 야하게 저를 집어삼키는지, 제 몸을 탐했는지가 떠오르자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그러고 보니, 그의 품에 안긴 것도 벌써 꽤 오래전 일이었다.

문득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미쳤나 봐.’

얼굴을 붉힌 은서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

덕분에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어지럼증을 느낀 은서의 몸이 비틀거렸다.

“하여간, 눈을 못 떼게 하지.”

급히 손을 뻗어 은서의 어깨를 잡아 고정한 정혁이 쯧, 혀를 찼다.

강하게 쥔 힘에서 전해진 서늘한 온기가 어지럼증을 뚫고 감각을 깨웠다. 그의 손이 닿은 곳에 온 신경이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은서는 이 서늘함이 정염에 젖어들 때면 얼마나 뜨거워지는지 잘 알았다.

닿는 곳마다 마치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강렬한 열기였다.

온기를 잃은 듯 허전한 몸에 한기가 들었다.

그때가 그리웠다.

정혁의 품에 안겨 몸을 떨 때면 다른 생각 같은 건 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가 이 복잡한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내고 저로 채워줬으면 싶었다.

어느새 그녀는 단 하나의 열망만 떠올리고 있었다.

“……왜.”

제 손을 가만히 감싸 쥐는 은서에 정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겨우 핏기가 돌기 시작한 얼굴이 열이 오른 듯 붉었다.

살며시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나오는 숨결이 더웠다.

“…….”

은서가 바라는 바를 알게 된 정혁의 입술 끝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차은서.”

“…….”

“안아줘?”

정혁이 노골적으로 물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