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51화 (51/82)

51.

“차은서, 이제 뭘 하고 싶어?”

“…….”

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 목소리와 향기가 그리웠다. 현실을 잊게 해주는 그의 존재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전혀 아니었다.

흐렸던 의식이 맑아지고 온몸의 감각이 다시금 살아나는 것 같았다.

“…….”

은서는 가만히 손을 뻗어 정혁의 얼굴에 제 손바닥을 댔다.

서늘하지만 뜨거웠다.

다시, 돌아왔다.

하정혁의 곁으로. 보고 싶었던 이 남자에게로.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

“그냥…… 옆에 있게만 해주세요.”

“……그래.”

정혁이 은서의 손을 지그시 감싸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하지 마.”

정혁의 어둑한 눈동자가 단호했다.

“아무 생각할 필요 없어. 그냥 곁에 있어.”

*‘어떻게 된 거지?’

은서의 집 근처에서 서성이던 지석은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습관처럼 하루에 한 번씩 이곳에 오고는 했다.

처음에는 벨을 눌러보기도 했지만, 사람이 있는 게 확실한데도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한 번은 중훈과 마주친 적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은서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중훈은 은서가 해외에 나갔다며 차갑게 응수하곤 집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도저히 중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반응도 이상했고.

그 덕에 형교와도 이야기하고 정혁에게까지 찾아가게 된 거였지만.

‘이상해. 요즘 왜 계속 불이 꺼져 있지?’

은서의 방을 보며 불안해진 지석이 손을 떨었다. 만약 은서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거면 어떻게 하지.

‘그 남자일까.’

차라리 정혁이 은서를 데려간 거였으면 싶었다.

아무래도 정혁에게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은서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하면 미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석은 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서지석인데요.”

-…….

“은서……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어서요.”

-……안전한 곳에 있어요.

“아.”

짧은 침묵 끝에 나온 그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은서를, 만나고 싶습니다.”

-…….

“부탁드립니다.”

정혁의 침묵이 길어지자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인 지석이 다급히 매달렸다.

-둘이 만나고 말고는, 내가 강제할 부분이 아니지만…….

“잠깐이면 됩니다.”

-……만나더라도 대화는 나누기 어려울 텐데, 그래도 괜찮다면.

“괜찮아요,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정혁은 만날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해주고는 통화를 끝냈다.

예전 같았으면 그의 태도에 불쾌했겠지만, 지금은 따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지석은 휴대폰을 꼭 쥔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다행이야, 다행이다. 은서야.”

적어도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난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서지석 군?”

“…….”

“이쪽으로 와요.”

정혁이 통보한 장소에 나타난 이는 정혁의 사무실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던 남자였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은서 양이 있는 곳으로요.”

“은서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인가요?”

도훈의 뒤를 따르며 지석이 걱정스레 물었다.

은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정혁의 말이 꽤 이상했다.

만나더라도 대화는 나누기 어렵다니.

“……가보면 알아요.”

도훈의 애매한 대답에 지석의 걱정은 더 커져만 갔다.

차를 타고 꽤 오래 이동해서 도착한 곳은 출발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쩐지 유독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더라니.

“이해해요, 안전을 위해서니.”

의아해하는 속내를 눈치챈 듯 도훈이 설명을 덧붙였다.

“네, 괜찮습니다.”

정혁이 저를 향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거였다. 솔직히 만나게 해 줄 거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

“들어가는 절차가 좀 복잡하죠?”

“네, 그러네요.”

보안이 이중 삼중으로 철저한 펜트하우스였다.

새삼 정혁의 재력이 실감이 나 지석은 절로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저도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청렴결백한 공직자로 산 형교는 평생 이룰 수 없는 부였다.

“데려왔어.”

도훈의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거실에 있던 정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 좋으면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꾸벅 고개를 숙이는 지석은 안중에도 없는 듯, 시계를 확인한 정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들어가 봐요.”

정혁이 턱 끝으로 우측의 방문을 가리켰다.

정혁을 힐끔 본 지석은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은서를 향해 걸었다.

똑똑, 문을 두들겼지만,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그냥 들어가요.”

어느새 옆에 다가온 정혁이 직접 방문을 열었다.

“…….”

커다란 침대 위, 이불에 파묻혀 잠들어 있는 은서가 보였다.

“하아.”

많이 상한 얼굴을 보자 저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은은한 파스텔 톤의 이불과 커튼이 아니었다면 마치 중환자실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건가요?”

“특별하게 이상이 있는 건 아니고.”

“…….”

“보시다시피. 며칠째 잠만 자고 있거든, 강제로 깨워서 먹이는 때 외에는 전부.”

그제야 대화를 할 수 없을 거라는 정혁의 말이 이해됐다.

“은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서지석 군이 아니길 바라는 상황이라면, 알아듣나.”

정혁의 확인 사살에 다리에 힘이 풀린 지석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정말 그 집에 계속 갇혀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그 한 마디 때문에.

고개를 들어 자는 은서를 확인한 지석이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좀 앉는 게 좋겠어요.”

주춤주춤 밖으로 빠져나온 지석이 도훈의 조언대로 거실 소파에 자리했다.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어느새 몸 전체로 번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실 것을 내미는 도훈에 지석이 겨우 입술을 열었다.

방문을 조용히 닫고 온 정혁이 지석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저 때문인가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지석이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연대책임이라고 해두지.”

정혁 나름의 배려였다.

어쨌든 서지석이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먹은 덕분에 은서에게 벌어진 전부를 알게 된 거였다.

게다가 지석만 탓하기에는 저의 존재가 그를 조급하게 만든 탓도 있을 거였다. 다급해진 마음에 은서를 벼랑 끝으로 모는 데 일조했겠지.

“……하하.”

뜻밖의 배려에 지석이 처연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알아서 판단해야지, 그 좋은 머리로.”

약간의 비난이 섞인 말에 지석이 할 말을 잃었다.

“답은 본인이 제일 잘 알 텐데.”

“…….”

지석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은서의 원치 않는 결혼을 막아보겠다는 핑계로 제 욕심을 강요했다는 걸.

그날 이후, 신뢰가 사라진 은서의 차가운 눈빛을 모른 척 외면했다.

어찌 되도 제 곁에 있게 된다면 회복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다.

제 욕심이 결국 도화선이 되어 은서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깰지도 모르는데, 안 만나고 가게요?”

축 처진 지석을 짠하게 보던 도훈이 물었다.

“얼굴 봤으니 괜찮습니다.”

지석이 예의 바른 태도로 답했다.

“오늘 아니면 또 오긴 힘들 거예요. 은서 양이 괜찮아지기 전까지는.”

“……네.”

지석이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혁은 자리를 유지한 채 그 모습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래도, 한 번씩 연락 드려도 될까요?”

언젠가, 은서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물론 은서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어렵겠지만.

“그래요. 소식 궁금할 테니까.”

도훈이 정혁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지석은 집을 나서기 전, 정혁에게도 진심으로 허리를 굽혔다.

*지석을 배웅하고 돌아온 도훈은 지친 나머지 풀썩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후아. 이게 무슨 난리인지.”

재킷 단추와 넥타이를 연 도훈이 대자로 팔다리를 펼쳤다.

요 며칠 팔자에도 없는 첩보 영화를 찍었더니 심장이 다 쪼그라든 기분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재택근무를 시작한 정혁 덕분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고생했다.”

방에서 나온 정혁이 도훈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새 은서의 상태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지극 정성이다, 지극 정성이야.

“참나. 고마운 줄은 아냐?”

도훈이 혀를 차며 정혁을 노려보다시피 했다.

이런 일을 벌여놓고도 정혁은 태연자약했다.

“회사는?”

“들어가 봐야지.”

“투자금 회수는?”

“계획대로 되고 있고.”

“그래.”

“회사 한 번은 나올 거지?”

“……당분간은 힘들 거야.”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 정혁이 가차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혁이 어떻게 이 회사를 키워 왔는지 아는 도훈은 기가 막혔다.

아니, 납치까지야 이해한다 쳐도. 회사는 도대체 왜?

고작 며칠 정도만 안 나오는 건 줄 알았더니, 정혁은 아예 집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도훈은 제 눈앞에 있는 이 친구가 제정신인가 싶었다.

일에 미쳤을지언정, 제가 아는 정혁은 감정에 치우치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미쳤어? 그럼 계속 집에 있겠다고?”

“…….”

“언제까지 이럴 생각인데?”

도훈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조용히 해. 방금 잠들었어.”

정혁이 지그시 경고했다.

“나 참, 안쓰러운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끼고 도는 거라고 생각 안 해? 정도가 지나치다고.”

도훈이 헛숨을 내뱉었다.

혹은 이것이 사랑이라 해도, 도훈의 눈에는 썩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

저와 차은서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도훈이니, 지금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정혁은 침묵한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늘이 흐렸다.

오래전, 차은서를 만났던 그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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