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철컥, 문이 닫히고 집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허리를 짚은 채 거실에 서 있던 정혁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천천히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은서가 집 밖으로 나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회의를 중단하고 도훈만 겨우 챙겨 나와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타이밍을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들어간 룸 위치 확인하고, CCTV 동선 확인해. 돈을 쥐여주든 협박을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착하기 전에 정리해. 입막음시키는 거 잊지 말고.”
“야, 이 미친……!”
이성은 미쳐 날뛰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은서를 데려올 방안을 찾아내고 있었다.
유능한 도훈은 늘 그랬듯 정혁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덕분에 정혁은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은서가 제 발로 뛰쳐 나온 건 계산에 없던 기막힌 우연이었지만.
급하게 세운 계획이었지만 이만하면 안전하게 성공한 셈이었다.
“……젠장.”
은서를 마주한 순간을 떠올리자 뒤늦은 분노가 터졌다. 은서의 얼굴을 보자마자 욕설이 치밀어 올랐다.
오랫동안 걷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걸음조차 제대로 딛지 못했다. 힘없이 비틀거리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
정혁이 이를 으득 갈았다. 분노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그간 뭘 먹지도 않았는지 그녀의 앙상한 몸에 잡히는 거라곤 뼈밖에 없었다.
어떻게 애를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놨나 싶어 당장에라도 뛰어 들어가 중훈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고 싶었다.
문틀에 기대어 선 정혁은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은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보자마자 죽어있던 눈동자에 빛이 들기 시작하던 것도, 작은 손을 뻗어 제 손을 잡아 오던 순간도, 품에 안기자마자 안심한 듯 잠 속으로 빠져들던 모습도.
모든 것들이 쉬이 잊힐 것 같진 않았다.
“……미치겠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정혁이 창문으로 다가갔다.
눈 시린 겨울 햇빛이 얼굴에 내리쬐는데도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적어도 지금은 편안하게 잠에 취해 있는 모양이었다.
햇빛을 가리려 커튼으로 손을 뻗던 정혁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대로 멈췄다.
“…….”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은서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은서의 손등이 이상하게 얼룩덜룩했다.
뒤늦게 이상한 걸 발견한 정혁이 은서가 깨지 않을 정도의 약한 힘으로 그녀의 손등을 문질렀다.
그러자 마치 화장이 지워지듯 밀리면서 시퍼런 얼룩이 더욱 진해졌다.
“……!”
정혁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자세히 보니 손등에 옅고 진한 멍 자국이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정혁이 황급히 은서의 소매를 걷었다.
팔꿈치 안쪽은 더욱더 엉망이었다. 얼마나 찔러댔는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보고를 받을 때마다 보았던 사진 속 차중훈이 떠올랐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면서 일상을 이어가던 모습이.
“……개자식이.”
분노에 찬 정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정혁은 은서의 손을 세게 움켜쥐지도 못한 채, 그녀의 손에 제 이마를 묻었다.
“……미안하다.”
괴로움에 목구멍이 쓰라렸다.
죄책감과 후회, 분노, 모든 것이 뒤엉켜서 정혁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미안해, 차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해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혼자 내버려 둬서.
정혁은 은서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아픔과 고통을 모조리 가져오고 싶었다.
*“기력이 많이 쇠해서 그래. 정신적인 이유일 수도 있고.”
“…….”
“지금은 원하는 만큼 자게 둬.”
정혁의 부탁에 그의 집을 찾은 홍석이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회장님께는 따로 연락 드릴 거지?”
정혁의 모친을 봐 온 탓에 자연스레 정혁과도 친분이 있었지만 실 고용주인 윤수에게 이 급작스러운 출장을 숨길 수는 없었다.
“네.”
“회장님이 궁금해하시겠어.”
가급적 빨리 집으로 와 달라는 청에 헐레벌떡 뛰어왔더니 정혁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아가씨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모르는 체해주세요.”
“흐음. 이 값은 나중에 비싸게 칠 거야?”
주름이 자글자글한 홍석의 눈가에 짓궂은 장난기가 서렸다.
농을 던지는데도 딱딱하게 굳은 정혁의 시선은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가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일단, 수액이라도 좀…… 음?”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던 홍석이 은서의 소매를 걷다가 흠칫 놀랐다.
“이거, 주사 놓기가 미안해지는구먼.”
홍석이 난처한 듯 혀를 차다가 소매를 내리고 반대편 팔을 확인했다.
“젊은 아가씨가 꽤나 고생한 모양이네.”
대체 이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이며, 정혁과는 또 무슨 사이일까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지만 홍석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너가의 사생활까지 아는 것은 제 영역이 아니었다.
“보니까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 같은데, 소화되기 쉬운 것부터 조금씩 먹이도록 해. 그게 빠르겠어.”
홍석이 어쩌지 못하고 은서의 팔을 놓자 정혁이 은서의 팔을 이불 아래로 넣어 주었다.
어릴 때부터 정혁을 봐오긴 했지만, 어쩌다 한 번씩 마주쳐도 영 애 같지 않게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답지 않게 다정한 정혁의 행동을 홍석이 신기한 듯 바라봤다.
“후에, 필요하면 심리상담도 연결해 줄게. 필요한 식단은 정리해서 주마.”
그러면서도 그는 의사로서 해야 할 이야기들을 차분히 이어갔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지을 거 없어. 상태가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최악인 것도 아니야. 금방 회복될 수 있게 잘 먹이고 잘 자게 해.”
“네.”
“무엇보다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하고, 절대 심리적으로 압박을 느낄 만한 일은 없게 해.”
“네.”
“그럼 난 가보겠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감사합니다.”
“그래, 오랜만에 얼굴 보니 좋긴 하지만.”
홍석이 정혁의 어깨를 툭툭치고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자주 보지는 말자고.”
직업이 직업이니 말이야. 홍석이 껄껄 웃으며 떠나갔다.
*“…….”
꿈속을 헤매던 은서가 눈을 떴다.
느리게 눈동자를 굴리자 사위가 온통 새까맸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낯선 천장이 들어왔다.
‘여긴 어디지…….’
아직 꿈속인가 싶어 고개를 슥 옆으로 돌리자 그립던 얼굴이 보였다.
“…….”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팔짱을 낀 채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분명 하정혁이었다.
어둠 속에 침잠된 그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식당에서 그를 마주쳤던 것 같은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던 것도 같은데.
“……꿈, 이에요?”
불안해진 은서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아…… 다행이다.”
한 번쯤은 보고 싶었는데.
있잖아요, 나 하정혁 씨한테 할 말이 많아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잠에 취한 눈이 자꾸만 감겼다.
“여기는…….”
“내 집.”
그렇구나, 그런데 처음 와 본 곳 같아요.
대화를 이어가려 해도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눈에 힘을 주려고 애쓰자 커다랗고 따스한 손이 눈 위를 덮었다.
“괜찮아, 더 자.”
“…….”
느슨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온 몸을 적셨다.
“옆에 있을 테니까, 안심해.”
은서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천천히 오르내리기 시작한 가슴을 본 정혁이 조심스레 손을 떼어냈다.
어스름하게 새벽빛이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홍석이 다녀간 후, 지금까지 밤새도록 뜬 눈으로 은서의 곁을 지켰다.
꿈이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라며 희미하게 웃는 걸 보자 안쓰러움에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턱을 괴고 몸을 숙인 그는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든 은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제 앞에 데려다 놨는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놓치면 어쩐지 그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은서.”
은서를 눈에 담은 정혁이 조용히 이름을 읊조렸다.
안타까우면서도 더없이 사랑스러운 존재.
은서를 향한 감정도, 제 마음을 차지한 차은서의 의미도 무어라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외면해 보려 했고, 제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의심도 했지만……
선명해진 마음을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널 사랑하게 됐어.”
이제 제 손을 떠난 감정이었다.
차라리 널 사랑하게 돼 미안하다고,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노라 변명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이 마음을 주면, 넌…….”
정혁의 손가락 끝이 애달프게 은서의 볼을 쓸었다.
“받으려 할까.”
퍼석해진 얼굴이 안타까워 닿은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너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순간이 사랑이었다.
너를 안는 것도, 나는 사랑이었다.
다시 만난 그날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 네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계속 자리 잡고 있었던 건지도.
내가 내내 그랬다는 걸, 사랑이었다는 걸 알면 넌 뭐라고 할까.
언젠가 네게 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하지만, 잘 알고 있었다. 이 마음이 네게 또 다른 압박이 되리라는 것을.
지금의 네겐 이 마음이 온전한 형태로 닿지 못할 것임을.
정혁은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죽이고 또 죽였다.
*은서가 다시 잠에서 깼을 때는, 해가 중천에 뜬 오후였다.
꼬박 하루를 잔 그녀는 아직 잠에 취한 상태로 눈을 떴다.
암막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방 안이 어둡긴 했지만, 주변을 식별하기엔 충분했다.
“……깼어?”
“……하정혁 씨.”
느리지만 분명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은서에 의자에 앉아 있던 정혁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은 정혁이 은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더 잘 건가.”
“…….”
은서가 부정하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래, 일단 뭐라도 좀 먹는 게 좋겠어.”
정혁이 은서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앉게 하고는 은서의 등허리에 커다란 쿠션을 넣어 받쳐 주었다.
그간 와 본 적 없는 공간이었음에도, 가득한 그의 향기가, 눈앞에 보이는 그의 존재가 은서를 안도하게 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기억 안 나? 네가 내 손 잡았잖아. 도와 달라고.”
“그게 아니라…….”
정혁이 거기까지 어떻게 알고 온 건지 궁금했다.
질문의 뜻을 알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정혁에 은서가 투정 부리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픽 웃던 정혁이 은서의 미간을 꾹 눌렀다.
“차은서.”
“…….”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이제.”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콧날을 스쳐내려 가다가 곧 떨어져 나갔다.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생각이니까.”
은서는 제게 고정된 정혁의 눈동자를 찬찬히 바라봤다.
그의 온기가 닿았던 곳이 벌써 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