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49화 (49/82)

49.

“이야기 좀 할까.”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정혁이 바로 옆에 있던 문을 열었다.

경계심에 주변 룸을 비워두게 한 중훈의 선택이 정혁에게는 오히려 득이 됐다.

정혁이 빈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며 은서를 끌어당겼다.

손쉽게 끌려가는 은서의 등 뒤로 탁, 문이 가볍게 닫혔다.

“하정…….”

“쉿.”

은서를 품에 안은 채 벽에 기대어 선 정혁이 문 옆으로 지나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은서를 찾아 나선 누군가일 터.

“…….”

신중하게 주변에 신경을 곤두세운 정혁과는 달리 은서는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진짜 현실인지 믿을 수 없었던 은서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커졌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정혁이 분명했다.

은서가 가만히 손을 뻗어 얼굴을 쓰다듬자 정혁이 커다란 강아지처럼 그녀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눈썹으로 콧날로 입술로.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촉감은 진짜였다.

“여긴, 어떻게…….”

“어떻게 왔을 것 같아.”

장난치듯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린 정혁이 입술에 닿은 은서의 손가락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

미약한 통증에 은서가 그제야 손을 뻗어 움켜쥐듯이 정혁의 팔을 붙잡았다.

마치 놓치면 사라지기라도 할까 두려운 몸짓이었다.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안타까운 재회였으나, 아쉽게도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았다.

“차은서.”

“…….”

“우리 내기, 기억해?”

고개를 숙인 정혁이 은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기?

핏기없는 얼굴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했다.

정혁이 은서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언젠가, 내가 네게 손을 내밀게 된다면…….”

그제야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듯 은서의 눈동자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망설이지 말고 잡으라고 했지.”

“…….”

“지금이, 그때야.”

은서의 눈동자가 격랑 치듯 일렁였다.

“명령이라고 하고 싶지만, 선택권을 줄게.”

정혁이 은서의 팔을 붙잡고 바르게 세웠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다른 한 손을 내밀었다.

“차은서.”

“…….”

“잡을래?”

“…….”

“어떻게 할래.”

은서는 눈앞에 놓인 커다란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려하게 뻗은 긴 손가락은 저를 쾌락 속에 묻어두고 괴롭힐 때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평온해 보였다.

본인이 뱉은 말처럼 마치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 미동도 없는 손이었다.

은서는 내밀어진 손에서부터 천천히 팔을 타고 올라가 그 끝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무표정한 듯도 했고, 입꼬리 끝이 살짝 올라간 것도 같았다.

여전히…… 남자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아.”

정혁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

“…….”

이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조금도.

이 손은 내게 있어 구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지옥으로 향하는 문인가.

남자가 주었던 선명한 쾌락이 남아 있을 뿐, 이 남자가 제게 주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관계에 대한 확신도,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틈도, 그 무엇도.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갇혀 있는 내내 이 남자의 품이 무척 그리웠다는 사실.

적어도 그 쾌락 하나만으로도, 이 남자가 내민 손을 잡을 이유는 충분했다.

그건 지금 지옥에서 겪는 고통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달콤함이었으니까.

은서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밀어 남자의 손 위에 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정혁의 커다란 손이 가둘 것처럼 그녀의 가녀린 손을 움켜쥐었다.

“……좋은 선택이었어.”

비릿한 웃음을 흘린 정혁이 은서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크흠.”

민준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순규에게 신호를 줬다.

은서가 그대로 뛰쳐나간 후 분위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미묘한 긴장감이 오가고 서로의 눈치만 빠르게 살피는 상황이었다.

중훈은 행여나 순규가 은서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을까 걱정했고, 순규는 중훈이 딸의 어린 행동을 핑계 삼아 안전장치를 해두려는 게 아닐까 찝찝했다.

“이거, 은서 양이 늦는군요.”

“사실 아침에 먹은 것이 체했다고 했는데, 긴장한 나머지 너무 무리한 모양입니다.”

“저런.”

중훈의 핑계에 넘어가 주겠다는 듯 순규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늙은이들 사이에 껴 있으려니 불편했나 봅니다. 네가 좀 다녀오는 게 좋겠다.”

“그래 주겠나?”

순규가 민준의 등을 떠밀자 중훈이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네.”

떨떠름함을 숨긴 민준이 일어나자 의자가 드르륵 밀렸다.

“어휴, 영감탱이들. 숨 막혀 죽겠네.”

문을 닫고 나온 민준이 투덜거리며 느릿느릿 복도를 걸었다.

이미 은서가 처음 뛰쳐나갔을 때 발을 툭 치며 신호를 보내는 순규 때문에 따라갔다 온 후였다.

막상 나가 보니 벌써 사라지고 없어서 화장실에 갔나보다 하고 그냥 돌아오긴 했지만.

“귀찮게 하네. 이 몸이 여자 화장실까지 쫓아가게 해?”

결혼만 해봐라.

발밑에 두고 괴롭히리라.

음흉한 상상을 하며 민준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요.”

주머니에 손을 넣은 민준이 터덜터덜 걷다가 지나가는 여직원 하나를 불러 세웠다.

“네, 손님.”

단정한 원피스를 차려입은 여직원의 몸매를 아래위로 훑은 민준이 예의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혹시 여자 화장실에 다녀와 줄 수 있을까요? 일행이 아까 갔는데 지금껏 오질 않아서요.”

“일행분이요?”

“몸이 좀 안 좋아서 혹시 안에서 문제라도 생겼을까 걱정되네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민준은 여직원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노골적으로 관찰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미소는 당혹감에 깡그리 일그러졌다.

“죄송하지만 안에 다른 손님은 없으십니다.”

“……뭐라고요?”

화장실마다 비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화장실에 간 게 아닌가.

민준은 귀찮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정원 쪽으로 향했다.

“차은서양. 여기 있나?”

“이봐요, 차은서 씨?”

하지만 여러 번의 부름에도 그녀는 보이질 않았다.

혹시 어디 쓰러지기라도 한 거 아냐?

창백하던 얼굴을 떠올리자 민준도 덩달아 찝찝해졌다.

“저기 이봐요, 저기 룸에 있던 여자 얼굴 알죠? 그 여자 혹시 못 봤어요?”

홀로 돌아온 민준은 룸 서빙을 담당했던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아까 화장실 가시는 것 같았는데…….”

화장실?

거기엔 없다며.

그리고 결국, 민준은 끝까지 은서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냔 말이야!”

중훈이 소리치며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식당의 직원들은 전부 보지 못했다고 하고 CCTV는 내부 정보라 함부로 보여줄 수 없다며 발을 뻗댔다.

수많은 정치인과 재계 인사들이 찾는 식당이니 버팅기는 것도 알만했다.

결국 협박에 가깝게 하고서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은서의 흔적은 없었다.

하필 가장 은밀한 자리를 달라고 했던 게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은서에 중훈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순규와 민준은 황당해하며 돌아갔고, 그런 그들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짜내야 했다.

난처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자존심이 바닥을 긁어댔다.

“찾아내, 당장 찾아내라고!”

보좌관은 곤란한 듯 내내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물러갔고, 그가 사라지고 난 자리엔 경미가 슬쩍 나타나 대신했다.

“이봐 당신, 뭐 아는 거 없어?”

“…….”

경미가 중훈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태도 안 좋은 애를 데리고 갈 때부터 불안하다 싶더니만, 은서가 사라졌단다.

혼자 돌아온 중훈은 집에 들어 온 이후로 이렇게 화만 내고 있었다.

“……아시잖아요, 은서 계속 방에만 있었던 거…….”

경미로서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경미의 변명에 중훈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허리춤에 손을 짚고 헛숨을 토해냈다.

휴대폰도 없고 드나드는 사람도 없다.

경미가 제 지시를 어기고 은서를 내보낼 리는 더더욱 없었다.

도대체…….

‘설마 그 작자가?’

단 한 명.

이런 짓을 또 벌일 수 있는 간 큰 놈이 하나 있었다.

‘이 새끼가.’

중훈의 입술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래, 통화 기록은 전부 삭제시켜 버려. 데이터 모조리 다, 복원조차 불가능하게.”

“알았어, 그리고 또?”

“……박사님을 좀 불러야겠어.”

망설이던 정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윤수의 주치의를 언급했다.

가급적 윤수의 도움을 받는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그 외에는 입막음이 가능한 사람이 없었다.

“말씀드려 놓을게. 또 필요한 건?”

“일단은 그거면 됐어.”

“하, 정말 평생 잊지 못할, 희대의 납치 사건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도훈이 크게 한숨을 터트렸다.

시작은 은서의 집에 붙여 두었던 사람이 은서가 외출했다는 것을 알려 온 것이었다.

“따라 와.”

제가 돈 주고 붙여 놓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못 미더웠는지, 일도 다 팽개친 정혁은 도훈을 데리고 중훈이 향한 곳으로 갔다.

가는 동안 도훈은 식당 사장을 미리 입막음시키느라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으며 협상해야 했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도심 한복판의 고급 한정식집에서 맞선 중인 여자를 낚아채다니.

다시 생각해도 이런 미친 짓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정혁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굴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정혁의 품에 안겨 나오는 은서는 뼈만 남아 몇 달 전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차에 오르자마자 그녀는 정혁의 품에서 기절한 듯 잠이 들어 버렸고, 도훈은 졸지에 추격전을 찍는 사람처럼 초유의 긴장 상태로 운전을 해야 했다.

“일단 난 갈게.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그래.”

“너 휴가 아니다. 재택근무야.”

“알아. 애 상태 좀 나아지면 나갈 거야.”

“후, 그래. 난 간다.”

도훈이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도훈은 집을 나서면서 정혁의 표정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무래도 제 친구는 이제야 미칠 수 있는 여자를 만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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