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휴대폰 액정에 뜬 건 저장되어있지 않은 낯선 번호였다.
“네, 여보세요.”
혹시나 하는 한 가닥 희망에 수일이 급히 전화를 받았다.
-윤수일 교수님, 맞으십니까?
전화를 건 이는 낮은 중저음의 남자였다.
*“그때가 주말 저녁이었고, 월요일부터 은서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요.”
상황을 전하는 지석의 목소리는 사그라드는 촛불처럼 힘이 없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계속해서 생각해 보니 그날 저녁 헤어질 때 은서가 불안해 보였던 것도 같아요. 저희 부모님한테는 꼭 인사를 하는데 그날은 인사하는 것도 잊었거든요.”
기억을 되짚는 지석의 입술이 연신 파르르 떨렸다.
“뭐가 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한 가지가 떠올랐어요. 제가 마지막에 윤수일 교수님 이야기를 꺼냈어요. 워낙 유명한 화가였고, 그분이 은서를 아낀다고 말했거든요.”
지석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외에는 짚이는 게 없어요.”
멍청하긴.
핸들을 쥔 정혁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조사한 바로는 은서의 생모가 집을 나왔을 때 그 뒤를 봐주고 도운 이가 수일이었다.
이미 두 사람의 접점을 알고 있던 정혁은 지석의 고해성사에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은서를 향한 중훈의 기이한 통제와 집착은 그 윤수일이라는 화가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심지어 그는 지금 은서가 다니는 학교에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중훈에게 수일과 은서의 소식을 전했으니, 잠잠하던 휴화산이 활화산으로 타오르게끔 불씨를 지핀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석도 의도하고 말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혁은 하마터면 지석의 목을 조를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은서와 결혼을 하겠다고 밀어붙였다니.
가여운 차은서. 오랜 친구가 제게 이런 시련을 가져다주리라곤 예상도 못 했겠지.
은서가 왜 제게 그토록 절박하게 매달렸는지, 이제야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답답하긴.’
차라리 말을 하지.
털어놓고 도와 달라 손을 내밀지.
그랬더라면 미친 척 잡고서 숨겨줬을 텐데.
원하는 대로 해달라는 건 다 들어줬을 텐데.
은서에게 쏟아내고 싶은 말이 무차별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못 견디겠는 건 정혁 자신이었다.
기다리지 말 것을.
은서가 그어 놓은 선 따위 무시하고 넘어가 버릴 것을.
이제 와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뼈저리게 후회가 됐다.
지금 너는, 어떤 심정으로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을까.
“조금만 버텨. 버티고 있어, 차은서.”
정혁이 이를 아득 물었다.
·“윤수일 교수님이시죠?”
수일은 제 옆에 저승사자처럼 나타난 남자를 보며 주춤주춤 일어섰다.
겨울 코트를 팔에 걸치고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은 남자는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의 미남이었다.
예의를 갖춘 정중한 태도였으나, 그에게선 사뭇 위험한 향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언뜻 봐서는 은서와 접점이 있을 것 같은 남자는 아니었다.
“아, 예. 제가 윤수일입니다. 전화주신 분이신가요?”
저도 모르게 긴장한 수일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네, 하정혁이라고 합니다.”
‘전혀 안 닮았군.’
수일을 처음 본 정혁의 인상은 그게 다였다.
정혁이 수일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았다.
*“명심해. 오늘 중요한 자리다.”
중훈은 제 옆에 겨우 앉아만 있는 은서를 보다 혀를 끌끌 찼다.
경미가 화장으로 가려놓긴 했지만, 만연한 병색을 완벽하게 가릴 순 없었다.
게다가 생기 없는 표정 탓에 은서는 진짜 사람처럼 생긴 인형 같았다.
“은서, 점점 위험해 보여요. 이대로 가다가는 영양제만으로도 안 돼요. 병원에 입원시켜야 할 거예요.”
“집에서 보고 있으면서 애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했어?”
“본인이 먹으려 하지 않으니, 강제로 먹일 수가 없었어요.”
변명하는 경미를 보며 답답해하던 것도 잠시, 중훈은 서둘러 순규에게 연락했다.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쐐기를 박아둬야 했다. 그래야 일이 틀어졌을 때 순규가 발을 뺄 수 없을 테니까.
“가서 말조심 하고.”
“…….”
중훈의 말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탓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그나마 푹신한 가죽 시트가 자꾸만 촛농처럼 흘러내리려는 몸을 받치고 있는 거였다.
은서는 무거운 눈을 견디지 못하고 감아 버렸다.
제가 어디로 실려 가고 있는 건지, 무엇 때문에 나오게 된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경미의 손에 강제로 일으켜져 몸을 씻고 그녀가 입히는 대로 옷을 입고 끌려 나왔다.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아침인지 오후인지도 분간이 되질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날짜를 새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아, 아마도 정혁과의 약속 날 이후였던 것 같다.
아무렴 어떨까 싶었다.
저를 가둬놓고 중훈은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제가 어떤 상태인지 그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 한들 중훈이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싶었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하는 중훈에게 분노했고, 그다음에는 원망이 차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는 것은 허무함 뿐이었다.
그에게 따져 물을 기운도 없었다.
이제 중훈은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눈 감고 외면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리석게도…….
“……후우.”
오랜만에 차에 탄 탓에 흔들리는 몸이 힘들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시트의 가죽 냄새에 멀미가 났다.
은서는 울렁거리는 속에 겨우 손가락을 들어 창문을 열었다.
바깥바람이 닿자 그나마 나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중훈의 지시를 받은 보좌관이 창문을 금방 올려버린 탓에 더 느낄 수도 없었다.
은서는 허망하게 눈을 감았다.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남아있긴 할까 싶었다.
“드디어 소문으로만 듣던 얼굴을 보는군요.”
먼저 도착해 있던 순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훈과 은서를 맞았다.
티 나지 않게 등을 툭 떠미는 손길에 휘청일 뻔한 은서가 가까스로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따님을 두셨다니.”
감탄을 숨기지 못한 순규가 은서의 손을 덥석 잡으며 토닥였다.
팔을 타고 소름이 돋았지만 빼낼 힘조차 없었다.
“…….”
“아, 이런. 젊은 사람들 인사를 먼저 나눠야 하는데 내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구만?”
은서의 반응이 없자 순규가 뒤늦게 민준을 쳐다보면서 몸을 옆으로 비켰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시험 잘 봤어요?”
민준은 미소 속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안부를 물었다.
‘꼴이 왜 저래?’
고작 한 달 반? 아니, 두 달인가?
그 사이에 은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반짝이던 눈동자에선 빛이 사라졌고, 뽀얗게 탐스럽던 하얀 피부는 창백해서 마치 환자 같았다.
화장해 놓은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 그래도 한동안 연락이 없기에 밀당하려고 그러나 싶어 궁금하던 차였다.
예쁜 얼굴을 볼 생각에 살짝 기대를 하고 나온 자리였는데 저런 몰골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핼쑥하다고 해서 빼어난 미인의 원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질 만큼 은서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의원님, 그간 잘 지내셨지요?”
“그럼요. 목사님 덕분에 가정도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하하, 제가 무엇을 했다고요.”
“목사님 기도 덕분 아니겠습니까.”
민준은 가식 섞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삼켰다.
야망에 눈이 먼 두 노친네의 눈에는 서 있기도 버거워 보이는 차은서의 저 꼴이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결혼할 때도 저 모양이면 안 되는데.’
민준은 주변 지인들에게 제 체면이 살지 않을까 봐 심히 걱정스러웠다.
“이제 식사하실까요?”
“예, 그러시죠.”
민준은 찝찝함을 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슬슬 날 잡아야지 않겠습니까?”
“네, 그렇지요.”
식사 내내 정치로 사회로 주제가 바뀌던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레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 인연이긴 한가 봅니다. 여러모로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가요?”
“이 녀석도 어린 나이에 제 어미를 잃고도 반듯하게 자라주었지요. 은서 양도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지요?”
제게로 화살 끝을 돌리는 순규에 은서는 그나마 먹는 체하던 것도 멈췄다.
대외적으로 중훈은 사랑하던 아내와 지병으로 인해 사별한 것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중훈의 아내가 한때 촉망받던 화가, 홍수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잘 의지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문득 고개를 든 은서는 저를 이상하게 보는 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는 것 같기도 했고 불만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날 풀리는 대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지금이 1월 초니, 한 3월쯤이 어떻습니까? 개나리 필 무렵이면 딱 좋겠군요.”
민준에게 감정 없는 시선을 주는데, 이상하게도 옆에선 저 남자와 자신의 결혼을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우욱.”
순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입을 틀어막자 제게로 쏠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몇 입 먹지 않았는데도 한동안 곡기라고는 들어간 적이 없는 몸에 된 음식을 밀어 넣은 게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하하,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중훈이 뒤늦게 난처한 표정으로 수습에 나섰다.
“……화, 화장실 좀.”
은서는 그대로 룸 밖으로 뛰쳐나왔다.
겨우 문을 닫고 도망치듯 달려가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
커다란 무언가에 부딪친 은서가 휘청거리자 누군가 은서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단단하게 허리를 휘감아 오는 힘에 중심을 잡은 은서는 곧 익숙하고도 그리운 향기를 맡았다.
‘설마.’
울렁거리던 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음에도 은서는 제 입을 가리고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알아서 나오네.”
픽 웃으며 말을 건네오는 이는……
하정혁, 그 남자였다.
“안 그래도 막 들어갈까 하던 참이었는데 말이지.”
꿈에서나 보던 그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저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