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행방불명이라니.”
정혁이 겨우 입술을 떼어냈다.
-모르겠어, 나도. 나도 학교 후배한테 들은 건데, 기말고사 시작된 이후로 학교에 안 나왔다는데?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인지 현주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이마를 짚은 정혁이 눈을 감았다 떴다.
누군가 혈관을 틀어쥐고 흔드는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확실한 거야?”
-같이 수업 듣는 애들한테 들은 거니까 확실한 거는 맞지. 전화도 안 받고, 연락도 안 된대. 친한 애들조차도 모른다는데? 나도 전화해봤는데 안 받아.
“…….”
-혹시나 오빠는 연락하고 지내나 싶어서 전화해봤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최악의 패착.
어딘지 모르게 아슬아슬하던 은서를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은서가 허락하지 않았어도 움직였어야 했다. 그녀의 당부를 무시하고 연락이라도 해 봤어야 했다.
정혁은 조심스러웠던 저 자신이 죽이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났다.
“알았어. 혹시 새로 소식 들리면 전해.”
-어? 응, 알겠어.
통화를 마친 정혁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행방불명이라니.”
정혁의 냉기에 긴장한 도훈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사람 붙여.”
정혁이 은서에게 전화를 걸며 지시를 내렸다.
“뭐?”
“차은서 집 주변, 24시간 감시하라고 전해.”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메시지에 전화를 끊은 정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중훈 외에도 차은서와 접점이 있었던 사람들 전부, 붙여.”
“……알았어.”
도훈이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때였다면 철저히 따져 물었겠지만 지금 정혁의 표정을 봐서는 잠자코 따르는 게 답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모든 걸 때려 부술 것처럼 난폭한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으니까.
*“…….”
은서는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 뜨기가 힘겨워 잠자코 있자 곧 손등 부근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 깼니?”
눈을 뜨자 침대 옆에 몸을 숙이고 있는 경미가 보였다.
그녀의 옆을 따라 투명한 줄이 이어져 있었다.
“영양제 한 대 놨어. 어제 너 쓰러진 거 기억은 나?”
경미가 은서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주며 물었다.
그 손길에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연락도 없이 약속을 깬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궁금해 조차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냥, 게임의 끝이겠거니. 한여름 밤의 꿈처럼, 그렇게 잠깐 즐기다 깔끔하게 헤어졌다고…… 그렇게 여길지도 몰랐다.
“뭐라도 좀 먹어야 할 텐데…… 이러다 너 정말 큰일나, 은서야.”
“…….”
은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현실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꿈속을 헤매는 게 나았다.
가끔은 수영과 그림을 그리던 꿈을 꾸기도 했고, 화목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차라리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죽어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살아있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럴 때면 어김없이 하정혁, 그가 나타났다.
그는 때때로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는 부드럽게 입을 맞추기도 했고, 어떨 때는 정염에 휩싸여 제 몸을 취하기도 했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그의 품에 안겨 울고 쾌락에 젖어 몸을 떨다 보면 한결 기분이 나아지기도 했다.
죽을 땐 죽더라도, 그 전에 하정혁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었다고, 당신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
그리 말하면…….
그 사람은 뭐라고 대답할까.
영원히 답을 알지 못할 질문을 되뇌며 은서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꼼짝도 안 해.”
보고하던 도훈이 답답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정혁의 지시대로 사람을 붙여 관찰한 지도 열흘이 흘렀다.
매일 칼같이 확인하던 정혁도 진전없는 상황이 답답했는지 나날이 피곤함에 지쳐가는 게 보였다.
더 날카로워진 턱선에 깊이 팬 눈매로 인해 정혁은 한층 더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덕택에 도훈은 친구임에도 저절로 마른 침을 삼키며 정혁의 눈치를 보게 됐다.
“차중훈에게서 특별한 점은 없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집은.”
“가끔 식료품 배달하러 사람이 드나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
“차중훈을 제외하면 밖으로 나오는 사람도 없고, 들어가는 사람도 없어.”
“차중훈이 들어가는 간격은?”
“사람 붙인 이후로는 대부분 밤늦게 들어갔다가 새벽에 나오는 일정이야. 거의 들어가서 잠만 자는 수준이고.”
“식료품 배달 횟수는.”
“거의 이틀에 한 번?”
“안에 사람이 있는 건 확실한데…….”
“……그렇다고 봐야지. 차중훈이 있는 시간 외에도 불은 켜져 있으니까.”
“물론 그건 차은서이겠고.”
“아마도. 차중훈 성격상 그럴 확률이 높아.”
“차중훈 집에 여자 하나가 들어가 있다고 했지?”
힘들게 캐낸 존재로, 차중훈 집의 입주 도우미라고 했다.
“응. 그 여자도 최근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그래.”
집에 있는 건 확실하고, 은서를 어디로 보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대체 왜 집에 가둬두고 있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차은서를 빼내고 싶었다.
하지만 법적 소지가 문제 되면 기껏 구해내고도 돌려보내야 하니,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무력감에 불쾌해진 정혁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던 때였다.
도훈이 갑자기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정혁아.”
“…….”
정혁이 눈동자만 느른하게 끌어 올렸다.
“은서 씨 친구, 그러니까…… 서지석이 회사 밑에 와 있다는데?”
지석에게 붙인 사람의 보고와 보안실에서의 연락이 동시에 들어와 있었다.
“……올려보내.”
가시를 바짝 세우고 저를 노려보던 어린 녀석이 떠올랐다.
정혁의 눈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마른 침을 삼킨 지석이 힐긋 정혁을 쳐다봤다.
정혁의 날카로운 눈이 마치 저를 꿰뚫는 것 같았다.
그를 찾아오기까지 무척 망설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 꼭 지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이미 은서와 연락이 끊긴 지도 몇 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더는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마지막 동아줄이었던 형교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으니, 그나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혁에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앉아요.”
소파 가운데를 권하며 정혁이 그 맞은 편에 앉았다.
꽤 오랜만에 보게 된 지석은 피골이 상접한 꼴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상당히 마음고생을 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정혁은 은서의 상황이 이 녀석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급해 보이니 서론은 집어치우죠.”
다리를 꼰 정혁이 낮게 읊조렸다.
“날 찾아온 이유는?”
“……은서와 연락이 되질 않아요.”
“소식을 물으러 온 거라면 잘못 짚었는데. 연락이 안 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서.”
입술을 질끈 문 지석이 죄책감에 못 이겨 고개를 떨궜다.
“……저 때문인 것 같아요.”
꼬았던 다리를 푼 정혁이 두 무릎 위에 팔을 걸치며 몸을 숙였다.
“이봐요, 서지석 씨.”
“!”
제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지석의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
“전부 털어놔.”
정혁의 눈빛이 사나워져 있었다.
“차은서와 무슨 일이 있었지?”
*“이렇게 또 한 학기가 끝이 났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진정한 방학을 맞이한 교수들은 점심을 먹으면서 모처럼 여유로운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올해도 이렇게 끝이 나는군요.”
“나이를 먹으니 시간만 정처 없이 흐릅니다.”
“참, 윤 교수.”
“네.”
그중 한 명이 수일에게 관심을 보였다.
“듣자 하니 차은서 양과 같이 전시회를 연다고?”
“그런 계획은 없습니다만.”
“학교 내에 소문이 파다해.”
“하하, 은서 양의 재능을 아끼는 건 사실이지요.”
“그래. 뛰어난 친구이긴 하지. 10년 내로 한국 미술사에 이름을 새길 친구야.”
“그렇지요. 아, 그러고 보니…….”
동의하던 교수 하나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번 기말고사 때 시험을 보지 않았더군요.”
“아, 은서 양 말인가? 내 수업도 그랬는데.”
“……시험을 보지 않다니요?”
수일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성적을 매기려고 보니까 없더라고. 조교에 물으니 시험에 오지 않았다더구만.”
“저도 그랬습니다. 허, 참.”
“성실한 학생인데 무슨 일이 있었나?”
“요즘은 일부러 졸업을 유예하기도 하니까요.”
“그런 거라면 졸업 유예신청을 하면 될 터인데.”
주절거리는 동료들과 달리 수일은 편히 웃을 수 없었다.
악몽 같던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나 결혼해.”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엉망인 꼴로 찾아온 수영은 울 듯 말듯한 얼굴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었다.
그리고 그 말만을 남긴 채 수영은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수영의 소식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설마…….’
불길한 예감에 수일은 입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급히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내저은 수일이 애써 동료들에게 웃어 보였다.
“아, 그래요 윤 교수. 또 보세.”
몸을 일으킨 수일은 급히 교수실로 걸음을 옮겼다.
“교수님, 벌써 오셨어요?”
“김 조교. 혹시 차은서 양 소식 뭐 좀 아나?”
“아. 은서요.”
조교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에 소문이 좀 돌았는데, 연락 두절됐다는 것 같아요.”
“연락 두절? 언제부터?”
“기말고사 때부터요.”
“……!”
왜 알리지 않았냐고 호통치려던 수일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조교의 입장에서는 학생 한 명의 일을 교수에게 알릴 이유가 없었다.
“……교수님?”
“알겠네. 혹시 은서 양 연락이 되면 내게도 전해주겠어요? 작품 문제로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네, 알겠습니다.”
교수실로 들어서고서도 수일은 방안을 서성였다.
안 되겠다 싶어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