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46화 (46/82)

46.

“은서네와 만나는 날짜, 좀 빨리 잡으면 안 돼요?”

“녀석아, 뭐가 그리 급해.”

형교는 재촉하듯 묻는 지석에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게…….”

지석이 말끝을 흐렸다.

은서가 학교에 나오질 않는데 이상하게 불안하다고, 그리고 그게 제 탓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었다.

주춤거리는 지석에 형교가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앉아 보거라.”

지석의 등살에 떠밀려 중훈과 자리를 만들긴 했지만, 형교는 중훈이 저를 두고 저울질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일단 중훈의 속내를 모르는 척하며 가족 모임이란 명목하에 모임을 이어갔다.

지석이나 아내야 오랜만에 재개된 자리를 즐기느라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형교는 중훈이 지석과 은서를 결혼시킬 마음이 없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은서랑 결혼, 쉽지 않을 거다.”

“…….”

“너도 성인이고, 네가 은서에게 진지하니 나도 솔직하게 말하마.”

지석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걸 보면서도 형교는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난 그 친구 야망에 맞춰 줄 수 없다.”

지석도 모르지 않았는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네가 은서와 서로 마음이 같아서, 만난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

“은서의 마음이 같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결혼을 진행할 수는 없어. 그러려면 그 친구가 원하는 걸 손에 쥐여줘야 하는데, 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

“…….”

“네가 나한테 서운해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어떤 신념으로 이 자리에 있는지는 가족인 네가 더 잘 알겠지?”

“……네.”

“그래, 서운해도 언젠가 네가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지석이 힘없이 대답했다.

더는 형교에게 무턱대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길을 잃은 지석의 어깨가 더욱 힘없이 내려앉았다.

*“차 의원 딸하고는 잘 만나고 있는 게냐?”

“왜요?”

밥을 먹다 말고 뜬금없이 물어오는 순규에 민준이 경계하듯 물었다.

“차기 대선 후보로 차 의원을 밀 거다. 김 회장도 동의한 내용이고.”

“……그래요?”

안 그래도 비열해 보이는 순규의 가느다란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그래, 그러니까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잘해두란 말이야.”

“내가 무슨 엉뚱한 짓을 한다고, 하여간 걱정도 팔자셔.”

“네 놈 행실을 봐. 내가 걱정 안 하게 생겼는지. 그나저나, 어떤 아가씨더냐?”

“아버지는 본 적 없어요?”

“교회에도 데려오지 않고, 꽁꽁 숨겨 두니 말이다.”

“흐응, 딸을 엄청 아끼나 봐요.”

“아끼는 정도가 아니지.”

순규가 무언가를 떠올리며 퍽하니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그런 딸 아이를 너와 엮어주려는 거 보면 그쪽도 이 관계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뜻일 테지.”

순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판을 짜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제 뜻대로 되어가는 상황에 절로 웃음이 났다.

“그래서 어떤 아가씨냐고.”

“글쎄요, 일단 예쁘고…….”

민준이 곰곰이 생각하며 말을 늘였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더라고요.”

적당히 튕기면서 밀당도 할 줄 알고.

“어차피 싫든 좋든, 네 아내 될 사람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잘 지내도록 해.”

“알겠어요.”

“물론 차 의원이 미끄러지면, 그때는 또 고려해보겠지만.”

숟가락을 내려놓은 순규가 국그릇을 들어 후루룩 들이켰다.

*“재유에서 도울 것 같습니다.”

“재유에서요?”

“네, 아무래도 의원님께 거는 기대가 큰 것 같습니다.”

“허허, 이것 참.”

순규와의 대화를 떠올리는 중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순탄하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꿈꾸던 미래가 머지않은 듯했다.

“다녀오셨어요.”

“애는.”

“계속 방에 있었어요.”

“잊지 마, 당신 역할이 뭔지.”

“네.”

경미를 뒤로 하고 서재로 들어간 중훈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맨 위 칸 서랍을 열었다.

평상시 잠가두는 서랍은 오로지 저만 열 수 있었다.

중훈은 빈 서랍 안에 놓인 찢어진 사진 조각을 집어 들었다.

‘멍청한 것.’

중훈이 반으로 찢긴 수영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비웃었다.

“얌전히 있었으면 영부인 자리까지도 올려줬을 것을.”

중훈이 책상 위에 있던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불을 붙였다.

환히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찢어진 면 때문에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죽어버리다니.”

후회하는 꼴을 보지도 못하게 말이야.

회색 연기를 몇 번 뿜어대던 중훈이 수영의 얼굴 위에 담배를 지져 껐다.

*은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몇 시지?’

은서의 눈동자가 다급히 탁상시계를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은 정혁과 만나는 날이었다.

“어머, 은서 일어나 있었니?”

마침 쟁반을 들고 들어오던 경미가 놀라서 반가운 얼굴을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있는 은서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네.”

은서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가는 감금 생활에 이젠 밤낮도 무의미해진 터였다.

“오늘은 한 숟갈이라도 더 먹으면 좋겠어.”

경미가 습관처럼 말하며 미음 그릇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네, 먹을게요.”

며칠 사이 약해진 몸을 느낀 은서가 비틀거리며 책상 앞으로 갔다.

경미가 숟가락을 집어 드는 은서를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초반 며칠은 내보내달라며 난리를 치던 은서는 갑자기 곧 죽을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있는가 싶더니 이제는 현실을 깨달았는지 포기한 듯 얌전해졌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하고.”

“……네.”

꾸역꾸역 빈 속에 멀건 죽을 밀어 넣은 은서는 따뜻한 물로 샤워까지 마쳤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으로는 내내 끊임없이 집을 빠져나가는 순간을 상상했다.

오늘을 위해 잠자코 있었다.

중훈과 경미의 경계가 조금이라도 풀어질 때를 노리자 싶었다.

조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다.

젖은 머리를 말리며 은서는 창문 밖으로 몸을 살짝 내밀었다.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높이를 봤을 때 어디 한 군데 뼈만 부러져도 다행이었다.

가장 현실적이고 안전한 건, 역시 현관문을 거쳐 대문을 빠져나가는 거였다.

어차피 집 안에는 경미 하나였다.

거의 24시간 붙어 있다시피 들락날락하던 경미는 최근 긴장이 풀렸는지 오가는 텀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잠깐이면 돼.”

기운 없는 몸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죽어라 뛰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은서가 옷을 갖춰 입고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계단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어지럼증이 일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며 버텼다.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뒤에 숨어 있느라 거실과 현관이 보이지 않았지만, 20년 넘게 산 집이었다.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구조가 훤하게 보였다.

이제 현관까지는 몇 달음만 뛰어가면 된다.

‘지금!’

경미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며 타이밍을 보던 은서가 곧 튕겨 나가듯 내달렸다.

“!”

곧장 현관문으로 달려든 은서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굳게 닫힌 문이 꼼짝도 하질 않았다.

“……은서야!”

내달리는 소리에 쫓아 나온 경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짠한 생명체를 보듯 눈을 찡그렸다.

은서의 시선이 개폐장치 밑으로 향했다.

안팎에서 마음대로 열 수 없도록 주먹만 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하…….”

허탈함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은서야, 포기해. 이 집에서 나갈 수 없어.”

다가온 경미가 은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전부 달아놨어. 현관 말고도 네가 나갈 수 있을 만한 곳은 전부 다.”

“……왜…… 왜 이렇게까지…….”

그저 혼을 내려고 가둬둔 게 아니었다.

중훈은 진짜로 자신을 이 집에 가둔 거였다.

집을 뛰쳐 나가던 수영의 다급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짧게나마 제게 머물렀던 안타까운 그녀의 시선도.

“…….”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 화 풀리실 때까지만, 얌전히 있자. 응?”

경미가 도닥이듯 은서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은서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어쩐지 중훈의 화가 풀려도 저는 이 집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

정혁은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만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은서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은서의 말대로라면 시험은 이제 끝났을 것이고 그녀는 자체 종강에 들어갈 때였다.

본격적인 방학이 되면 집 밖을 나오는 게 어려울 거라며, 그러니 꼭 오늘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그녀였다.

‘연락해 봐?’

그런 은서가 연락이 없자 정혁은 고민에 빠졌다.

“오늘도 안 만나?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마침 대표실 안으로 들어오던 도훈이 비식 웃으며 정혁을 놀려댔다.

“야, 무슨 일 있어?”

그러다가 어딘지 심각해 보이는 정혁에 덩달아 진지해졌다.

“……느낌이 좋지 않아.”

정혁이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게 무슨…….”

도훈이 의아해하며 말을 이을 때였다.

정혁의 휴대폰 액정에 빛이 들어왔다.

발신인을 본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주?”

정혁이라면 재미가 없다며 질색을 하는 현주인데, 그녀가 먼저 정혁에게 전화를 걸어 오다니 의외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가기도 전이었다.

-오빠!

현주의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야.”

정혁은 불안함에 일렁이는 기분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오빠 혹시 최근에 은서랑 연락해 봤어?

“……아니.”

-아…… 그래?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해.”

-아니, 그게…… 후, 나도 이게 지금 진짠가 아닌가 싶은데. 학교에 은서가 행방불명이라는 소문이 돈대!

“…….”

정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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