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모임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불안함을 감지한 은서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두려워서 옆에 앉은 중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지석이가 오해한 거예요.”
은서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아시잖아요, 일부러 수업도 다 피해서 들었고 연락도 받지 않았어요.”
“…….”
중훈의 침묵에 불안은 더 증폭됐다.
“아빠,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조용히 가자.”
중훈의 서늘한 한 마디에 은서는 입을 다물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저 긴장을 잠시 풀었던 것뿐이었다.
수일을 만난 것도, 딱 한 번이었다. 혹시나 싶은 계산적인 마음으로 만난 거였다.
그랬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마지막 기말고사를 앞두고.
‘어떻게 하지.’
중훈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두려웠다.
입 안이 터질 정도로 얻어맞았던 그 날 저녁이 떠올랐다.
그때의 통증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무릎 위에 둔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여서 은서는 재빨리 손을 움켜쥐었다.
‘차라리 이대로 도망칠까.’
차에서 내린 은서가 순간 고민한 것을 눈치라도 챈 듯 중훈이 대문 안으로 은서의 등을 조용히 밀었다.
“의원님, 그럼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
은서가 불안하게 보좌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허리를 숙인 그의 고개는 더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은서 왔니?”
현관까지 마중을 나온 경미가 곧 중훈을 발견하고는 바짝 굳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뒤에서 중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어떻게, 같이 들어오시네요.”
여전히 경미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지석네와 식사 자리를 갖는 중훈의 철저함에 소름이 돋았다.
“방으로 올라가.”
중훈이 차갑게 명령했다.
“아, 아빠.”
이대로 넘어가는 걸까? 정말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은서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계단을 올랐다.
‘뭘까.’
방에 들어서자마자 초조하게 오가며 중훈의 속마음을 읽어보려 할 때였다.
“!”
입구에 저승사자처럼 나타난 중훈에 은서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손에는 골프채가 들려 있었다.
은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휴대폰.”
‘아.’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은서가 휴대폰을 꺼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손이 저절로 떨렸다.
휴대폰을 건네받은 중훈이 곧장 바닥으로 내던지곤 망설임 없이 골프채를 휘둘렀다.
콰직, 액정이 갈라지고 휴대폰이 엉망으로 망가질 때까지 중훈은 몇 번이고 채를 내리꽂았다.
그 장면들이 마치 영화를 보는 듯 느리게 흘러갔다.
“후.”
골프채를 바닥에 던진 중훈이 계단 끝에 불안하게 서 있던 경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디에도 못 나가게 해.”
“아빠!”
은서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 기말고사는 고작 사흘이 남았을 뿐이었다.
“못 지키는 순간, 당신도 끝이야.”
“…….”
“알아들어?”
“……네.”
창백해진 경미가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중훈은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미안해, 은서야.”
눈이 마주친 경미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중훈을 따라 내려갔다.
“…….”
은서는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모든 게, 끝이었다.
*“으으, 시험 빨리 끝나면 좋겠다.”
“나 어제 밤샜어. 지금 카페인으로 버티고 있다.”
“시험 싫다.”
“나도!”
“잠깐, 그런데 은서 언니는 왜 안 오지?”
재잘대던 아이들은 금방 은서의 빈 자리를 깨달았다.
“그러네. 시험 5분 전인데.”
“설마 늦잠 잤나?”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서 언니가?”
“그건 모르지.”
“그래, 전화 한 번 해보자.”
모여 있던 동기들 중 하나가 전화를 걸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뭐야, 전화 안 받는데?”
“정말? 무슨 일 있나?”
한 번도 학년 수석을 놓쳐 본 적 없는 은서가 시험에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자,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시험지를 들고 오는 조교를 본 아이들이 의아해하면서도 각자 제자리를 찾아갔다.
“은서가 안 왔다고?”
민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락도 안 받던데요?”
도서관에서 마주친 과 후배는 걱정된다는 듯 은서의 안부를 물어왔다.
“언니도 몰랐어요?”
“시험 시간이 달라서 따로 연락 안 해 봤지.”
“아, 그랬구나.”
당연히 단짝인 민정은 알겠거니 싶었는데, 민정의 반응을 보니 그녀도 아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한 번 연락해 볼게. 내일도 시험이니까, 내일은 나오겠지.”
“그렇겠죠?”
“응, 그럼 공부 열심히 해.”
민정이 후배의 어깨를 토닥이고 몸을 돌렸다.
민정의 걸음이 이내 조금씩 느려졌다.
“……아니야.”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민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쯤이면 시험도 끝났겠구나.’
제 방 창가에 앉은 은서는 자포자기한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허망함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강제로 집에 감금되었다.
중훈은 은서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2층을 벗어나지 말라고 명령한 탓에 오로지 제 방과 화장실만 오갈 수 있었다.
심지어 중훈은 1층에 내려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식사는 매 끼니 경미가 방으로 가져다주었고, 경미에게는 은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중훈은 마지막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는 간절한 청도 깔끔히 무시했다.
휴대폰마저 망가진 은서가 외부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이제 마지막 시험까지 끝났으니, 더 이상 희망을 꿈꿀 수도 없었다.
“은서야.”
인기척을 낸 경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미음을 담은 그릇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었다.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 은서를 본 경미가 한숨을 삼키며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다가갔다.
“은서야, 뭐라도 좀 먹어야지.”
숨은 쉬고 있는 걸까.
불안하게 호흡을 확인한 경미가 은서의 어깨를 흔들었다.
“……죄송해요. 생각이 없어요.”
“그래도 먹어야지. 벌써 며칠째 굶고 있잖아.”
“…….”
“이렇게 안 먹으면 강제로 수액 맞아야 해.”
한때 간호사였던 경미가 곁에 있으니 어지간히 큰 문제가 아니라면 병원에 갈 일도 없을 거였다.
“조금만 먹어, 응?”
“…….”
은서는 걱정이 가득한 경미의 얼굴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제가 이럴수록 경미를 곤란하게 만든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경미에겐 아무 죄가 없었다.
중훈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그녀가 중훈 대신 자신의 편에 서기는 힘들다는 걸 잘 알았다.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어서 미안해, 은서야.”
방에 올 때마다 미안함을 토로하는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
하지만 괜찮다는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먹고 싶은 거 생기면 이야기해, 알았지?”
경미가 은서의 등을 쓸어 내리며 밖으로 나갔다.
미음을 뜨는 시늉만 하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은서는 책상 위의 달력을 보았다.
이틀.
이틀 후면 정혁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하정혁.’
은서는 가만히 그의 이름을 되뇌어봤다.
그의 곁이, 그의 품이 몹시도 그리웠다.
‘이틀 후야. 이틀.’
어떻게든 그를 볼 수 있다면.
마음속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은서는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다시 집었다.
*'이제 하루인가.’
문득 달력을 확인한 정혁이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은서를 못 본 지 2주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가뜩이나 바쁜 하루하루라 시간은 금방 흘렀지만, 그러면서도 허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이 엄해서요. 연락은 가급적 먼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초반에 해 오던 신신당부 때문에 항상 은서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도 점점 횟수가 늘어가는 연락에 안심했었는데 그마저도 지난 주말 이후로는 뚝 끊겨 버렸다.
‘……바쁜가.’
마지막 시험이라 잘 봐야 한다며 비장한 태도긴 했다.
그래도 은서가 시험을 챙길 정도의 여력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었다.
막상 시험에 밀린 것 같아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괜찮겠지.’
부디 별일 없이 시험을 잘 치르고 웃는 얼굴로 나타나길.
하루만 기다리면 보게 될 얼굴을 생각하며 미소 지은 정혁이 다시 서류를 손에 들었다.
*“이쯤 되면 집으로 찾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집이 어딘지 알고. 학과에 물어봐도 개인 정보라 안 알려줄 텐데.”
“민정 언니는 모르려나?”
“알았으면 진작 가봤겠지?”
“하긴.”
은서는 결국 마지막 시험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조차 닿질 않아 그녀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가뜩이나 유명 인사인 은서의 연락 두절 소식은 미대 전체로 빠르게 퍼졌다.
“물어볼까?”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해?”
“그래도, 소꿉친구라고 했잖아. 뭔가 알지 않을까?”
“민정 언니도 모르는데, 마찬가지 아닐까?”
“곧 종강인데 이대로 가면 찝찝하잖아.”
지석은 저를 지척에 두고 속닥대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저를 보던 여학생 둘이 움찔하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아마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은서의 과 후배들이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계속해서 시선을 주자 속닥대던 둘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저희 은서 언니 같은 과 후배인데요, 은서 언니 친구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혹시 은서 언니 최근에 연락해 보셨어요?”
“……네?”
은서를 핑계 삼아 접근하려는 의도인가 싶었던 지석이 엉뚱한 질문에 미간을 찡그렸다.
“은서 언니 기말고사 내내 학교 안 왔어요. 모르셨어요?”
시선을 주고받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학교를, 안 왔다고요?”
“네. 연락도 안 되고요.”
“…….”
“은서 언니랑 연락되면 후배들한테도 연락 좀 주라고 해주시겠어요?”
“아, 네. 그럴게요.”
지석이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과 같이 식사한 게 바로 전 주말이었다.
그 주말이 끝나고 내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설마.’
찝찝하고 불길한 감각이 뒷덜미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