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이제 기말고사라서 당분간은 못 만날 거예요.”
침울해지려는 기분을 숨기며 은서가 차분한 척 통보했다.
“그래.”
항상 정혁과 만났던 그 시간은 이제 마지막 조별 과제에 할애해야 했다.
절대 양보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것도 저녁이나 주말은 시간이 안 되는 은서 때문이었으니 그녀가 이기적으로 굴 수는 없었다.
민준을 이용하는 것도 너무 횟수가 잦아지면 곤란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끝나고…… 또 만나는 거죠?”
은서가 불안하게 물었다. 그는 항상 제게 아쉬움을 보이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걸 내게 물으면 어떡해.”
정혁이 픽 웃으며 은서의 미간을 꾹 눌렀다.
“잊었어? 연락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은 항상 나잖아.”
“…….”
오만한 말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은서는 불안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연락할게요.”
은서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동차 문을 열었다.
*“시험공부 많이 했어?”
“언니, 과제랑 같이하려니까 죽겠어요.”
“어흐, 깜짝이야. 뭐야? 좀비 떼야?”
“어서 와, 좀비 4번.”
트레이닝복에 머리를 대충 동여맨 아이들이 빈 강의실에 모이면서 앓는 소리를 했다.
웃으면서 대화를 지켜보던 은서는 조용한 휴대폰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렸다.
원래였다면 정혁을 만났을 시간이었다.
‘일하고 있겠지?’
그와 고정적으로 만나온 것이 벌써 3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그와의 만남이 일상인 듯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도 지금 자신처럼 허전해하고 아쉬워하고 있을까.
어쩐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언니들은 이번 시험 끝나면 졸업이네요. 진짜 마지막이네.”
은서와 민정을 번갈아 보던 후배 하나가 서운한 티를 냈다.
그 말에 자연스레 은서와 민정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네. 진짜 졸업이네.”
은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학교만 무사히 졸업하면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중훈이 더 이상 수일을 경계할 이유도 없을 테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러니 결혼 문제만 어떻게든 무사히 넘기면 됐다.
졸업하게 되면…… 그럼 정혁과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문득 멋진 사회인이 되어 그의 곁에 서 있는 제 모습이 그려졌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자꾸만 정혁에게로 흐르는 생각을 다잡으며 은서는 눈앞의 대화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럼, 오늘 나눈 내용 토대로 해서 각자 작업해서 보내는 걸로 해요.”
“그래.”
“그럼 다들 힘내세요.”
아이들과 헤어진 은서는 민정과 도서관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이 시간에 같이 있는 거 되게 오랜만이네.”
민정이 떠보듯 말을 흘렸다. 항상 캠퍼스를 서둘러 떠나던 은서가 어쩐 일인가 싶었다.
대체 그 시간마다 어딜 갔던 걸까.
“응. 그러게.”
하지만 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제게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가장 옆에서 단짝처럼 붙어 있어도 은서는 어느 선 이상의 이야기는 제게 해주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도 부족한가.’
갑갑함에 민정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잠깐만, 나 전화가 와서.”
은서가 민정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요?”
곤란한 듯 망설이던 은서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왜? 누군데?”
“윤 교수님네 조교 언니.”
“아.”
“지금 잠깐 오라고 해서, 다녀올게.”
“응. 도서관에 있을게.”
은서를 보내고 도서관으로 가려던 민정이 방향을 틀었다.
지금쯤이면 지석과 마주칠 확률이 높은 시간대였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 걷지 않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지석이 보였다.
주변 어디에도 시선을 주지 않은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야, 서지석.”
민정이 환히 웃으며 지나치는 지석의 팔을 툭 쳤다.
“민정아.”
“시험 시작했어?”
“응, 넌?”
“나도 모레부터 시작이야.”
“그래? 그런데…… 은서는?”
지석이 민정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
민정이 무너지는 표정을 수습하며 빙긋 웃었다.
“윤수일 교수님 알아?”
“아, 알지. 유명한 화가시잖아.”
“그분 호출로 잠시 면담 갔어.”
“호출? 왜?”
지석이 호기심을 한껏 드러냈다.
저를 향한 호기심이 아닌데도 지석이 저와의 대화에 집중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은서 그림을 높이 사시거든. 예전부터 은서한테 관심 많이 보이셨어. 그 교수님이 은서 제자 삼고 싶어 하는 거, 미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렇구나.”
지석이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도 그 교수님 그림 좋아하는데. 그럼 은서한테도 좋은 거겠다.”
“……응, 대단한 거긴 하지.”
민정이 씁쓸하게 수긍했다.
“아. 민정이 넌? 유화였던가.”
너무 기쁜 티를 냈나 싶어 머쓱해진 지석이 뒤늦게 민정에게도 관심을 드러냈다.
“……나 동양화잖아.”
“아, 그랬나? 미안 미안.”
지석이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이 멍청아. 넌 친구가 뭐 그리는지도 모르냐.”
“순간 헷갈렸어.”
친구를 놀리듯 지석을 탓하는 데 쓴 물이 올라왔다.
몇 년을 붙어 다녔어도 제가 지석의 관심 밖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된다.
“그런데 너 요즘 미대 쪽 안 오더라?”
“아, 응.”
“뺀질나게 드나들더니, 바빠?”
“뭐…… 조금?”
“이따 은서랑 도서관 갈 건데, 같이 갈래?”
“아.”
다른 때였으면 무조건 따라갔을 지석이 망설이고 있었다.
‘응?’
민정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미안. 둘이 공부해. 나는 가볼게.”
“음? 은서 본 지도 오래됐잖아.”
불안하게 묻자 지석의 눈동자가 위로 솟구쳤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괜찮아. 그럼 공부 열심히 해.”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그의 뒤로 ‘금방 볼 거니까.’라고 중얼거리는 지석의 말이 선명하게 날아와 꽂혔다.
‘금방 본다고?’
무언가 제가 모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민정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시험 기간이라 바쁠 텐데 불러서 미안하다. 시험 끝나면 방학이라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말씀하세요.”
여전히 차갑게 거리를 두는 은서에 수일이 따스하게 웃었다.
그래도 전처럼 무시하지 않고 얼굴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다.
“실은 네 의견을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단다.”
그가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들고 와 은서의 앞에 내려놓았다.
여러 종류의 자료였다.
“졸업하면 유학 갈 생각 없니?”
그제야 해외 유명 대학의 이름이 적힌 팸플릿이 선명하게 보였다.
“…….”
의문이 담긴 은서의 눈동자가 수일에게 향했다.
“사실 진즉부터 이 이야길 하고 싶었다만…….”
그가 흐리는 말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내내 제가 자신을 피해 다녔으니 말할 기회가 없었다는 뜻일 터.
“너도 이미 네 재능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지. 국내에서도 여건이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조금 더 넓은 곳에서 공부를 더 해보면 어떨까 해서.”
“…….”
왜 이런 걸 권유하는 걸까.
중훈에게서 떼어 놓고 싶어서? 아니면 순수하게 재능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
다른 이도 아닌 수일이기에 그의 의도가 아리송했다.
“……네 엄마.”
수영을 언급하자 움찔하더니 경계하듯 서늘해지는 은서에 침음한 수일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수영이는 네 재능을 알게 된 후부터 네 유학을 준비했었단다. 본인이 무척 나가고 싶어 했는데 가지 못한 아쉬움이 컸을 거야. 그래서 네가 그림 그릴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어.”
“…….”
“그 뜻을 대신 전할 의무가 있어, 내게는.”
“…….”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수일이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네 아버지와…… 한 번 의논해 보렴.”
은서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수일이 중훈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
“혹 그게 여의치 않게 되면, 그때는 꼭 내게도 의논해주면 좋겠구나.”
“……네.”
“그래, 그럼 시험 잘 보렴. 마지막 학기니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그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 교수실을 빠져나온 은서는 묘한 기분이었다.
유학.
중훈의 통제가 심해지면서부터 언제부터인가 막연히 불가능한 꿈이라고만 여겼다.
만약 중훈이 결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졸업 후에 학교를 벗어나도 중훈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런 수단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은서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수일을 더이상 피하지 않는 건 언젠가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감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타이밍에 수일이 건넨 제안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 정혁은……?
“아.”
또 자연스레 정혁으로 귀결되는 생각에 은서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기말고사를 끝내는 게 우선이었다.
중훈의 핍박에도 겨우 지켜낸 대학 생활의 마지막 점을 찍을 때였다.
*“하필 시험 기간하고 겹쳐 버렸구나, 미안해서 어쩌지.”
식당에 마주 앉은 형교가 껄껄 웃으며 미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애들 몸보신도 하고 잘 됐죠, 뭐. 많이 먹으렴, 은서.”
“네, 아줌마.”
주말 저녁, 지석의 식구들과 식사 자리를 갖게 된 은서는 늘 그랬듯 가면을 장착하고 그들에게 웃어 보였다.
이 모임이 아직 유지되는 걸 보면 중훈의 저울질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석의 마음이 짐처럼 남아있긴 했지만, 은서는 남 일처럼 상황을 방관할 수 있게 됐다.
어차피 중훈의 뜻대로 움직일 거였다. 그리고 은서의 판단대로라면 중훈이 지석의 손을 들어주는 미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지석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정혁의 영향이었다.
“의원님은 행복하시겠어요, 은서처럼 이렇게 예쁜 딸이 있어서.”
“그런가요.”
중훈이 껄껄 웃으며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은서, 첫 개인전 때 아줌마가 그림 꼭 구매할게.”
“아…… 감사합니다.”
“아마 후회 안 하실걸요? 은서 그림 실력 정말 뛰어나요. 학교에서도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얘는.”
성연이 푼수 같은 제 아들을 보며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 아, 혹시 화가 윤수일 아세요?”
은서의 눈동자가 바싹 굳었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 지석을 쳐다봤지만, 지석의 시선은 계속 어른들에게 향해 있었다.
입안이 버석하게 말랐다.
중훈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다.
“알지. 유명한 분이잖아?”
성연과 형교가 아는 체를 했다.
“……그 화가가 왜?”
중훈이 부드러움을 가장하며 물었다.
“그분이 은서 수제자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며칠 전에도 면담하고 왔잖아, 그렇지?”
지석이 동의를 구하듯 은서를 보며 물었다.
“……그래?”
중훈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온한 목소리는 마치 태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함 같았다.
“…….”
……끝났다.
다가올 미래를 직감한 은서가 고요히 눈을 감았다.
발밑이 훅 꺼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