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43화 (43/82)

43.

잔소리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 몰랐던 정혁이 헛웃음을 지었다.

갈수록 그녀는 여우가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하, 차은서.”

은서는 비죽 입꼬리만 비트는 그의 표정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정혁 특유의 시니컬하고 서늘한 표정을 보는 것조차도 좋았다.

며칠 내내 만나러 오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우습게도 회사 일로 바쁠 그가 신경 쓰여서였다.

강남 한복판에 우뚝 솟은 대형 빌딩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다녀오고 나니 새삼 그의 위치가 와닿았다. 그가 지금 제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민준을 이용해 주말에 시간을 낸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조금 더 오래 그와 있고 싶기도 했고, 정혁도 평일보다는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끄러미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허기가 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공복감이었다.

“하정혁 씨.”

“왜.”

잔소리란 단어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그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나 배고파요.”

“…….”

어이가 없다는 듯 은서를 내려다보던 정혁이 쯧, 혀를 차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은 그냥 앉아 있어.”

요리할 때면 항상 제 옆에 붙어 있으라 지시하던 정혁이기에 자연스레 그의 곁에 따라붙은 참이었다.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하는 말에 괜히 심통이 났다.

“예외가 어디 있어요.”

고집스레 정혁의 옆에 달라붙자 정혁의 묵직한 우디향이 몸을 에워쌌다.

은서는 티 나지 않게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폐부를 꽉 채우는 그의 향기를 계속 누리고 싶었다.

“좋으실 대로.”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 정혁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은서는 그의 움직임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눈으로 좇았다.

그가 요리하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정혁은 병아리처럼 쫓아다니는 은서를 옆에 둔 채 계란 몇 알만 꺼내 들었다.

차은서가 이 집에 드나들기 전에는 텅텅 비어 있던 냉장고였다.

그녀 때문에 식자재를 채워 놓기 시작했다는 걸 은서가 알 리 없었다.

알릴 생각도 없었고.

*“아씨, 그건 대체 뭐였지?”

주말을 즐기려고 나갈 준비를 하던 민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다.

“네, 은서 씨.”

발신인을 확인한 민준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요 어린 여우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했나 싶었다.

-잠깐 통화 가능하세요?

‘흐음?’

민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서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네, 이야기해요.”

-우리 이번 주말에 만난 걸로 하죠.

“이번 주말?”

-네. 같이 만나 점심부터 저녁까지 같이 먹은 걸로요.

민준이 힐끗 달력을 살폈다.

하긴, 마지막 만남 이후로 벌써 2주나 흘러 있었다.

슬슬 말을 맞출 때가 되긴 했지.

“그래요, 주말에 만난 것으로.”

-그럼.

그 한 마디를 끝으로 통화가 뚝 끊겼다.

“왜 그런 전화를 했지?”

은서와의 통화를 떠올리며 황당해하던 민준의 표정이 곧 무언가를 깨닫고 모호해졌다.

진짜 만나는 건 아니지만, 만난 것으로 해달라?

마치 남자친구와 여행을 가려고 친구에게 알리바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은 말이 아닌가.

민준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그런 거라면 굳이 제게 연락할 필요는 없었다. 진짜 친구에게 연락하면 되는 일이니까. 아무리 온실 속 화초이든 뭐든 그런 친구 하나 정도는 있을 거였다.

‘그럼 왜 나한테?’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리던 민준이 깨달았다는 듯 씩 웃었다.

“아하.”

굳어가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톡톡 만지며 정돈한 민준이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옷장에서 재킷을 꺼내 걸치던 민준이 연신 키득거렸다.

‘관심 끌고 싶다 이거겠지.’

자존심은 꽤 있어 보이던데.

이런 식으로 저와 기 싸움을 해서 밀당이라도 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깜찍한 구석이 있네. 그럼 좀 어울려 줘 볼까?’

인형 같은 얼굴을 떠올리며 민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먹어.”

빠르게 계란죽을 끓여 낸 정혁이 은서의 앞에 내려놓았다.

보아하니 거의 굶다시피 한 모양인데, 괜히 이것저것 먹였다가 탈이라도 나면 곤란했다.

“잘 먹겠습니다.”

은서가 빙긋 웃으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기분이 유독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

정혁은 은서가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핼쑥해진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항상 새빨갛다 싶을 만큼 붉은 입술 색도 조금 옅어 보였다.

환자에 가깝다 싶을 만큼 안쓰러운데도, 작게 벌어진 입 사이로 나와 입술을 핥는 붉은 혀는 색정적이었다.

은서가 오물거리면서 먹는 모습은 늘 시야를 잡아채 뗄 수 없게 했다.

‘나도 참, 중증이군.’

발목을 반대쪽 무릎 위에 얹은 채 팔짱을 낀 정혁이 조소했다.

늘 일에 파묻혀 있던 주말인데, 그녀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똑같던 일상이 새로워진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떻게 나왔어.”

정혁이 스치듯 물었다.

철저하게 통금 시간을 지키는 그녀가 이렇게 일탈을 할 때면 비를 쫄딱 맞고 안겨 오던 그 날이 떠올라 걱정스러웠다.

“…….”

생각 없이 물은 거였는데 꽤 난처한 질문이었는지 은서가 먹는 행위를 멈췄다.

그리고는 망설이는 건지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마주쳤다 피하기를 반복했다.

“……뭐야.”

무언가를 감지한 정혁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말해도 돼요?”

“그냥 말해.”

“맞선 본 남자 만난다고 거짓말했어요.”

“…….”

이번엔 정혁이 말을 잇지 못했다.

예상도 못 한 답변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렇게 못 나오니까.”

은서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 남자랑 합의했어요. 어차피 각자 집에서 원하는 결혼이었고, 억지로 정리하려면 반발이 있을 테니 당분간은 이렇게 유지하자고.”

여기서 지석에 대한 것까지 말하면 어떻게 될까.

은서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

“허.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정혁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 모습에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역시 실망했으려나.

은서의 긴 속눈썹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차은서.”

정혁이 손가락으로 식탁 위를 톡톡 두들겼다.

“잘했어.”

“……네?”

“잘했다고.”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은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기적으로 굴라는 건 정말 진심이었던가 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원래 그렇게 다 이용하는 거야.”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턱을 오만하게 들어 올렸다.

“…….”

“그런데, 차은서. 문득 궁금해지는데 말이야.”

꼬았던 다리를 내린 그가 식탁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어?”

“…….”

픽 웃는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모습에 훅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보고 싶었나? 아니면…….”

정혁의 손가락 끝이 은서의 쇄골에 닿았다가 아래로 죽 미끄러졌다.

“이게 그리웠나.”

심장이 쫄깃하게 방망이질 쳤다.

“아마…….”

은서가 마른 침을 삼키며 정혁과 눈을 마주쳤다.

“둘 다 일지도요?”

·침대 헤드에 커다란 쿠션을 놓고 눕듯이 기대어 앉은 정혁은 문득 담배를 태우고 싶어졌다.

‘이참에 아예 끊어야겠군.’

몸을 일으키는 대신 그는 제 몸 위에 엎드려 누운 채 잠이 든 은서를 내려다보았다.

여느 때처럼 순식간에 잠에 빠져든 그녀의 결 좋은 긴 머리가 각 잡힌 가슴 근육 아래로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다.

손을 뻗어 이마 위의 머리를 스륵 쓸어 넘기자 곤히 잠든 얼굴이 드러났다.

평온하기까지 한 얼굴에 허망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순간만큼은 은서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없다는 게 안심이 됐다.

아마 그것이 제 곁에서만 한정된 모습이리라는 것도.

집에 거짓말까지 하고 자기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뇌 근육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한 마디에 좋아서 뻐근해지던 몸을 떠올리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차은서.”

즐거운 것도 잠시, 정혁이 이내 미간을 좁혔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넌 지금 뭘 겪고 있는 걸까.

정혁은 며칠 사이에 마른 듯한 은서의 볼을 안타까운 손길로 만졌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은서에게 그저 도피처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는다는 걸.

“……널 어떻게 할까, 응?”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것 같은 은서에게 숨이라도 트이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 제가 은서에게 가졌던 마음의 빚이 해소되리라 여겼고, 그 정도의 역할이 은서에게 조금은 득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녀에게 자신이 위험한 독처럼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려웠다.

“싫어, 그만두지 마.”

품에 안으면 항상 조르듯 매달려오는 그녀였다.

붉게 짓무른 눈가와 부푼 입술을 달싹이며 멈추지 말라 재촉하는 몸짓.

제 손을 잡아 끌어가는 어리숙한 투정.

그 자체만 본다면 사랑스럽고, 제법 아래가 동하는 모습이었으나…….

“하아.”

밀려오는 답답함에 정혁은 제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은서는 그저 쾌락을 좇아 즐기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감정과 의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무언갈 잊고 싶은 사람처럼 그녀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마치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사람처럼.

그렇게 이용하도록 고삐를 내준 건 자신이었지만, 은서가 점차 그 쾌락에 의존하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중독된 사람처럼 집착적으로 내달리는 건 상당히 위험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이것으로도 은서가 위로받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부족해지는 날이 온다면……

제가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정혁이 완벽하게 알아낼 수 없었던 그녀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는 모양이고, 은서의 심리 상태는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차은서, 너한테 달려 있어.”

네게 그저 도피처가 되는 것 말고, 다른 길을 열어줄 수 있다.

네가 내게 그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주기만 한다면.

어디에도 드러내지 않는 은밀한 관계가 아니라 그녀의 현실 깊숙이에 발을 들일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 널 데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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