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그래, 그 남자와 아무 사이가 아니라니 더 잘됐네.”
“뭐?”
“널 좋아해.”
지석이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좋아했고.”
바스러질 것 같은 낙엽들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지석의 눈동자는 아련하다 못해 아파 보였다.
“미안해, 지석아. 나는…….”
“은서야.”
한 걸음 다가온 지석이 은서의 말을 잘랐다.
“네가 내 마음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네가 날 친구로만 보고 있는 것도 알아.”
“…….”
“사귀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 알아달라는 것도 아니야.”
“그럼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건데.”
“말했잖아.”
지석이 쓸쓸하게 웃었다.
“네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건 못 보겠다고.”
“…….”
“어차피 해야 하는 결혼이라면 나랑 해. 그냥 옆에만 있어 줘도 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응. 마음까지 바라지 않아.”
“지석아, 왜 이래 정말.”
“너는 결혼하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나 이제 알아. 네게 선택권이 없다는 거.”
“…….”
은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토록 고집을 부리는 지석도 낯설었고, 지석에게 제 상황을 들킨 것만 같아 자존심도 상했다.
“아저씨가 결정하시는 대로 흘러갈 거라는 것도.”
“…….”
“그러니까 난 그 끝에 선택되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지석아, 너까지 이러지 말아. 너 이러면 나 너 친구로도 못 봐.”
“이미 이렇게 일 벌일 때부터 친구로서 있을 수 없다는 것도 각오했어.”
강경한 태도였다. 설득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오랜 친구였던 지석은 민준과는 또 달라서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은서는 찌를 듯한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종종 이렇게 만나서 같이 식사도 하고 그래요.”
“그러시죠.”
은서의 무거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됐다.
“은서야, 우리 자주 보자?”
“…….”
은서는 환히 웃는 성연을 향해 살짝 미소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잘 가.”
어느새 낯설어져 버린 지석이 은서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차마 그 얼굴에 웃으며 인사할 자신은 없었다.
슬쩍 눈을 피한 은서는 형교와 성연에게 허리를 숙였다.
·“……최민준씨와 결혼하길 바라시는 거 아니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은서가 참다못해 물었다.
“싫다고 하길래 네 말을 들은 것뿐이다.”
마치 다정한 아버지인 척, 딸의 의견에 귀 기울여주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게 지석이와 결혼하겠다는 말은 아니잖아요.”
“누가 결혼 하라든? 여러 선택지를 두고 고르라는 뜻이다.”
누가 들으면 딸 사랑이 대단한 사람처럼 보일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은서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가 저를 생각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 이제 절 딸로 생각하지 않나요? 나는 당신에게 그냥 도구인가요?
“왜 이렇게까지 절 결혼 시키려 하세요?”
애써 빙빙 돌린 질문을 던졌다.
“아비가 돼서 딸이 좋은 남자를 만나 정착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걸 바라는 게 당연한 거지.”
은서의 마음에 전혀 와닿지 않는 핑계였다.
“……언젠가 제가 좋은 남자를 선택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네가 남자에 대해 뭘 안다고.”
“아빠…….”
“고루 만나 봐. 그러면 알겠지.”
더이상 토 달지 말라는 듯 그가 목소리를 억눌렀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그가 지난번처럼 크게 화를 내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은서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옷자락이 구겨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중훈 하나로도 벅찬데, 민준에 수일…… 게다가 지석까지.
은서는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서야.”
“…….”
“차은서!”
“!”
눈앞에서 왁 소리치는 민정에 은서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듣고 있어?”
“어, 응. 미안. 뭐라고 했어?”
은서가 입꼬리만 겨우 끌어 올리며 대꾸했다.
“시험공부 어떻게 할 거냐고! 조별 과제 있잖아, 우리.”
기말고사가 코 앞인데 중요한 과제까지 앞둔 상태였다.
“아, 과제. 해야지.”
은서가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야, 은서야.”
민정이 안 되겠다는 듯 은서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엉망이야.”
“아.”
은서가 손등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스트레스가 심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데다 입맛도 없어 거의 굶다시피 하고 있었다.
“마지막 시험이라 신경이 곤두섰나 봐.”
“……너 말이야.”
민정이 뜸을 들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혹시 지석이랑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요즘 지석이가 통 안 보이길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지석과 반대로 은서의 컨디션은 나날이 나빠지는 게 보였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알 길이 없었다.
“시험공부 하느라 바쁜가 봐. 걔도 마지막 기말고사잖아.”
“그러게, 그런가 보다.”
“도서관 들를까? 자료 필요하잖아.”
말을 돌린 은서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핑그르르 어지럼증이 돌았다.
“아.”
비틀거리며 책상을 짚은 은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야, 왜 그래?”
“어지러워.”
“얼굴도 창백하고, 너 안 되겠다. 병원 갈까?”
“아니야, 나 여휴에 다녀올게.”
“괜찮겠어?”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봐. 공강 동안 자면 괜찮을 것 같아.”
“알았어, 같이 가. 데려다줄게.”
“응, 고마워.”
은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가까스로 발을 옮겼다.
.“좀 자 둬.”
학생들이 없어 텅 빈 휴게실 구석에 자리 잡은 은서가 담요를 덮고 누웠다.
“응, 고마워.”
마음에 걸려 하는 민정을 보내고서야 은서는 겨우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뒤척이다가 몸을 웅크리자 온몸이 늪에 빠진 것처럼 늘어지는데 정작 잠이 오질 않았다.
그동안 잘 버텨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한계에 이른 모양이었다.
고통스러운 일들이 해일처럼 연속으로 밀려들어 온몸을 부서지도록 쳐대니 꼿꼿하게 버티기가 힘에 부쳤다.
“누가 그 애미에 그 딸년 아니랄까 봐. 못 된 것만 골고루 빼다 박았구나.”
“네 어미처럼 예술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면서 헤프게 굴 거냐?”
“네가 그 더러운 년처럼 되게 두지 않을 거다.”
“어차피 차 의원님도 이 결혼, 어떻게든 진행하실 생각이신 것 같은데.”
“수영이가 네게 전하지 못한 많은 말이 있어. 궁금하지 않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나를 찾아오렴.”
“어차피 해야 하는 결혼이라면 나랑 해. 그냥 옆에만 있어 줘도 돼.”
“너는 결혼하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나 이제 알아. 네게 선택권이 없다는 거.”
“아저씨가 결정하시는 대로 흘러갈 거라는 것도.”
수많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얽혀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두 손으로 목을 콱 부여잡고 조르는 것 같았다.
두 팔을 감싸 안으며 몸을 더욱 웅크리자 한기가 들었다.
노곤할 정도로 따뜻하던 온기가 그리워졌다.
“…….”
하정혁, 그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에게 안기던 순간이.
제 팔과는 비교도 안 되게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아 당겨 안을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와 입을 맞추고, 몸을 섞는 순간은 머릿속이 질척거릴 정도로 눅진해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처음 먹어 본 달콤함에 취한 아이처럼, 그가 주는 쾌락에 취하는 것 같았다.
맞닿은 살이 짓눌릴 정도로 딱딱한 그의 몸은 오히려 든든해서 포근하기까지 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몹시도 절실했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오한이 들었다.
몸을 일으킨 은서는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주말에 외출하는 건 현주의 전시회에 갈 때 이후로 몇 달 만이었다.
도톰한 외투를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워진 날씨에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모처럼 정신도 맑았고.
데리러 오겠다는 정혁에게 혼자 가겠다며 거절했다.
그에게 가는 이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싶어서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빌라로 들어선 은서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몸이 붕 뜨면서 심장이 콩닥댔다.
조금은 다급하게 집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마중을 나온 그가 보였다.
“먼저 와 있었네요.”
은서의 반가움과는 달리 정혁의 미간에는 주름이 졌다.
“차은서, 꼴이 이게 뭐야.”
다가온 손이 은서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눈을 찡그린 정혁이 은서의 얼굴을 느리게 훑어내렸다.
주말에 만나고 싶다는 은서의 청에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앞서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만에 나타난 은서는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반쪽이 되어 있었다.
“곧 기말고사라서 그래요.”
픽 웃으며 대꾸하는 걸 보는데 어이가 없어 화가 났다.
거짓말을 하는가도 싶었지만 웃는 모습은 그래도 편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좀 쉬든가. 여긴 왜 와.”
정혁의 목소리가 한 톤 누그러졌다.
나한텐 이게 쉬는 거니까.
은서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그를 보자 며칠간 느꼈던 괴로움이 신기루처럼 슥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은서는 제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서는 정혁에게 한 걸음 다가가 은근슬쩍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런데요, 하정혁 씨.”
“…….”
“계속 잔소리할 거예요?”
“뭐?”
정혁의 눈가가 살풋 찌그러졌다.
“지금도 시간은 흘러가는데.”
“…….”
정혁의 말문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