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허.”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보좌관이 룸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중훈을 힐끔 살폈다.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중훈은 무언가 계산하는 사람처럼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이건가.”
중훈이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석의 부친이자 한때 동료였던 형교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정치에 뛰어든 후,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진 사이였다. 평생 다른 길을 각자 걸어갈 줄 알았는데, 그가 먼저 연락해 올 줄은 몰랐다.
“식사나 한번 같이하세.”
대쪽 같은 그의 성격상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만남을 스스로 청해올 리 없었다.
중훈은 은서의 곁에 붙어 씩씩하게 보이려 하던 지석을 떠올렸다.
충분히 그려지는 그림이었다. 지석은 어릴 때부터 유독 은서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으니.
애당초 형교의 성향 때문에 고려조차 안 했던 것인데, 이렇게 되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이 관계를 빌미 삼아 한동안 끈을 쥐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였다.
“다음 주 중에 식사 일정 하나 잡아보게.”
“네, 알겠습니다.”
중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은서는 역시 제게 소중한 딸이었다.
*“조심해서 가세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몽롱한 상태로 은서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눈을 마주친 그는 전혀 아쉽지 않은 사람처럼 쿨하고 덤덤했다.
늘 보던 표정인데도 오늘따라 그의 평온함이 꽤 서운했다.
차에서 내리는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시동을 껐다. 노란빛이 들어왔다가 금방 꺼졌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어둠을 가르고 슥 다가온 그가 입을 맞춘 뒤 떨어져 나갔다.
“…….”
아쉬웠다. 감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의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해요.”
시끄러운 속내를 삼킨 은서는 그에게 다가가 목을 끌어안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음을 흘린 그가 곧 은서의 뒷머리를 잡고 고개를 비틀었다.
깊숙이 들어와 부드럽게 휘감기는 그에 마음이 뭉근해졌다.
자꾸만 갈증이 일어 질척하게 섞이는 타액을 몇 번이고 삼켰다.
에워싼 공기에 열기가 서릴 때쯤에야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호흡을 고르면서도 은서는 밀려드는 아쉬움에 그의 소맷자락을 움켜쥔 채였다.
“그만 들어가.”
명령 같은 그의 말에 은서는 겨우 손가락을 떼어냈다.
진득한 키스를 나눈 직후라고 생각하기엔 그의 목소리는 사뭇 청량하기까지 했다.
“…….”
혼자만 안달이 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정혁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일부러 민준을 떨쳐내지 않았다. 중훈의 눈을 속이고 정혁을 만날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이 사실을 정혁이 알게 된다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그와 시간을 보내려 맞선남을 이용한다는 걸 알게 되면…… 저의 영악하고 계산적인 행태에 실망할까?
“또 쓸데없는 생각 하지.”
은서의 눈가에 입을 맞춘 정혁이 그만하라는 듯 턱짓했다.
“어서 가. 늦었어.”
“……갈게요.”
담백하게 이별을 고하는 그에 은서는 하릴없이 문을 열고 내렸다.
이제 갑갑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래도 정혁을 또 만날 거라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마셔.”
“아, 민정아.”
민정은 입은 티셔츠를 잡아당겨 땀을 닦아내는 지석에게 이온 음료를 건넸다.
“고마워, 잘 마실게.”
과 동기들과 모처럼 농구 한판을 뛰었더니 추운 날씨에도 땀방울이 흘러내릴 정도였다.
“젊다, 이 날씨에 공놀이라니.”
“그러게. 수업 가는 길?”
“응, 지나가는 길에 너 보여서.”
거짓말이었다.
지석과 우연히 마주치려고 일부러 그가 지나다니는 길로만 골라 다녔으니까.
마침 여학생들이 꺅꺅거리기에 봤더니 예상대로 지석이 있었다.
티셔츠가 올라간 탓에 살짝 보이는 그의 복근에 민정의 얼굴이 붉어지려 했다.
“야, 내기한 거 잊지 마라?”
지석이 코트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있는 친구들을 향해 외쳤다.
민정은 제가 건넨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즘 내내 저기압이던 지석의 기분이 유독 좋아 보였다.
틈만 나면 저와 은서가 있는 곳으로 오던 그가 무슨 일이 있는지 요즘은 통 나타나질 않았다.
분명 은서와 둘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석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되레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 뭐 해?”
민정이 기대감을 실어 물었다.
“오늘? 왜?”
“저녁에 술 한잔할까?”
“아.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그리 대답하는 지석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마치 설레하는 것도 같았다.
“……아, 그래?”
민정이 말아 쥔 손을 숨기며 빙긋 웃었다.
*“요즘 식사 자리가 잦네요.”
중훈에게 또 불려 나오게 된 은서가 차 문을 열어주는 보좌관을 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지난번, 이렇게 불려간 자리에서 민준을 만났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아마도 썩 즐거운 자리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뭐하고 서 있어.”
“타세요, 은서 양.”
“…….”
안에서 들리는 불호령에 은서는 한숨을 쉬며 차에 올랐다.
“오랜만에 형교, 그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어쩐 일로 중훈이 먼저 설명하듯 목적지를 꺼냈다.
“아.”
긴장이 탁 풀렸다.
어릴 때는 자주 보던 사이였던데다 지석의 부모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럼 엄……, 아줌마는요?”
경미를 떠올린 은서가 뒤늦게 물었다.
“집에 있겠지.”
“……왜 같이 안 가고요?”
지석의 가족에게까지 꼭 경미의 존재를 숨겨야만 하는 건가 싶었다.
“그 여자가 낄 자리는 아니야.”
“가족……이잖아요.”
“허.”
중훈이 우스운 소리를 한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붙어 있다고 정이라도 든 모양이구나.”
“우리 집에 온 지도 벌써 6년이에요.”
“착각하지 마라, 몇 번을 말해. 떠날 사람이라고.”
입을 다물라는 신호에 은서가 바르르 입술을 떨었다.
견고한 벽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스웠다.
중훈이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는 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은서,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셨어요?”
모임 장소는 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한정식집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은 미닫이문을 열고 나타난 얼굴이 전부 반가웠다는 거였다.
“세상에, 우리 은서. 더 예뻐졌구나.”
지석의 모친, 성연이 은서를 꽉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은서는 두 팔 벌려 자신을 환영해주는 지석의 부모를 보며 모처럼 옛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이제 수영은 없었지만.
“학교에서 바로 왔어?”
“응.”
먼저 와 있던 지석이 환하게 웃으며 은서를 반겼다.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은서는 모처럼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다. 중훈을 옆에 두고 이렇게 즐거운 게 얼마 만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보니까 좋네요, 예전 생각도 나고.”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의원님하고 사돈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새롭네요.”
“…….”
은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돈?
어른들의 표정은 이미 이야기가 오간 사람처럼 스스럼없었다.
민준과 맞선을 본 게 불과 몇 주 전이었다.
황당해진 은서가 지석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소리야?’
넌 알고 있었냐는 듯, 눈짓으로 묻자 지석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
싸한 느낌이 뒷덜미를 스쳤다.
또, 제가 모르는 사이 중훈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저, 잠시…….”
“지석아.”
“네.”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려 하자 중훈이 지석을 호출했다.
“은서랑 둘이 정원 산책이라도 좀 하고 오너라.”
“네. 가자, 은서야.”
“아니, 잠깐만.”
“나가서, 나가서 이야기해.”
은서에게 속삭이듯 권한 지석이 버티는 은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돈? 넌 알고 있었어?”
건물 뒤편으로 나 있는 산책로에 나가자마자 은서가 따지듯 물었지만, 지석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제 발끝만 보고 있었다.
“서지석.”
“……미안.”
“하?”
지석이 뒤늦게 눈을 마주쳤다.
“내가 아버지께 부탁드렸어.”
“뭘?”
“너랑 결혼하고 싶으니 아저씨께 말씀 좀 드려 달라고.”
“……뭐?”
“너 맞선 봤잖아.”
잔뜩 찌푸린 은서를 보며 지석은 쿵덕대는 심장을 불안하게 다스렸다.
“내가 맞선 본 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내가 끼어들지 않으면 네가 원치 않는 남자랑 결혼해야 하니까.”
“내가 원치 않는 남자랑 결혼하게 생긴 게 왜 너와 또 맞선을 봐야 하는 이유가 되는데?”
은서가 장난치냐는 듯 조소했다.
“그리고 나 그 결혼 안 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이럴 이유도 없어.”
“아저씨, 네 결혼 자리 쉽게 포기하시지 않을 거 알아. 너는 아저씨 말을 거절하지 못할 거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렇다 해도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널 좋아해서.”
“…….”
찬 바람이 불며 조경으로 심어진 대나무들이 불길하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고백을 들은 은서가 할 말을 잃고 굳어버렸다.
그런 신호가 있었던가?
아니, 사실 관심조차 없었다.
지석이 저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신경 써 본 적조차 없었다.
“그래서 네가 원치도 않는 남자랑 결혼하는 걸 볼 수 없었어.”
“……지석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은서가 달래듯 목소리를 낮췄다.
“난 결혼 생각 없어.”
“그럼 그 남자는?”
“뭐?”
“하정혁, 그 남자는 뭔데.”
“……그 사람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데?”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말했잖아, 나하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야.”
은서가 눈을 내리깔며 부정했다.
“그냥, 날 도와주는 사람이고.”
거짓말.
“그게 다야.”
지석은 화가 났다.
그 남자의 이름만 나와도 눈동자가 저렇게 흔들리는데.
차은서는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