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40화 (40/82)

40.

“홍수영!”

간발의 차로 수영을 놓친 중훈의 비명이 골목에 울려 퍼졌다.

새하얀 눈을 맞으며 울부짖는 그는 한 마리의 짐승처럼 처절해 보였다.

머리를 움켜쥐고 괴성을 지르는 중훈은 은서가 그동안 알던 아빠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기 어려워 주저앉듯 창틀 아래로 몸을 숨겼다.

괴성이 잦아들었다 싶을 때쯤, 계단을 쿵쿵 거칠게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는데, 곧 와장창하고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수영의 작업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중훈이 물건을 집어 던지고 부수는 것 같았다. 그는 연신 처음 들어보는 거친 욕설을 내지르고 있었다.

‘엄마…….’

보고 들은 모든 상황이 꿈인 것만 같았다. 무서워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중훈의 울음소리와 세상이 무너지는 커다란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열일곱 살의 겨울이었다.

그 이후로 은서가 수영을 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열아홉살 여름, 수영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

은서는 어딘가 처연해 보이기까지 하던 수일의 눈빛을 생각했다.

몇 년 동안을 피하기만 하다가 마주하게 된 그의 눈빛이 마음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누가 봐도 모녀라고 할 만큼 수영을 쏙 빼닮은 저였다. 성인이 된 이후로 더욱 수영을 닮아가고 있었다.

중훈이 저를 볼 때마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 것도 그래서였을 거다. 볼 때마다 수영이 떠오를 테니.

중훈이 그런 것처럼 저 사람도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을 찾느라 그러는 걸까.

혹은, 제 딸이라서?

“하.”

은서가 픽 웃음을 흘렸다.

수일이 어떤 마음으로 저를 보고 있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악몽 같았던 그 날 밤이 지나고, 이튿날 마주했던 현실은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고요한 아침이 찾아오자 밤새도록 쪼그리고 있던 은서는 조용히 1층으로 내려갔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중훈은 거실 소파에 쓰러져 있었고, 집안 곳곳에는 비어 버린 술병이 나뒹굴었다.

중훈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수영의 작업실로 살금살금 기다시피 올라갔다.

“…….”

작업실 안을 보자마자 은서는 경악했다.

은서가 그토록 좋아했던 수영의 그림들이 전부 칼에 찢겨 넝마가 되어 있었다.

눈물이 울컥울컥 샘솟았다.

난장판이 된 공간에 발을 디디고 혹시 망가지지 않은 그림이 있을까 살필 때였다.

“……뭘 하는 거야.”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초췌해진 중훈이 은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아빠.”

“…….”

중훈의 살기 어린 시선이 쓰레기 더미 사이에 앉은 은서에게 꽂혔다.

“나와.”

“…….”

“앞으로 이 방엔 얼씬도 하지 마라.”

“…….”

“나오지 않고 뭐 해.”

중훈은 은서에게 한 번도 명령조로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친구처럼 다정했으니까.

“차은서.”

주춤대며 작업실 밖으로 나오자 중훈이 형형한 눈빛으로 은서를 불러세웠다.

“너는, 내 딸이다.”

“…….”

“내 딸이야.”

스스로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예감했던 것도 같다.

제 핏줄이 어디서 왔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16년간 중훈이 제게 자상한 아빠였다는 것과 어여쁜 엄마는 이런 아빠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갔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네, 아빠.”

하나뿐인 가족인 중훈의 상처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수일은 수영과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불륜남일 뿐 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오히려 저를 더 힘든 상황에 빠지게 하는 암적인 존재였다.

따지고 보면 중훈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집착적으로 굴게 된 건 수일이 이 학교에 교수로 오게 된 탓이 컸으니까.

중훈은 자신을 수일에게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니 은서가 수일과 만나고 싶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

학교를 빠져나온 은서는 빠르게 택시를 잡 탔다.

민준을 방패 삼아 생긴 자유였다.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은서는 이 순간, 가장 간절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지금 출발했어요.”

-……집으로 와.

“네.”

*은서는 정혁이 내어준 보안카드를 이용해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은서는 어색하게 카드키를 만지작거렸다. 비를 쫄딱 맞고 그와 잤던 밤, 그날 이후 그가 건넨 거였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혹시 모르니 가지고 있으라는 그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었다.

엘리베이터는 곧장 그의 집으로 연결됐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은밀한 공간으로 들어서면서 온몸을 에워싸고 있던 찐득찐득한 불쾌감이 조금씩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수일과 중훈, 그리고 세상에 없는 제 엄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를 압박해오는 모든 굴레가 떨어져 나갔다.

이제는 오롯이 차은서로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숨기는 것도 없이, 초조해할 것도 없이 저를 있는 그대로 대하는 남자를 만날 것이다.

“후우.”

어깨를 늘어뜨린 은서는 그가 아직 오지 않아 조용한 집안을 익숙하게 가로질렀다.

그의 물건과 제 것이 섞여 있는 드레스룸을 지나 욕실로 들어섰다.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말리고 나오자, 인기척이 들렸다.

“먼저 도착했군.”

은서를 보고도 놀라지 않은 그는 넥타이를 끌러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녁은.”

“배가 안 고파요.”

“굶어서야 쓰나.”

은서는 대답 없이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건 뭘까.”

그가 은서의 의도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은서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아, 먹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게 있나.”

쪽.

수긍하듯 발을 들어 그에게 입을 맞췄다.

“……좋아, 하는 짓이 귀여우니까 넘어가 주지.”

짓궂게 웃으며 재킷을 벗은 그의 손이 은서의 옷자락 밑을 파고들었다.

*“아버지.”

“응? 왜?”

지석은 막 퇴근하고 돌아온 부친을 붙잡았다.

“저 의논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사뭇 진지한 아들 녀석을 보는 형교의 눈빛이 의아해졌다.

“……뭔데 그렇게 무게를 잡아? 따라 와.”

옷도 벗다 만 형교가 서재로 앞장서자 주먹을 움켜쥔 지석이 그 뒤를 따랐다.

“말해 봐. 뭐 사고 쳤어?”

형교가 의자에 풀썩 앉으며 물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 앞에 뒷짐을 지고 선 지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뭔데 그래? 그냥 빨리 말해, 인석아.”

불안함과 기대감이 어지러이 섞인 형교가 지석을 재촉했다.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하는 녀석이라 딱히 걱정하지 않는 아들이었다. 그런 지석이 저렇게 무거운 표정으로 뜸을 들이자 덜컥 겁이 났다.

“저, 결혼하고 싶어요.”

“……뭐?”

형교의 몸이 저절로 앞으로 기울어졌다.

지금 제가 무슨 소릴 들은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지금, 결혼이라고 했어?”

“네, 결혼이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지석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 스물다섯인 녀석이 결혼이라니.

“만나는 아가씨가 있었나? 혹시…… 애라도 생긴 거냐?”

형교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가다듬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뇨.”

“그런데 무슨 결혼이야.”

“은서요.”

“……은서?”

형교의 눈썹이 올라섰다.

“네, 저 은서와 결혼하고 싶어요.”

“둘이, 그런 사이였나?”

“아뇨. 저 혼자 짝사랑이에요.”

“그런데 무슨 결혼이야.”

형교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샜다.

“저 꼭 은서와 결혼해야 해요. 그래서 아버지 도움이 필요해요.”

진지한 아들 녀석을 보니 가벼이 대할 문제는 아닌 듯싶었다.

“…….”

말이 없어진 형교는 제 동기였던 중훈을 떠올렸다.

한때는 가깝게 지내던 사이긴 했지만, 그가 정치의 길로 들어서면서 전과 같을 수는 없게 됐다.

서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달랐고 바라보는 곳이 달랐다.

그런 중훈과 사돈을 맺는다는 것은…….

아니,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강한 권력을 원하는 중훈이 이 결혼을 원하지 않을 거였다.

이런 사정을 아들에게 구구절절 알리고 싶진 않았다.

“꼭, 은서여야만 하니?”

한 번도 무언가에 크게 욕심부린 적 없는 아들이었다.

“네, 꼭 은서여야만 해요.”

“……은서가 원치 않을 수도 있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은서한테도 차라리 이게 나은 선택지가 될 거예요. 상황이…… 그래요.”

“…….”

자세히 묻진 않았으나 어리다 해도 생각 없이 이럴 아이가 아니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형교의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무엇보다, 제가 원해요. 오래됐어요, 이 마음.”

형교는 지석의 절실한 표정을 눈에 담았다.

“……생각해 보마.”

애매한 답이었지만, 형교는 자신이 결국 지석의 말을 들어주게 될 것을 알았다.

*“……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응?”

기절하다시피 잠을 자는 은서를 보는 정혁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은서가 제게 안기려 들 때는 무언가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기에 거부하지 않고 은서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녀와 잤다.

마음을 먹은 이상, 은서와 몸을 섞는 것에 더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하여간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

다만 한 가지 걱정은 품에 안을수록 욕심이 커진다는 거였다.

오늘도 집에 가야 하는 은서라 무리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되레 매달려오는 은서에 이성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래 여자를 안지 않아서 그런 거였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인정하고 나니 마음은 생각보다 크고 뻔뻔했다.

“…….”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하고 정혁은 이불 위로 드러난 은서의 하얀 어깨에 입을 맞췄다.

“일어나.”

“으응.”

낮게 속삭이자 잠에 취한 은서가 낑낑거렸다.

간지럽히듯 어깨에서부터 입술을 지분거리며 올라간 정혁이 은서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차은서, 집에 가야지.”

마음이야 어떻든, 이제는 보내줘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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