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39화 (39/82)

39.

“…….”

민준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예쁜 인형인 줄로만 알았는데, 만만하게 봤으면 안 되는 거였다.

어쩌니 저쩌니해도 차중훈 의원의 딸이었다. 순규의 경고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

여기서 이 계집애가 결혼 못 하겠다고 파투라도 내면 곤란했다. 귀책사유가 저 때문인 걸 알면 순규가 자금줄을 끊을지도 몰랐다.

딱히 제 여자 문제를 가지고 시비 걸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민준은 일단 굽히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쩌면 차 의원이 다 알고서도 밀어 붙였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도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말이 잘 통하는 분일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민준은 도도한 척 목소리를 깔았다. 은서가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모르는 체하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어르신들 걱정할 테니 서로 말 맞추는 게 좋겠어요.”

머리를 굴린 민준이 새롭게 제안했다.

“어차피 차 의원님도 이 결혼, 어떻게든 진행하실 생각이신 것 같은데.”

예쁜 인형을 제 발밑에 두고 입맛대로 굴려보고 싶었던 소망은 물 건너갔으나, 서로 간섭하지 않고 쿨한 관계로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적어도 은서는 대외적으로 제 아내로 보였을 때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큼 훌륭했다. 제일 중요한 건 그녀가 제게 가져다줄 차중훈이라는 뒷배였고.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장사인 건 민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죠. 그럼 오늘은 함께 저녁을 먹고, 술까지 마신 걸로 하죠.”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은서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요.”

“그럼.”

볼 일 다 봤다는 듯 그녀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제게 아쉬운 것 없는 것처럼 구는 태도에 민준은 빈정이 상했다. 이런 취급 받는 건 현주를 제외한다면 처음이었다.

‘아, 현주.’

톡 쏘아붙이는 그녀의 앙칼진 표정을 떠올리니 아랫배가 훅 당겨왔다.

‘쯧.’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지, 음습해진 눈동자를 보며 은서가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막사는 것 같아도 아무하고 놀진 않아.”

현주의 눈에 벗어난 걸 보면 이유가 있는 듯했다.

그런 남자를 제게 붙이려 한 중훈을 생각하자 또 속이 갑갑해져 왔다.

‘조금만 버티면 돼.’

자신을 격려하며 은서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막 학교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차은서양!”

“…….”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은서의 발목을 잡았다.

‘하필.’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누구인지 짐작한 은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무시하고 가버리자니, 몇몇 사람들의 눈이 이쪽으로 향해 있는 게 보였다. 그를 알아본 학생들인 것 같았다.

은서는 하릴없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은서 양.”

“……안녕하세요, 교수님.”

은서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하필 그의 곁에는 학과의 다른 교수도 함께였다.

“은서 양,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까?”

수일이 반가움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캠퍼스 내에서도 좀처럼 마주치지 않던 은서를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시간 많이 뺏지 않을 거니, 잠깐 교수실로 같이 갑시다.”

“……네.”

다른 교수 앞에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는지 은서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차라도 한 잔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마셔서요.”

작은 테이블 앞에 앉은 은서가 눈동자만 굴려 교수실을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온 그의 교수실은, 포근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언젠가 전시회에서 봤던 그의 그림이 생각났다. 따뜻하고, 다정해서 기분이 묘했던 것 같다.

“아, 그럼…….”

커피포트를 드는 수일의 손가락이 떨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수영의 젊은 시절과 똑 닮아 있었다.

그 남자가 왜 그토록 은서를 엄격하게 관리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은서의 집이 엄하다는 건 수일의 귀에까지 들어올 만큼 단대 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워낙 학생들의 이목이 쏠려 있는 은서라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그, 내가 말을 편히 해도……”

“편히 하세요.”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 은서가 차갑게 답했다.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는 교수가 학생을 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 그래. 고맙다.”

수일이 초조한 듯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너와 한 번은 꼭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었거든.”

“……무얼 확인하고 싶으셨나요.”

내가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아니면, 얼마나 망가졌는지?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감정들에 기름과 불씨를 동시에 던져넣은 듯했다. 은서는 떠오르는 수많은 말을 삼켰다.

“아.”

수일이 가느다랗게 탄식했다. 꺼져가는 은서의 목소리 뒤로 감출 수 없는 원망과 분노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은서에겐 당연한 거였다. 어렸던 그녀에게 자신은, 엄마를 뺏어가고 가족을 망가뜨린 못된 불륜 상대일 뿐일 테니까.

“네 엄마의 부탁이라서.”

“…….”

“자신이 떠나고 난 뒤에 혼자 남을 너를 걱정 많이 했거든.”

“…….”

“너를 꼭 살펴봐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어.”

움찔한 눈동자를 들키고 싶지 않아 은서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하나만 물으마.”

“…….”

“……집에선, 아무 일도 없니? 괜찮니? 혹,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거나…….”

이상한 질문이었다. 마치, 제게 무슨 일이 있기를 바라는 건가 싶을 만큼.

“그런 건 왜 물으시죠?”

“……수영이가 네게 전하지 못한 많은 말이 있어.”

“…….”

“궁금하지 않니?”

……궁금한 것.

항상 궁금했던 것.

당신이 내 아버지인가요?

“…….”

유전자 검사를 해볼까 했었지만, 중훈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차마 제 어미의 부정을 제 손으로 들춰내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 시도하지 못했지만, 의구심을 떨칠 수는 없었다.

중훈은 해봤을까? 만약 그가 해 봤더라면 그가 자신을 하나뿐인 딸이라고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없어요,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그렇구나.”

수일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흐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꽁꽁 닫힌 은서와 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는 건 힘들어 보였다.

“은서야. 항상 잊지 말렴.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은서가 비웃음을 삼켰다.

그가 왜 제 행복을 운운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종종 들려서 이야기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구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나를 찾아오렴. 꼭이다.”

“…….”

“약속해 주겠니?”

“……네.”

분노를 드러내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져 은서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교수실을 나왔다.

“하……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캠퍼스를 걸으며 은서는 연신 조소했다.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추운 겨울이었고, 함박눈이 쏟아져 기분이 꽤 좋았던 날이었다.

마침 막히던 그림도 흡족하게 완성한 터라 집에 가서 수영과 중훈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날따라 학원에서 늦게까지 있었던 탓에, 집에 갈 때는 이미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그래도 가로등 빛이 소복이 쌓인 눈을 환하게 비추고 있어 무섭진 않았다.

오히려 밤하늘과 내리는 눈, 주홍색 가로등 불빛이 어우러지는 게 기가 막히게 예쁘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을 신나게 밟으며 집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엄마! 아ㅃ…….”

“개소리 집어치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집 안에서 들려오는 거친 욕설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

집에서 이토록 큰 목소리가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부부싸움 한번 한 적 없을 정도로 다정한 부모였고, 은서 또한 부모님이 제게 큰소리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누가 온 걸까.’

긴장한 채로 조심조심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다가갔다.

“뭘 해달라고? 이혼?”

“그래요, 이혼.”

‘이혼?’

들려서는 안 될 단어가 들렸다. 낯설기는 했지만 분명 수영과 중훈의 목소리였다.

은서는 소리가 나오는 곳을 향해 홀린 듯 다가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서재 안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 중훈과 수영이 보였다.

잔뜩 화가 난 중훈은 난생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이었다. 수영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

“감히 내 앞에서 그딴 단어를 꺼내? 어디 다시 한번 지껄여 봐.”

“이혼해달라고 했어요.”

“하.”

“할 만큼 했고, 견딜 만큼 견뎠어요.”

“뭐? 견뎌?”

“그럼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어요?”

“설마 당신…….”

“맞아요, 그 사람이 돌아왔어요.”

“…….”

중훈의 얼굴에 노여움이 떠올랐다.

“그 사람하고 몰래 만나고 싶지 않아요. 나 그 사람하고 당당하게 만나고 싶어.”

“뭐야?”

“그 사람 사랑해. 그러니까 이혼해 줘요.”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그래! 나 미쳤어! 미쳤으니까 그냥 보내 달라고!”

갑자기 수영이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화들짝 놀란 은서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늘 예쁘고 단정하던 엄마의 모습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냥 지금처럼 살아. 한 번은 용서해 주지.”

“당신 눈엔 안 보여? 내가 죽어가고 있는 거.”

“그럼 죽어, 차라리 죽으라고!”

“안 그래도 죽을 거야!”

“뭐? 지금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지긋지긋해! 당신이 끔찍하다고!”

“뭐야?”

“은서 데리고 이 집에서 나갈 거야.”

“웃기지 마. 은서는 물론이고 너도 못 나가니까.”

“하…….”

수영의 어깨가 툭 내려앉았다.

“정말, 은서가 당신 딸이라고 생각해?”

“…….”

독기가 어린, 저주를 내뱉는 듯한 말투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은서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방으로 도망쳤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심장이 쿵쾅대다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꾸역꾸역 두 손으로 입술을 짓누르며 틀어막았다.

커다란 고함이 계단을 타고 올라왔지만, 귀가 먼 듯 내용이 들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쾅, 하고 현관문이 부서질 듯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은서는 본능적으로 창문을 향해 뛰어갔다.

신발도 신지 않은 수영이 맨발로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게 보였다.

“……엄…….”

그녀를 불러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어버린 입술은 소리를 내지 못했다.

대문을 벗어나던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렸다.

수영의 다급한 눈이 은서를 발견했다.

“…….”

눈물로 얼룩진 아픈 표정이었다.

짧은 시선을 준 뒤 수영은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갔다.

집에 올 때는 보지 못했던, 낯선 자동차 한 대가 그 앞에 대기하듯 문을 열었다.

모르는 남자의 손을 잡고, 수영은 그렇게 집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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