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38화 (38/82)

38.

차를 막 출발시키려던 정혁이 기어를 파킹에 놓고 시선을 돌렸다.

새까만 어둠 속, 차창 너머 드러난 인영은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

굳어진 얼굴로 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이를 보며 정혁이 조소했다.

*비가 많이 오는데도 그날이 되자 은서는 어김없이 학교 정문을 나섰다.

우산을 들고도 마음이 급한 사람처럼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지석은 입안이 썼다.

벌써 몇 달째, 똑같이 되풀이되는 행동이었다.

처음에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남자를 만나던 은서는 제가 말을 꺼냈기 때문인지, 최근엔 학교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더니.

제게 숨기면서까지 남자를 만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집에 와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빗속을 뚫고 은서의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통금 시간 전에는 올 테니, 무작정 기다려 볼 참이었다.

그녀의 집으로 올라오는 골목길을 오르내리기를 여러 번.

마침내 통금 시간이 임박했을 때, 멀리서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세단 한 대가 보였다.

익숙한 차였다.

“…….”

지석은 날이 어두워 다행이라 생각하며 몸을 숨겼다.

차 문이 열리는 순간, 잠깐 불이 들어오며 안에 있는 사람을 비췄다.

곧 어둠 속으로 은서가 발을 내디뎠고, 그렇게 둘은 헤어지는 것 같았다.

“차은서.”

그가 은서를 부르기 전까지는, 별다를 바 없는 헤어짐이었다.

빗소리에 묻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은서를 부른 건 확실했다. 은서가 다시 몸을 돌려 그에게로 향했으니까.

그리고 곧 두 사람이 입술을 겹쳤다.

은서가 들고 있던 우산이 기우뚱 기울면서 곧 두 사람을 가렸다.

“…….”

지독하게 외설적인 장면에 지석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은서가 그에게 잡아먹히는 것만 같았다.

길지 않은 입맞춤을 끝내고, 돌아오는 은서가 보였다.

지석은 은서의 얼굴을 보며, 지금 그가 보는 것이 은서의 뒷모습뿐이라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은서는,

참 예뻤고,

그래서 미웠다.

은서가 사라지자마자 본능적으로 걸음이 그의 차로 향했다.

그에게 아는 체를 한 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지이잉.

차창이 내려가고 어둠 속에 반쯤 파묻힌 그의 얼굴이 보였다.

드러난 날카로운 턱선이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리 뵌 적 있죠. 기억하십니까?”

“……무슨 일이죠?”

“잠깐, 저 좀 보시죠.”

“……그래요.”

대답을 마친 그가 차를 뒤로 움직여 외진 골목 구석에 댔다.

적어도 은서의 집 앞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집 근처에서 그런 행동을…….

지석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차 문을 닫은 그가 커다란 우산을 쓰고 섰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요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단 사람이 많네.”

“뭐라고요?”

“아닙니다. 얘기해요, 계속.”

별거 아니라는 듯 정혁이 비싯 웃음을 흘렸다.

“은서와 무슨 사이시죠?”

“…….”

좀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남자였다. 한 번씩 재미있다는 듯 픽 웃음을 흘리는 것 외에는.

“그쪽이 보기엔, 나와 차은서가 무슨 사이 같습니까?”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그의 태도에 울컥 화가 났다.

“지금 내가 장난치는 걸로 보이나.”

남자의 눈이 서늘해졌다.

“안 그래도 나도 궁금하던 차거든. 나와 차은서가 무슨 사이인지.”

“…….”

그녀와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차은서에게 제 존재가 눈앞의 이 어린 녀석과 뭐가 다를까 싶자 심히 불쾌했다.

정혁이 재킷 안으로 손을 뻗어 담배를 끄집어냈다.

“필요해요?”

선뜻 권하자 지석이 갈등하는 듯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그럼 실례.”

은서와 어울리게 된 이후로 손도 대지 않던 거였다.

정혁이 깊이 빨아들여 빗줄기 속으로 연기를 뿜어냈다.

“이봐요, 친구.”

“…….”

“잘못 짚었어.”

“무슨 소리죠?”

“나한테 날 세워봐야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

순진한 눈동자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쪽도 나와 별다를 거 없어 보이니, 조언 하나 하죠.”

정혁이 픽 웃으며 담배를 자동차 위의 고인 물에 지졌다.

망설임 없이 고급 자동차를 재떨이 취급하는 행동에 지석이 기가 질린 듯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처럼 엉뚱한 데 각 세우고 있다간 후회하게 될 겁니다.”

못 알아들을 말만 하는 남자는 꼭 뭔가 큰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말 빙빙 돌리지 말고, 물은 거에 대답이나 해주시죠. 은서랑 당신. 뭡니까?”

“……차은서에게 직접 물어봐요.”

“…….”

“말했잖아, 나도 궁금하다니까?”

“…….”

“서로 힘내 봅시다, 그럼.”

정혁이 미련 없이 우산을 접고 차에 올랐다.

무거운 엔진음과 함께 사라지는 차를 보다가 지석은 참았던 욕설을 뇌까렸다.

*“날이 조금씩 추워지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가을도 끝나는 것 같네.”

“금방 또 겨울이겠다.”

학식에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던 은서가 문득 창문 밖을 바라봤다.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말은 또 금방 기말고사라는 뜻이고.”

“으아, 기말고사.”

“우리 대학 시절의 마지막 시험이다.”

“……그러네.”

민정과 지석의 대화를 듣다가 은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만큼은 어떻게든 졸업하고 싶어 치열하게 버틴 시간이었다.

학위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그림을 놓고 싶지 않아서.

중훈에게서 이 시간을 지켜내고 싶어서였다.

그런 노력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감성에 젖으려는데, 테이블 위에 두었던 휴대폰이 울려댔다.

은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석이 본능적으로 화면을 살폈다.

[최민준]

모르는 이름에 지석이 은서의 표정을 살폈다.

“나 잠깐 전화 좀.”

발신인을 확인한 은서가 피곤한 듯 지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누구야?”

잠시 뒤 돌아온 은서에게 흘리듯 물었다.

“맞선남.”

그러자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뭐?”

놀란 건 지석뿐만이 아니었다.

무심코 튀어나온 비명에 민정이 뒤늦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은서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졸업하자마자 결혼 하라셔.”

“…….”

하마터면 젓가락을 놓칠뻔한 지석이 가까스로 쥐고 있던 걸 내려놓았다.

“나한테 날 세워봐야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야 하정혁, 그 남자가 한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진한 키스를 나누면서도, 결국 그 남자도 은서에게 있어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던 거다.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어떤 남자인데?”

“글쎄, 아버지가 고른 사람이라서.”

“할 거야, 결혼?”

“아니, 일단 설득하는 중.”

“그래, 싫다고 잘 말씀드려. 딸 바보인 아저씨가 널 그렇게 빨리 보내려 하시겠어?”

오래전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지석의 말에 은서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싫다는 데도 조급하게 구시네.”

지석의 마음속에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좋은 방법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잘 지냈어요?”

“네.”

학교 근처까지 찾아온 민준과 카페에서 만났다.

바쁘다는 핑계를 댔음에도 그는 지나는 길이라며 굳이 얼굴을 비추길 선택했다.

“생각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 말하며 웃는 민준은 다정하고 성실한 남자의 표상이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현주에게 들은 바도 있고, 그의 친절한 가면에 속을 일은 없었다.

민준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그에게도 저와의 결혼이 꽤 중요한 거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중훈에게 책잡히지 않고, 그 스스로 이 결혼에서 메리트가 없다는 걸 깨닫고 물러나게 하려면.

은서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방안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핏줄.

금기시하다시피 했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녀가 차중훈의 딸이 아니면 되는 거였다.

그러면 민준이 그녀와의 결혼에서 얻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가장 중요한 순간에.’

생각을 정리한 은서는 차분하게 민준을 응시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와 적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필요했다.

"못되게, 이기적으로 살라는 말이야."

은서는 정혁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혁을 더 편히 만나려면 지금은 이 남자가 있어야만 했다.

“바쁘실 텐데, 이런 식으로 시간 쓰실 필요는 없어요.”

“…….”

무슨 뜻이냐는 듯 민준이 눈꼬리를 접으며 물어왔다.

“어차피 집안에서 정해준 결혼이니,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다는 뜻이에요.”

“그게 무슨…….”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정해진 미래니까요.”

“아, 그렇긴 해도 난 은서 양과 잘 지내보고 싶어요. 제가 원래 미인에 약하거든요.”

“그러시군요.”

은서가 고요히 웃으며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 내려놓았다.

“그 말, 지은 씨에게도 하셨던 건가요?”

“!”

“아, 지은 씨 하나가 아니겠네요. 수진 씨랑, 또 누구였더라.”

은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들에 민준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굳었다.

제가 지금 만나는 여자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맹탕인 줄 알았더니,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고 말았다.

“아, 걱정 마세요. 아버지께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거든요.”

은서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민준을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어차피 해야 하는 결혼, 가급적 좋게 좋게 가는 게 나으니까요.”

귀책 사유가 잡힌 그는, 언제고 상황을 역전시킬 기회만을 노리게 될 것이다.

그때, 물어뜯을 거리를 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연극 놀이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

“민준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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