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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안고, 울리고-37화 (37/82)

37.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기도 했던, 가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떠올렸던 존재.

그립기도 하고, 생각하면 미소 짓게 하던, 그런 기억의 주인공.

“…….”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됐을 때엔……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아이. 신경 쓰이게 하고, 품을 내어주고 싶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처음으로,

안을 생각이 든…… 여자.

의외로 결론은 쉬웠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은서는 이제 제게 다른 의미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실책이라면, 본능적인 끌림을 한낮 추억 탓으로 돌린 자신에게 있었다.

고마움에 빚을 갚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선을 스스로 그어놓은 제게.

너무 어렸던 그녀라, 그 기억에 스스로 묶어 놓고 선을 그어 놓았다.

위한다는 명목하에 그녀가 원하는 거라고 주문을 걸어놓고, 실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변하지 않을 것은, 은서가 원하는 것이 우선시 될 거라는 거였다.

“조금 늦었어요, 미안해요.”

조수석 문을 열고 나타난 은서에 정혁이 생각을 멈췄다.

“비가 많이 오네요.”

우산을 접고 차에 오르는 은서의 어깨가 조금 젖어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탓인지 그녀는 유달리 청초해 보였다.

저 투명한 얼굴이 본능에 부서질 때 어떻게 변하는지를 안다.

커다란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얼마나 달콤한지도.

"어떤 쌩양아치와 결혼해도 상관없다 이거지?"

순간 현주의 헛소리가 떠오른 정혁이 인상을 썼다.

그럴 리가 있나.

그저 차은서의 의사가 그에게 제일 중요할 뿐이었다. 상대가 어떤 놈이든 은서가 원한다면 제가 막을 권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깊숙이 알게 된 그녀의 모습을 다른 놈이 본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은서는 다리 옆에 우산을 내려놓고 안전띠를 매며 슬쩍 정혁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사무실에 다녀온 직후, 처음 만나는 거였다.

약속을 취소할 줄 알았는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을 만나러 왔다.

원래도 사람을 긴장시키는 남자긴 했지만, 오늘은 그 느낌이 좀 달랐다. 자꾸만 그를 향한 이유 모를 서운함이 샘솟는 탓이었다.

그와 몸을 섞었는데도, 오히려 전보다 더 어색해진 기분도 들었다.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은서의 생각이 점점 복잡해졌다.

·“차은서.”

“네?”

“맞선은 왜 봤어?”

인덕션 앞, 정혁의 지시대로 그의 옆에 붙어 있던 은서가 뜻밖의 질문에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묻지 마?”

“……아뇨.”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맞선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이 좋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그가 화를 냈으면 싶기도 했고, 모르는 체 해줬으면 싶기도 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의 정체를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버지 뜻이었어요.”

정혁의 표정을 살피며 은서는 변명하듯 맞선이 제 의사와는 상관없었다는 걸 어필했다.

“계속 볼 건가?”

“아마, 아닐 거에요. 적어도 지금은.”

은서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아버지는 그 사람만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거든요.”

“강남의 희망교회 알아? 거기 목사 아들. 아주 인생 막장은 아니긴 한데, 여자관계가 지저분해. 질 떨어지는 양아치, 딱 그 정도야.”

이미 맞선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정혁은 복잡해졌다.

‘그쪽 라인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군.’

중훈의 의도가 정혁의 눈에는 훤히 읽혔다.

중훈에 대해 가진 정보들도 다시 한번 확인한 후였다.

짐작보다 야망이 더 강한 모양이었다.

은서의 모친과 그 주변에 얽힌 사연도 대략은 알아냈다.

덕분에 은서가 어떤 힘든 시간을 겪었을지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훈이 은서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딸을 제 야망의 도구로 사용하는 걸 보면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문제는 은서가 제 아버지를 버릴 마음이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차은서니, 그럴 만도 하지.’

일면식도 없던 제게 따뜻한 호의를 내 줄 정도로 다정한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중훈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중훈에게 다른 패를 쥐여주면 어떨까.

최순규의 인맥과 그 뒤에 있을 배경과 비등할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매혹적인 패.

“어쨌든 그 남자랑 결혼하진 않을 거예요. 그쪽에서도 이 결혼 원하지 않도록, 정리할 거거든요.”

계속된 정혁의 침묵에 은서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그가 이 만남을 그만두자고 하면 어쩌나 겁이 났다.

아직 제게는 정혁이 필요했다.

불안하게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눈을 마주쳐왔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관찰하듯 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한참을 보던 정혁이 짧게 수긍했다.

“하지 마, 그 결혼.”

“…….”

“나랑 더 놀아야지.”

*여느 때처럼 밥을 먹고, 시답잖은 말씨름을 하고, 내리는 비를 구경했다.

통금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정혁은 은서의 동네로 차를 몰았다.

내리는 빗방울은 몇 시간 전보다 더 거세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암흑이 내려앉은 것 같은 어둠에 거리의 차들이 모두 비상등을 켜고 거북이처럼 움직였다.

차를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정혁은 고요히 상념에 젖어 들었다.

“……도착했네요.”

아쉬운 듯 읊조리는 목소리에 정혁은 문득 갈증을 느꼈다.

“걸어갈 수 있겠어?”

“괜찮아요, 먼 거리는 아니니까. 어차피 들어가서 씻어야 할 테고.”

어두우니 집 앞에 내려주고 싶었지만, 은서의 불안을 이해하는 정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선택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차은서.”

“……네?”

안전벨트를 풀다 만 은서가 고개를 돌렸다.

날씨 탓인지 오늘따라 정혁은 유독 어둡고 차분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

살짝 긴장한 은서가 눈을 깜빡였다.

“결혼, 하고 싶어?”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질문이었다.

중훈에게 가장 매혹적일 패.

그건 바로 정혁 자신이었다.

대한민국 재계 1순위, 도림 그룹의 총수가 바로 정혁의 외삼촌인 윤수였다.

윤수가 제게 원하는 건, 제 뒤를 이을 후계자가 되는 거였다. 그 길이 싫어 윤수의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지금껏 혼자 힘으로 해내온 거였다.

하지만, 차은서 때문이라면…….

그가 생각했던 미래를 크게 벗어나는 선택이 될 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곁에 두고 보듬어 주고, 예뻐해 줄 수 있다면. 제 곁에서 예전처럼 화사하게 웃게 만들 수 있다면.

그렇다면 꽤 나쁜 선택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혁 자신도 놀랄 만큼 꽤 충동적이고 위험한 결정이었다.

“그건……왜요?”

“나랑 할까.”

“…….”

“그 결혼.”

정혁은 은서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손에서 안전벨트를 놓친 은서가 멍하니 정혁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폭탄을 던져 놓은 그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은서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가, 내려앉은 속눈썹에 가려졌다.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지길 반복했다.

“…….”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그녀는 꽤 당황한 것 같았다.

정혁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긴장감이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은서의 입술이 열렸다.

“진심이에요?”

“왜, 장난 같아?”

“…….”

정곡을 찌른 건지 잠시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

“전, 결혼 같은 거 안 할 거니까.”

단호한 목소리였다.

정혁은 지금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이 실망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불쌍해요?”

“…….”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은서의 질문에 정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연민, 그런 감정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정혁에겐 사랑의 일부분이었다.

“차은서.”

정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르며 그녀를 응시했다.

“이거 하나만 알아 둬.”

“…….”

“내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건 처음이야. 누군가에게 제안한 것도.”

“……영광으로 생각할게요.”

“하.”

커다란 결심을 농담으로 치부하는 은서에 정혁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정혁 씨. 우리, 계속 볼 수 있는 거죠?”

은서가 불안한 듯 물어왔다.

“……지금처럼?”

“……네, 지금처럼요.”

딱, 이 정도의 관계.

언제든 끝을 낼 수 있지만, 그래서 더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안전한 관계.

그게 차은서가 바라는 거였다.

그래,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실망감을 억누른 채 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볼게요.”

입술을 달싹이던 은서가 차에서 내렸다.

“차은서.”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그녀의 뒷모습에 정혁이 차창을 내렸다.

뒤를 돌아보는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정혁이 운전석까지 다가온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가까이 끌어당겼다.

“키스해.”

“……네?”

명령처럼 떨어진 낮은 말에 은서가 당황한 듯 몸을 흠칫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정혁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나도 네게 얻는 게 있어야지 않아?”

“…….”

빗줄기는 거세고 주변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골목 어귀.

잠시 고민하던 은서가 몸을 숙였다.

차창 밖으로 삐딱하게 나와 있는 그의 얼굴로 다가가 가만히 입을 맞췄다.

“!”

입술을 떼려는 순간, 정혁이 그대로 은서의 가녀린 목덜미를 움켜쥔 채 입술 사이를 벌리고 들어왔다.

질척하게 비벼지는 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뇌리에 박혔다.

“하아.”

가쁜 호흡이 헤집고 빠져나가는 그의 혀를 따라 흘러나왔다.

짧지만 거친 키스였다.

“또 봐.”

손가락으로 은서의 입술을 문지른 정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작별을 고하며 차창을 올렸다.

“…….”

갑자기 생겨난 벽에 멍하니 서 있던 은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유난스러운 빗소리가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그에게 들켰을지도 모르니까.

사라지는 은서를 보며 정혁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 게임의 끝이 어디일까 궁금해지네.”

그리고 그때.

똑똑.

누군가 운전석 창문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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