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36화 (36/82)

36.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은서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마치 에스코트하듯 그가 몸을 옆으로 틀어 길을 터주었다.

머뭇거리다 일단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의 회사, 그것도 그의 사무실이었다.

제게 허락되지 않은 하정혁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았다.

절대 양지로 드러날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관계인데, 갑자기 그의 현실로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앉아.”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은서는 소파로 향하며 사무실 내부를 살폈다.

강남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전면 창 앞에 커다란 책상이 하나 있었고 그 주위로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 있었다.

그 흔한 화분조차 없었다.

특별한 장식도 없이 최소한의 필요한 물품만 있는 것이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실 건?”

“괜찮아요, 금방 가야 해요.”

넓다 못해 거대하게 느껴지는 가죽 소파에 엉덩이 끝만 걸친 은서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시간에 밖에를 다 나오고.”

그러자 맞은 편에 앉은 그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그럴 기회가 생겨서요.”

자조하듯 미소 짓는 걸 보며 정혁은 싸한 예감이 들었다.

“……맞선 보고 오는 길이에요.”

“…….”

맞선?

정혁은 은서가 툭 내뱉은 말에 바로 반응할 수 없었다.

“아, 그런 자리에 다녀온 사람의 옷차림이 아니긴 하네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면서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그에게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꼭 보고해야 하는 것도 아니긴 했다.

그런데도 굳이 말을 꺼낸 것은, 모르겠다.

그의 반응이 궁금했던 것도 같다. 왜 그게 궁금한 건지 모를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주의 입을 통해 그에게 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차라리 직접 말하고 싶었다.

“?”

하지만 정혁은 별다른 표정 없이 가만히 저를 보고만 있었다.

괜한 얘기를 꺼낸 건가. 바쁜 사람 붙잡고 무슨 헛소리인가 싶은 건가.

은서의 생각이 복잡해지려는데 그가 픽 웃었다.

“그래서, 마음에는 들었나?”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그의 표정이 곧 재미있다는 듯 변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썩 아니었나 본데.”

“…….”

“그래서 위로받으려고 온 건가.”

비꼬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친구의 일상을 들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

덤덤하니 더 아리송했다.

“아니, 그냥…….”

“맞선 후에 다른 남자를 찾아오다니, 그것도 몸까지 섞은 남자를.”

“…….”

“차은서 다시 봤어.”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명백한 비난이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무릎을 짚고 일어선 그가 천천히 돌아 은서의 소파 뒤로 넘어갔다.

은서의 바로 옆, 소파 등받이에 팔을 얹고 몸을 숙인 그가 은서의 턱을 잡아 제게로 돌렸다.

“잘 왔다고 칭찬한 거니까. 이용하라고 했잖아.”

내리뜬 눈으로 저를 보는 그의 얼굴은 묘하게 차가웠지만, 눈동자엔 뜻 모를 열기가 실려 있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굴라고.”

“……네?”

“못되게, 이기적으로 살라는 말이야.”

“…….”

이상한 격려에 심장이 불안한 듯 빠르게 뛰어댔다.

“눈은, 계속 뜨고 있을 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정혁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낮게 읊조린 그가 곧장 입술을 붙여 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경직된 혀를 그가 잡아채 농락하듯 문질렀다.

“으읏.”

거친 움직임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심장 소리가 얽힌 혀를 타고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뜨겁고 아찔한 키스인데도, 어쩐지 그를 안을 수가 없었다.

소파 위에 놓여 있던 손가락이 안으로 곱아들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탐하는 그에 입꼬리를 타고 타액이 흘러내렸다.

그제야 입술을 조금 떼어낸 그가 호흡을 골랐다.

“…….”

붉게 물든 눈가, 상기된 볼, 뜨거운 숨결을 흘리는 벌어진 입술.

그새 눅진하게 풀어진 표정을 감상하던 정혁은 그녀의 것과 섞인 제 흔적을 손으로 닦아냈다.

“위로가 좀 됐나.”

“…….”

“아니면, 부족한가.”

·“…….”

정혁의 사무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은서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꽉 얹힌 것처럼 속이 갑갑했다.

맞선을 보고 왔다는 데도, 오히려 칭찬하며 키스하는 그에게 괜히 섭섭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다.

‘화내길 바랐던 건가.’

내가 그래도 되는 건가.

그럴 자격은 있나.

아니다.

그럴 사이가 아니기에, 그도 아무렇지 않아 했던 걸 거다.

몸은 섞더라도 서로에게 책임질 것이 없는 사이.

그게 딱 우리의 관계였다.

왜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그에게 달려갔을까.

은서는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의구심을 꾸역꾸역 내리눌렀다.

그리고 자꾸만 커져가는 실망감도 외면해야 했다.

*“자, 어떻게 된 거야?”

어지간히 급했는지 학교로 찾아온 현주는 카페에 앉자마자 은서를 다그쳤다.

“뭐 마실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태연하게 지갑을 들고 있는 은서를 기가 막힌다는 듯 보던 현주가 빽 소리를 질렀다.

로봇도 아니고, 대체 무슨 애가 저렇게 뻣뻣한가 싶었다.

당장 인생 꼬이게 생긴 건 저인데, 무덤덤한 은서를 보고 있자니 오히려 자신이 더 안달복달하는 기분이었다.

현주 앞에 잔을 내려놓은 은서가 단정한 자세로 앉았다.

“당연히 결혼 안 할 거야. 어떻게든 거절할 생각이고.”

걱정 말라는 듯 태연하게 꺼낸 첫마디였다.

“하…….”

빨대도 부족해 컵 채로 아이스 커피를 들이켠 현주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도 알지? 난 남 일에 관심 없어.”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현주가 그제야 평소의 도도한 태도로 되돌아갔다.

은서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팔짱을 낀 현주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런 내가 이 정도로 난리 칠 정도면, 어떤 놈인지 대충 짐작 가지?”

“목사 아들이라던데, 성실하고 근면한.”

“누가 그래? 미쳤나 봐.”

그 미친 소리를 한 사람이 중훈이라는걸 떠올리자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현주도 아는 걸 중훈이 몰랐을 리 없었다.

어쩌면 그는 딸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수영을 대신해 그의 화풀이를 받아줄 상대인 걸까.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

은서의 침묵을 불신으로 오해한 현주가 혀를 끌끌 찼다.

“순진한 소리 하기는. 내가 놀면서 보는 쓰레기 중에 잘난 부모 아닌 놈이 있는 줄 아니?”

“…….”

“누구는 유명한 역사학 교수 아들, 누구는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난 부장검사 딸, 존경받는 1위 CEO 손자. 하, 다 말하려면 내 입만 아파.”

그럼 나는 저 중 어디에 속할까.

은서가 고민하는 사이 현주가 손가락을 딱딱 부딪치며 은서의 시선을 끌었다.

“차은서. 난 너 싫지 않아.”

“그래? 난 너 좋은데.”

“방금 웃는 거 꼭 누구랑 비슷한데…….”

은서가 픽 웃으며 대꾸하자 현주가 의외라는 듯 일자로 그린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여튼, 의외다? 네 단짝 친구는 나 엄청 싫어하잖아.”

“그냥 괜히 그러는 거야. 그리고 민정이랑 내 감정은 상관없지.”

“흐응.”

턱을 괸 현주가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은서를 보다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난. 네가 차민준 같은 쓰레기랑 어울리는 꼴은 보기 싫어.”

“그래, 고마워. 명심할게.”

“어울리는 사람하고 놀아. 하정혁이란 좋은 선택지 두고 왜 뻘짓이니?”

“…….”

덤덤해도 꼬박꼬박 대답하던 은서가 입을 다물자 현주가 은서 쪽으로 몸을 숙였다.

“차라리 하정혁, 그 인간을 꼬셔. 물론, 지금껏 성공한 여자는 보지 못했지만…….”

그 사람하고 이미 자기까지 했다고 하면, 현주가 뭐라고 할까 싶었다.

“……이상하게 너한테는 또 호의적인 것도 같고…….”

현주가 웅얼거리는 말에 은서는 궁금해졌다.

그는 왜, 저와 어울려주고 있는 건지.

“그 사람이, 날 좋아할까?”

좋아했다면, 맞선을 보고 왔다는 말에 그렇게 평정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티가 나지 않았을까.

그 사람에게 나는, 뒤늦은 사춘기에 방황하는 어린 애일 뿐일 텐데.

그가 제게 주는 건 그저 어린 애 치기에 조금 어울려 주려는 어른의 배려일지도.

“…….”

은서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착잡함을 보며 현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정혁입니다.”

-정혁 오빠? 나야, 현주.

낯선 번호에 잠시 생각하던 정혁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우리 집 인간한테 연락처 좀 달라고 했어, 내가.

도훈이면 모를까, 현주가 제가 연락을 해 올 일이 뭐가 있나 싶었다.

“무슨 일이야.”

-내가 오빠한테 연락할 일이 하나밖에 더 있겠어?

“…….”

-은서 때문이지.

“…….”

-여보세요? 뭐야, 끊었어?

“듣고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둘이 무슨 사이야? 우리 집 인간이 그러는데, 둘이 뭔가 있는 건 맞다고 하던데.

“그걸 내가 네게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나?”

-응. 그래야 내가 노선을 정하니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은서 선본 거 알아?

“……그게 왜.”

-그 상대방이 누군지도 알아?

“…….”

정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자꾸만 이유 모를 짜증이 일었다.

-흐응, 은서가 어떤 쌩양아치와 결혼해도 상관없다 이거지? 알았어.

“……하. 뭐가 듣고 싶은데.”

-은서, 어떻게 생각해?

직설적인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차은서를……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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