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차은서.”
“……현주?”
제 손목을 잡고 시근덕대는 이의 얼굴을 본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데서 현주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
우연한 만남에 반가움도 잠시 은서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와, 진짜 차은서 맞잖아?”
현주가 어이없다는 듯 제 머리를 쓸어넘기며 헛웃음을 뱉었다.
“오랜만이야. 밥 먹으러 왔구나?”
“그럼 일하러 왔겠니? 여기 사장이 내 지인이야. 그리고 네가 여기 온 건…….”
내가 망할 최민준한테 추천했기 때문이고.
설마하니 최민준이 진짜 왔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 상대가 은서인 건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
“아, 맞다.”
“왜 그래?”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온 현주는 뒤늦게 아차 싶은 얼굴로 제 머리를 콩콩 찧었다.
“지금 가면 최민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오빠가 여길 왜?”
친구들 중 하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게 있어.”
그냥 무시했으면 될 것을, 주접을 떠는 꼴이 어이가 없어 단골집 이름을 저도 모르게 툭 내던지고 말았다.
“에이, 알 게 뭐야.”
어차피 이 레스토랑 주인이 현주의 가까운 지인이라는 건 어울리는 무리 대부분이 잘 아는 사실이었다.
“들어가자.”
찝찝함을 떨치고 입구로 향하는데 마침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가 낯이 익었다.
“음?”
눈을 가늘게 뜨고 보고 있자니 확실히 차은서였다.
여느 때처럼 청바지에 재킷을 걸친 그녀는 세상 우울한 표정으로 레스토랑에 들어서고 있었다.
“쟤가 이 시간에 웬일로 이 멀리까지?”
호기심이 인 현주가 서둘러 뒤를 쫓아 들어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 은서의 뒷모습이 보였다.
“!”
살금살금 조심스레 쫓아간 현주는 곧 경악하고 말았다.
은서의 의자를 빼주며 가식을 떠는 남자는 다름 아닌 최민준이었다.
“미친……!”
욕을 하려다 입을 틀어막은 현주가 재빨리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다시 보고 또 봐도, 최민준과 은서였다.
‘결혼한다는 여자가 설마 차은서야? 대박, 대박.’
어쩌다 최민준 같은 놈에게…….
‘그런데 정혁 오빠랑 만나는 거 아니었나?’
최민준이 쓰레기인 것을 알리는 것과 별개로 은서가 정혁과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야, 뭐 해?”
뒤늦게 현주를 따라 온 친구들이 현주의 어깨를 툭 쳤다.
“쉿쉿.”
다급히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댄 현주가 안을 힐끗 살폈다.
계속해서 지켜볼 수도 없고…….
현주는 마침 주문을 받으러 가는 직원을 발견하곤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다행히 안면이 있는 직원이었다.
“미안한데요, 혹시 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요.”
“네네.”
“자리 뜨면 나한테 말 좀 해줄래요?”
직원에게 신신당부하고서야 현주는 친구들 틈에 섞여들었다.
그리고 밥을 먹는 내내 직원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
“여튼. 너 나 좀 보자.”
“지금?”
다짜고짜 손목을 잡아끄는 현주에 은서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 지금! 중요한 할 말이 있어!”
이 순진하고 멍청한 아가씨에게 진실을 알려줘야 했다.
너 지금 스스로 지옥 불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거라고.
“지금은 일행이 있어.”
“그 일행……!”
어떻게 말도 못 하고 현주가 입술만 질근거렸다.
“알아, 최민준이잖아!”
결국 고민하던 현주가 빽 소리를 지르다 말고 말끝을 씹었다.
“…….”
현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은서는 당혹스러워졌다.
“……아는 사이야?”
설마, 정혁과도 아는 사이일까?
제일 먼저 든 걱정은 그거였다.
“걔랑 결혼한다는 거, 너지?”
“!”
“야, 안 돼. 미쳤어?”
현주가 동생을 혼내듯 은서의 팔뚝을 철썩철썩 내리쳤다.
마침 화장실로 가던 다른 손님이 두 사람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봤다.
“너 정혁 오빠랑 만나는 거 아니었어?”
정혁의 이름이 나온 순간 은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현주야. 나중에 다시 만나.”
이러다 민준이 보기라도 하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만나서 다시 이야기해.”
“……알았어.”
그제야 뒤늦게 은서의 상태를 눈치챈 현주가 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너 저 자식이랑 절대 술 마시러 가지 마.”
“응.”
“연락할게.”
“응.”
현주에게 약속을 남기고 은서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아직 민준을 어떻게 정리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상황이 더 복잡해진 것 같았다.
*
“은서 씨, 술은 해요?”
불편한 식사가 끝나고 그가 자리를 이어 갈 것을 권해 왔다. 현주의 당부가 생각나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마 이 남자, 착하고 좋은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주가 그토록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난리 치진 않았을 거다.
“죄송해요. 시간이 늦어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데려다 드릴게요.”
“아뇨, 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요. 좀 걸을까 해요.”
“그럼 같…….”
“괜찮아요, 가보겠습니다.”
무례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쳐내는 것.
그간 축적된 노하우로 은서가 제일 자신 있는 부분이었다.
역시나 더이상 권하지 못하는 민준을 두고 걷기 시작한 은서는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서둘러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아 탔다.
‘설마 몇 시에 헤어졌는지까지 보고하지는 않겠지?’
고민하던 은서가 목적지를 말하곤 휴대폰을 꺼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다 끊겼다.
“저예요. 혹시, 지금 어디예요?”
-회사. 왜?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걱정이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잠깐…… 볼 수 있어요?”
-…….
“바쁘면 괜찮아요. 그냥 혹시나 하고요.”
곤란했는지 침묵하는 정혁에 은서가 빠르게 덧붙였다.
-지금 어디야?
“아, 지금 청담이긴 한데……”
-그리로 갈게.
“아뇨, 벌써 택시 타고 가는 중이에요.”
-…….
“얼굴만 잠깐 볼까 해서요, 한 10분 정도…….”
-회사로 와. 도착해서 전화해.
“네.”
전화를 끊자마자 심장이 콩닥거렸다.
“저, 기사님. 죄송한데 삼성동으로 부탁드릴게요.”
모처럼 얻은 저녁의 자유였다.
잠깐의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그리고 은서가 선택한 건, 정혁을 보는 거였다.
끊긴 휴대폰을 보는 정혁의 눈이 짙어졌다.
통금이 있어 저녁 시간에 나오지 못하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딱 한 번, 이 시간에 나왔을 때는 썩 좋지 않은 상태였단 게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초조해졌다.
걱정이 차오른 탓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결국 몸을 일으키고 창가에 다가섰다.
은서가 오는 데 걸릴 시간을 가늠해 보며 정혁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응? 어디 가?”
대표실을 나서는데 마침 마주 오던 도훈이 깜짝 놀라 물었다.
“잠깐이면 돼.”
“야, 어디 가는데?”
도훈을 무시하고 모서리 진 복도를 꺾자 엘리베이터 앞에 우르르 몰려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정혁을 발견한 직원 하나가 허리를 숙이자 나머지 직원들이 따라서 합창하듯 인사를 해왔다.
“…….”
그제야 뒤늦게 퇴근 시간을 넘긴 것이 떠올랐다.
그대로 멈춰 선 정혁이 난감한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
회사 근처 어디든 직원들의 눈이 있을 터였다.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해하던 은서 때문에 일부러 제집만 전전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결국 고민하던 정혁이 다시 몸을 돌렸다.
“버리고 갈 땐 언제고 왜 다시 와?”
“그만 들어가요.”
툴툴거리는 도훈을 보며 정혁은 데스크 직원에게 퇴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너도 할 일 없으면 그냥 들어가고.”
“장난해? 할 일이 없겠어?”
“그럼 비서실 다 같이 밥이나 먹고 와.”
“……왜 이래?”
“손님이 올 거야.”
“손님? 누구?”
“알 거 없어.”
도훈이 대표실로 휙 들어가 버리는 정혁을 쭐레쭐레 따라왔다.
“뭔가 의심스럽다? 말 안 해주면 안 나갈 거야.”
“그럼 네가 마중 나가든가.”
“내가? 누군데 그래?”
마침 정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 속 이름을 확인한 정혁이 그대로 도훈에게 보여줬다.
[차은서]
세 글자를 본 도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려가서 들어올 수 있게 입구만 열어줘.”
“오호라, 공주님이 오신다 이거지?”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한쪽 눈썹을 찡그린 정혁이 더이상 신소리 말라는 듯 다그쳤다.
“네네, 당연히 가 봐야죠.”
“쓸데없이 아는 체는 하지 말고, 입구만 열어주고 가.”
“네, 알겠습니다.”
신이 난 듯 도훈이 총총걸음으로 나가고서야 정혁은 전화를 받았다.
“도착했나.”
-네. 회사 앞에서 내렸는데요.
그녀의 설명에 창가로 다가가자 은서가 조그만 인형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
“올라와.”
-……네?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 아는 얼굴이 있을 거야. 말은 굳이 섞지 말고 15층, 대표실로 와.”
-아, 네.
·
회사로 들어오라고?
그래도 되나?
망설이던 은서는 일단 건물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정장을 입은 남녀들이 연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로비를 가로지르자 엘리베이터로 이어지는 길목에 보안 카드를 찍게 되어 있었다.
“여기예요.”
앞에서 어찌하나 멈춰서자 바로 반대편에서 어떤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아.”
전시회에서 정혁과 같이 있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데 그가 제 사원증을 잡아당겼다.
“이리로 들어와요.”
“네.”
게이트가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은서가 어색하게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 버튼을 눌렀다.
옆에 선 도훈이 계속해서 말을 걸고 싶은 듯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반가워요, 은서 씨.”
그는 15층에 내리고 나서야 말을 다시 건네왔다.
“강도훈이에요.”
“알아요. 현주가 좋아하는 분.”
“아, 음……. 대표실은 저쪽으로 가면 돼요.”
도훈이 예상치 못한 말에 난처해하다가 말을 돌렸다.
“네, 감사합니다.”
“저, 은서 씨?”
“?”
“정혁이 좋은 녀석이에요.”
“……네, 알아요.”
그가 건넨 말이 사뭇 새삼스러웠다.
왜 제게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의아해하면서도 공손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도훈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만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
그를 뒤로한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혁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짧아 마음이 급했다.
막 코너를 돌아 대표실 앞으로 도착했을 때, 안에서 문이 열렸다.
“어서 와.”
마중하듯 나온 그가 픽 웃었다.
그 희미한 미소에 이상하게도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