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34화 (34/82)

34.

중훈은 말이 없었다.

그는 은서의 말을 곰곰이 곱씹는 듯했다.

‘제발. 제발.’

은서는 태평한 척 굴려 애쓰면서 간절히 빌었다.

그림은 언제라도 다시 그릴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달랐다.

중훈의 감시에서 벗어날 날 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지도 모를, 중훈이 고른 낯선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건 중훈 이외에 또 다른 감시자가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유로워질 기회를 아예 박탈당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은서는 중훈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을 때.

“……생각해 보마.”

마침내 중훈의 입에서 기다리던 말이 흘러나왔다.

은서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온전히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잠시나마 유예의 시간을 얻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대신 몇 번 만나보도록 해.”

“……네.”

“가 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재를 빠져나왔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마자 주르륵 힘이 풀렸다. 문에 기대어 풀썩 주저앉은 은서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

수없이 괜찮다는 말을 되뇌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고 있기를 한참.

문득 창밖을 보니 어느새 어둠이 깔려 있었다.

은서는 서둘러 휴대폰을 찾았다.

‘뭐라고 보내지?’

메시지 창을 열어놓고 망설이다 조심스레 썼다.

[집에 왔어요.]

보내놓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방 안을 서성이고 있자니 진동이 울렸다.

[몸은.]

정혁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쿡, 웃음이 터졌다.

아직 뻐근한 느낌은 있지만, 그가 저렇게 집착적으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제 상태를 묻는 게 좋았다.

이 지구상에 한 명쯤, 자신을 걱정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아파요.]

잠시 기다렸지만,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괜히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에 보내놓고 조금 후회가 됐다.

‘실수했나.’

머쓱해진 은서가 다시 덧붙이려 문자를 쓰려 할 때였다.

[갈까?]

“…….”

두 글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울렁거렸다.

은서는 두 손으로 휴대폰을 잡고 그만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집에 들어와 중훈과 마주하며 지쳤던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정혁은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도망칠 곳이 있다는 게 이렇게 안정감과 위로를 줄 줄은 몰랐다.

“괜찮아.”

그의 메시지가 있는 휴대폰에 이마를 맞대고, 은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격려했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잘 자요.]

은서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며 정혁은 등받이로 털썩 몸을 기댔다.

“…….”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프다니…….

너무 거칠게 굴었나 조금 걱정이 됐다.

처음엔 이성을 꽉 붙잡은 채 은서를 안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이성은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았던 것 같았다.

보드라운 살결과 귓가에 새겨지는 여린 신음은 맨정신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차은서에 취해버린 밤이었다.

어느 것 하나 매혹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하.”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을 좋은 남자라 여겨 본 적도 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여자를 도구 취급하는 저급한 남자도 아니었다.

그랬는데, 차은서에게는 결국 나쁜 남자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는 감정 없이 게임 운운하며 자신을 안은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정혁은 그 사실이 몹시도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위험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스스로 그어 놓은 선을 넘어설지도 몰랐다.

욕심내고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피곤한 듯 눈을 감은 정혁은 제게 주어진 역할을 되새겼다.

*

“거 더럽게 튕기네.”

감감무소식인 휴대폰을 보며 민준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다시 만나자며 친절하게 문자까지 남겨뒀건만, 은서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벌써 몇 번째 씹힌 탓에 슬슬 자존심이 상하려 했다.

“누구?”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일행이 궁금해하며 물어왔다.

“있어, 그런…… 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민준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도 확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이현주.”

민준이 씩 웃으며 이름을 불렀다.

몇 번 작업을 걸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만 콧대 높은 여자였다.

“이게 누구야?”

민준을 발견한 현주도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체를 해왔다.

“오랜만이다, 이현주?”

“그런가? 그런데 왜 여기 있어?”

“새삼스럽게?”

민준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결혼한다며?”

“어라,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

“이 바닥에 비밀이 어디 있니?”

“하긴.”

한 다리 건너면 어떻게든 연결되는 사이였다.

“어때? 남의 떡이 된다니까 좀 아쉬워?”

“글쎄. 그건 모르겠고, 그냥 어떤 여자인가 조금 궁금하긴 하네.”

“아아. 보면 놀랄걸?”

“왜? 어떤 여자길래?”

현주가 속으로 혀를 차며 되물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대형 교회 목사의 아들이 알고 보니 유흥업계의 VIP라니.

물론 저도 노는 걸 즐기긴 하지만, 민준처럼 난잡한 건 싫었다.

적어도 스스로 싸구려가 될 생각은 없었다.

“인형 같은 아가씨지.”

“예쁘다는 뜻인가?”

“얼굴뿐만이 아니야. 아마, 트리플 S급?”

여자를 떠올리는 듯 뜸을 들이더니 품평을 매기듯 웃는 모습에 없던 정나미가 다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여자도 오빠 이러고 노는 건 아니?”

“알겠어? 이런 데는 발도 안 들여봤을 온실 속 화초인데.”

“쯧. 안 됐네, 그 여자도.”

“안 되긴. 오히려 날 만났으니 다행이지.”

“그냥 끼리끼리 만나. 불쌍한 여자 인생 망치지 말고.”

“흐응, 그럼 네가 만나주게?”

“됐네요.”

“아, 잠깐.”

현주가 막 자리를 뜨려던 때 민준이 휴대폰을 집었다.

[네, 그래요. 한 번 뵙죠. 어디서, 언제 뵐까요?]

화면을 보던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야, 어떤 여자인지 궁금하지 않아?”

민준이 화면을 톡톡 두들기며 장난스레 물었다.

“내가 왜?”

“흠.”

질투 작전도 안 먹히고.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으로 보이는 은서를 제 입맛대로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만, 역시 사나운 이 여자를 제 밑에 꿇리는 것도 한번은 해보고 싶었다.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현주를 본 민준이 전략을 바꿨다.

“네 또래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데 없냐? 추천이나 해주고 가라?”

“하?”

“내가 또 마음먹으면 순정파거든.”

“그래, 잘해 봐.”

“궁금하면 내일 저녁 때 보러 와라? 와서 힘 좀 실어주고 가든가.”

적선하듯 툭 단골 레스토랑 이름을 던진 현주가 미련 없이 돌아서자 민준이 장난치듯 큰소리로 외쳤다.

“웃겨, 진짜.”

현주가 똥 밟았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요.”

“생각 잘했다.”

민준이 직장인이라는 핑계로 은서는 저녁 외출을 요구했다.

중훈은 만족스러운 듯 흔쾌히 허락했다.

며칠 전 외박했을 때를 제외한다면 저녁에 집 밖에 나온 건 거의 몇 년 만이었다.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 싫긴 해도 이 자유는 나쁘지 않다 여겨졌다.

하지만 이 자유도 오늘로 끝이었다.

남자를 만나면 제 생각을 전하고 중훈에게서 말이 나올 수 없게끔 정리할 생각이었으니까.

입은 옷도 맞선 상대를 만나러 가는 옷차림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쯤 일하고 있겠지?’

지하철에서 내린 은서는 정혁을 생각했다.

저녁은 먹고 일할까, 일할 때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걸 안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도 조금은 궁금했다.

그래도 하룻밤 같이 보내기까지 한 사이인데…… 조금은 신경 쓸까.

내내 정혁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후.”

한숨을 내쉰 은서는 문을 밀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왔어요?”

“안녕하세요.”

창밖을 보던 민준이 은서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의자를 빼주었다. 몸에 밴 건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매너였다.

“학교에서 오는 길인가 봐요?”

민준이 은서의 차림을 슥 보고는 눈꼬리를 접었다.

“아뇨, 집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렇군요.”

민준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원판이 뛰어나서 꾸미는 데 관심이 없는 건가?

나름대로 데이트 자리인데 영 성의 없어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늘 화려한 차림의 여자만 봐온 터라 민준은 그런 은서가 조금 낯설었다.

그래도 워낙 빼어난 미모라 보는 맛은 있었다. 게다가 차중훈의 딸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대통령까지 가는 건 문제도 아니야.”

꼭 붙잡으라고 잔소리하던 순규의 당부도 생각났다. 떠밀려 하는 결혼이라지만 이 정도면 꽤 남는 장사였다.

“바쁘시죠?”

인형처럼 표정 없는 입술 사이로 뜬금없는 질문이 나왔다.

나름대로 신경 쓰는 건가?

민준이 씩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바빠도 은서 씨 만날 시간은 낼 수 있어요.”

“…….”

은서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슈트를 갖춰 입은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딘가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

슈트까지도 제 피부처럼 소화해내는 남자가 생각났다.

그 남자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주문하시겠습니까?”

다가온 직원에게 민준이 자연스레 음식 이름을 나열했다. 그 과정에 은서의 의견을 묻는 일은 없었다.

제가 추천하는 음식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결혼, 급하세요?”

직원이 떠나가자 은서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네?”

“아직 결혼 서두를 나이는 아니신 것 같아서요.”

“아, 그렇긴 한데.”

지금 날 떠보는 건가.

민준이 말끝을 흐리며 은서의 속내를 가늠해봤다.

이런 걸 묻는 걸 보니 완전 맹탕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제가 예민한 걸 수도 있었다.

어린 애고 숫기도 없다 하니 결혼이라는 상황에 겁을 먹은 걸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야 우쭈쭈 달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워낙 은서 씨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호기심이 좀 있었거든요.”

민준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만나 뵙고 나니, 이 결혼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가요?”

애매한 은서의 반응에 민준이 갸웃거리는 사이, 음식이 서빙되었다.

“많이 먹어요, 은서 씨. 맛있을 거예요.”

본심은 모르겠으나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남자는 제게 호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파투 냈다가 중훈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남자의 진짜 속내를 파악하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잠시…….”

날카롭게 그와의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피곤해진 은서가 양해를 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로 가 손을 닦고 잠시 숨을 돌린 뒤 나왔을 때였다.

“……!”

누군가 은서의 손목을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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