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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안고, 울리고-33화 (33/82)

33.

눈을 깜빡이던 은서는 문득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는 힘에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의 정체는 정혁의 팔이었다.

‘아, 가지 말라고 붙잡았었지.’

그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한 게 생각났다.

고맙게도, 그는 정말 은서의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체면이고 뭐고 없이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했으니 그 나름대로 배려해 준 걸지도 몰랐다.

‘정말 잘생기긴 했네.’

은서는 깎아놓은 듯한 정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날, 현주를 따라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게 된 것도, 어쭙잖은 유혹으로 그에게 덤벼들었던 것도 창피한 기억이 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솔직히 그가 진짜로 저와 잘 줄은 몰랐다.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그는 자신을 취했고, 덕분에 그에게 모든 걸 내던져 버렸다.

몸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던 끔찍한 시간까지도.

섹스는 다 이런 걸까.

온몸이 격한 운동을 하고 난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래서인지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깊은 단잠을 자고 난 사람처럼 개운했다.

이대로 다시 잠들까도 싶었지만, 더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망설이던 은서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정혁의 눈가를 쓸었다.

미동도 없는 그에 조금 더 용기를 내 콧날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다 그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안 잘 건가.”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손가락 끝이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화들짝 놀라 손을 뺀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깼어요?”

“…….”

가로로 긴 눈이 희미하게 뜨였다.

그 틈으로 늘어진 그의 눈동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몸은.”

“……괜찮아요.”

“오늘은 쉬는 게 좋겠어.”

허스키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혁이 위로하듯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쓸었다.

가녀린 몸으로 혹사당하다시피 거친 섹스를 감당해야 했으니, 꽤 힘들 거였다.

처음이란 걸 알면서도 배려하지 않았다.

차은서가 제게 원하는 건 배려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안타깝게도 그녀가 원하는 건 현실을 잊게 해 줄 더한 고통, 혹은 자극이었을 테니.

“…….”

깨어났으니 놓아주리라던 예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은서의 허리를 더 강하게 감은 그가 제게로 끌어당기며 몸을 붙였다.

정혁이 은서의 목 아래로 놓인 팔을 안으로 감아 손가락 끝으로 은서의 머리를 빗어 내렸다.

스르륵 부드럽게 만지는 손길이 다정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문득 학교고 뭐고 다 신경 꺼버리고 그의 옆에 있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야죠, 그래도. 난 성실한 학생이니까.”

그의 품에 파고들면서도 은서는 생각했다.

이 뜻 모를 다정함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이 남자가 제게 원하는 건 게임이었다. 언젠가 흥미를 잃으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그러니 이 남자는 제게 현실이 아니라고. 언젠가 눈을 뜨면 깨어날 꿈같은 남자라고.

그러니, 너무 깊이 취하면 안 된다고.

*

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를 세운 정혁이 몸을 돌려 은서를 눈으로 훑었다.

“차은서. 두 번은 안 물어. 진짜 괜찮겠어?”

“……괜찮다니까요.”

은서가 더 장난스럽게 코끝을 찡긋하며 웃었다.

일부러 그의 출근 시간에 맞춰 수업이 있다 거짓말한 참이었다.

처음이었을 자신을 배려한 건지 그는 꽤 다정하게 굴려 애쓰는 것 같았다.

어젯밤 거칠게 자신을 취하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상한 사람.

하지만 연인이 아닌 사이에, 그의 배려는 오히려 민망했다.

그저 하룻밤을 보내는 여자였다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이조차도 저를 어린 애 취급하는 것 같았다.

“가볼게요.”

그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 차에서 내렸다.

“…….”

문을 닫으려다 말고, 은서는 허리를 숙였다.

“저기요.”

“왜.”

“……우리, 또 보는 건가요?”

어름거리던 은서가 정혁을 바라봤다.

“하? 그럼 안 볼 생각이었나?”

“어,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퉁명스레 돌아오는 대답에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자버렸으니, 더이상 그가 저를 만나지 않으려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흥미를 잃은 줄은 몰랐는데. 내가 실망하게 한 건가.”

“……네?”

“그랬다기엔, 좋아하며 안겼던 것 같은데.”

정혁이 어이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짓궂게 끌어올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은서가 톡 쏘아붙였다.

“갈게요.”

“차은서.”

“왜요.”

“연락해. 내가 하기 전에, 네가 먼저.”

“…….”

은서는 벌어졌던 입술을 감쳐물었다.

“약속했잖아, 도피처가 되어주겠다고.”

움찔한 은서의 눈동자가 정혁에게 향했다.

“게임은 네가 이겼어. 그러니까 마음껏 이용해 먹어.”

“…….”

“흔쾌히 당해줄게.”

·

쿵쾅대는 심장이 아직까지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정혁의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여느 때처럼 서늘하긴 해도,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던 것 같기도 했다.

멈춰 선 은서는 심장 부근에 손을 올리고 길게 호흡했다.

“이건, 그러니까…….”

두근거림을 설명할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 뛰어.”

후, 길게 숨을 내쉬며 은서는 휴대폰을 꺼냈다.

어제 집을 뛰쳐 나온 이후로 신경을 쓰지 않은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 해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일단 충전부터 하자.’

그래야 정혁의 분부대로 연락하든 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작업실로 가자 아이들이 비상용으로 둔 여러 개의 충전기가 있었다.

폰을 꽂은 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을 켰다.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수십 통의 문자가 연달아 울렸다.

잠잠해질 때까지 내버려 둔 뒤에야 내용을 확인했다.

[은서야, 어디니?]

[보면 연락 좀 줘.]

전부 경미의 문자였다.

[은서야, 네 아버지도 걱정하고 계셔.]

‘그럴 리가.’

가장 마지막에 온 경미의 문자를 본 은서가 코웃음 쳤다.

이미 중훈의 진심을 정면으로 마주해버린 후였다. 수영을 향한 중훈의 증오심은 저에게까지 뻗쳐 있었다.

경미의 문자를 모두 확인하고 끄려는데 다른 문자 한 통이 있었다.

‘누구지?’

낯선 번호였다.

확인차 메시지를 누른 은서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최민준입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또 만나요, 우리.]

정혁 때문에 한껏 솟아올랐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꿈속을 노닐다 현실로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정혁에게 취해 잠시 잊고 있었다.

현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제 앞에 산처럼 산적해 있다는 사실을.

*

-은서야!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울먹거렸다.

“……늦게 연락드려 죄송해요.”

-지금 어디야? 응?

“학교에요.”

-하아.

그제야 경미가 안심한 듯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연락도 안 되고, 어딜 갔었던 거야?

“죄송해요.”

-학교랬지? 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그녀가 서두르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어디로 도망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요?”

은서가 눈을 감으며 물었다.

“내보낼 거다.”

부디 중훈과 나눴던 대화를 경미가 듣지 못했기를 빌었다.

중훈을 사랑한다던 그녀가 받게 될 상처가 가늠되질 않았다.

-아버지는 일정이 있으셔서…….

“아.”

-밤새 못 주무셨어, 너 걱정하신다고.

경미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배려가 고맙긴 하지만, 어차피 거짓일 걸 알았다.

길길이 날뛰며 경미에게 화풀이했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위선을 떨었겠지.

-어제 무슨 일 있었니? 응?

‘듣지 못했구나.’

조심스레 묻는 그녀에 이번엔 은서가 안심했다.

“아녜요, 아무것도. 수업 끝나면 집에 들어갈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정말 올 거니?

“……네.”

은서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대답했다.

제가 차은서인 이상.

진실이야 어쨌든 차중훈의 딸인 이상.

계속 피하고 도망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의 마음이 치료될 때까지 기다렸지만,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중훈과 부딪치며 설득해나가는 수밖에.

아무리 밉고, 원망스러워도 중훈은 하나뿐인 제 가족이었다.

한때는 자신을 사랑해 마지않던, 아버지였다.

고통스러워도, 인내해야 했다.

아내인 수영에게 버림받은 그를, 딸인 그녀가 또 한 번 버릴 수는 없었다.

*

“다녀왔습니다.”

“은서 왔니?”

내내 오기만을 기다렸는지 경미가 득달같이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하루 만에 얼굴이 핼쑥해졌네. 어제 비도 많이 왔는데.”

경미가 은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

그녀의 손이 볼을 스치자 은서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중훈에게 맞은 곳이 아직 낫지 않은 상태였다.

“어머, 어디 아파?”

“……아녜요.”

우습게도, 경미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 거친 정사를 나누면서도, 정혁이 제 얼굴을 만질 때만큼은 조심스러웠다는 것이.

정혁을 생각하고 있자니 집에 들어섰는데도 웃음이 날 것 같았다.

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은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은서야, 아버지 집에 계셔.”

경미가 그냥 2층으로 올라가려는 은서를 붙잡았다.

“…….”

잠시 고민하던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갈아입고 내려와서 인사드릴게요.”

“어? 어. 그럴래?”

유예의 시간을 얻은 은서는 중훈에게 할 말을 정리하며 다시 내려왔다.

서재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책상 앞에 있던 그가 눈만 들어 은서를 확인했다.

“…….”

다짜고짜 화를 낼 줄 알았던 그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봐주는 건 이번 한 번이다. 명심해.”

보던 책에 눈을 고정한 채, 중훈이 건넨 첫 말은 경고였다.

“……제가 미우세요?”

그제야 중훈의 고개가 완전히 들렸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는 듯 짜증 섞인 표정이었다.

“제가, 사라지길 바라세요?”

“뭐야?”

“원하시는 게 그건가 해서요.”

“스스로 기어들어 오기에 반성하는가 싶어 봐주고 넘어가려 했더니.”

중훈이 이죽거렸다.

“반성하고 있어요.”

“…….”

“아빠가 원하는 삶을 살게요. 학교 졸업하면 그림은 손도 대지 않을 거고, 말씀하신 대로 아빠가 들어가라는 곳에 가서 일할게요.”

분노로 일렁이던 중훈의 눈동자가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러니까, 결혼만큼은…… 아빠가 양보해주세요.”

“…….”

“절, 조금이라도 아끼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제발요.”

그녀에게 그림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제일 잘 알고 있는 중훈이다.

은서로서는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패를 내민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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